일본 노정객으로 유명한 산본선차량(82)은 동경 풍도구에서 살고 있다. 1934년 1월 12일 그는 돌연 상해로 가 12일 동안 체류하면서 비밀리에 만주로 향하였다. 조선인과 러시아인을 이용해 매장된 곳을 탐사하였다.
러시아 로마노프 황실의 4억5천만 루블, 1930년대 당시 시가 8억원의 보물이 가난한 조선인의 손에 어떻게 흘러들어갔을까? 500년 전 옛날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정감록에 실린 “경성에 도읍한 이李 왕가의 치세 500년 후 정鄭가가 천명을 받아 조선왕이 되어 계림에 도읍을 하리라”라는 구절로 인해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 정씨집안은 조선정부의 명령으로 몰살을 당하게 되었다(1860년대 민란에 관여한 건 아닐지). 정오봉은 2살 된 나이로 남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모면하고 8살에 이웃사람을 따라 러시아 시베리아로 망명하게 된다. 정오봉은 러시아에 귀화하고 페테르부르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1차세계대전에서 육군소장으로서 시베리아 혼성군단을 이끌고 동부전선에 출전해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다. 러시아 황제는 그의 공을 알게 되어 여러 번 훈장을 준다. 독일군의 맹공격에 반격을 하다 정오봉도 폭탄에 다리를 상한다. 부상을 당한 그는 후방에서 휴양하고 있을 때 러시아 니콜라이2세 황제가 그를 시종무관장으로 임명한다. 니콜라이 2세가 이궁에 유폐된 후에도 충실히 모신 그는 황제에게 극비리에 만주 망명을 위해 준비한 비자금을 받게 된다. 황제는 망명길에 죽게 되고 정오봉은 보물을 시베리아로 옮겨 길림 훈춘 부근 국경에 깊이 묻어두었다. 러시아적군과 스파이들의 감시로 옮길 수가 없게 된 까닭이다. 매장지점은 훈춘에서 약 5리 가량 되는 연추라는 벌판이다.
1921년 최봉(최인정)은 훈춘으로 들어가 정오봉과 협의해 보물을 발굴하고 운반할 계획을 세웠다. 소련측의 감시가 심하고 정오봉의 신변에 위협을 느껴 중단한다. 정오봉은 상해로 향한다. 1925년 이완용 백작을 움직여 이 운반계획을 세운 일도 있고(앞선 게시글에 일본제국 정부에 의뢰하기 위해 피희승 등이 접근한 이가 이완용으로 보인다. 1926년 이완용이 죽게 되면서 흐지부지 하게 되는 걸로 추정) 1928년 대창희팔랑의 도움으로 발굴운반을 하려다 소련군대가 주둔하고 있어 실패한다. 정오봉은 상해에서 중병에 걸려 급사하고 최인정이 보물을 파서 만주에 거주중인 조선인을 위한 발전사업을 하자고 산본선차량에게 제의한다. 최인정은 1933년 8월 러시아 국경지역을 탐사하다 마적에게 살해당한다. 산본선차량은 노구를 이끌고 멀리 상해까지 와서 금덩어리의 유래와 소재지를 탐사하고 있다. 러시아령에 있는 조선인 사이에 이와 같은 이야기(러시아황제비자금)가 돌고 있다고 한다. 일본 노정객이 직접 몸을 이끌고 만주로 올만큼 황금에 대한 인간의 탐욕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황금광시대에 금이라면 너나없이 덤비는 이 세상에 8억원의 돈은 누구의 수중에 들어갈 것인가?
출처 |
출처는 자작입니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에서 이 사건과 관련된 동아일보기사를 종합하고 제 역사적 상상력을 더해 재구성했습니다.
이번 게시글은 1934년 2월 7일 올라온 기사를 현대식에 맞춰 번안한 것입니다. 즐감해주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