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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단편] 너의 의미
게시물ID : readers_2224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께소
추천 : 14
조회수 : 1016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5/10/20 23:4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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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의미

 

나는 생각했다. 감자 자루에서 쏟아져 나오는 감자와 알약 통에서 쏟아져 나오는 알약이 어떻게 닮았는지. 눈을 감으면 그래도 네 얼굴쯤은 머릿속에서 그려질 줄 알았는데 거무튀튀한 파란색 밖에는 보이지 않더라. 네가 솔직했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너는 거짓말보다는 티가 나는 거짓말을 싫어했고 입을 다문 채로 웃음을 삼키는 것보다는 활짝 웃는 입을 손등으로 가리는 것을 좋아했다. 너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들에는 손을 뻗지 않았다. 나는 너의 그러한 점을 배우려 애를 썼다. 너와 비슷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라도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너의 뒤돌아보지 않는 고개가 되기를 바랐다.

 

열다섯 살의 내게는 싫은 게 셀 수 없이 많았다. 회색빛의 오염된 공기가 눈에 보이는 멕시코시티, 그 속에 유령의 집처럼 자리한 나의 집, 같은 교복을 입은 사내놈들, 다른 교복을 입은 계집애들, 초록색 버스, 뜨거운 동전, 가벼운 책가방. 하지만 무엇보다 문학수업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담당 선생의 빨간 머리와 까무잡잡한 피부의 부조화는 물론이고 수업시간마다 읽어야 하는 두툼한 소설책은 내게 심한 두통을 일으켰다. 허옇게 질린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는 나를 보며 선생은 언제나 마지못해 나를 양호실로 보내곤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나는 수업 중에 두통을 호소했고 양호실 침대 위에서 낮잠을 잘 수 있는 한 시간을 획득했다. 하지만 매일 그랬듯이 잠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있으려니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얼굴 위로 누군가의 손가락이 닿았다. 하나의 손가락이 내 미간을 꾹꾹 마사지하듯 누르며 그곳에 자리 잡은 주름을 펴주었다. 어머니는 내게 단 한 번도엄마 손은 약손이다라 가만가만 노래를 부르며 아픈 배를 문질러 주신 적이 없었지만, 아마도 그 손이 주는 느낌은 이 손가락이 주는 느낌과 비슷할 것이라 짐작했다. 따뜻한 손가락과 부드러운 손바닥이 내 머릿속에서 겹쳐진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손가락이 내 얼굴을 떠나려는 순간 나는 눈을 떴다. 처음 본 너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그 어떤 사진보다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너는 내가 누워있는 침대 옆으로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몰래 하던 일을 들키면 조금쯤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게 당연하건만 너는 그저 나를 계속 빤히 바라봤다. 나도 지지 않으려고 너를 마주봤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까맣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라는 작품이 다루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사랑이야.”

네가 기다렸다는 듯이 갑자기 입을 열어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단 한번도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아. 맨 마지막 문장을 빼고는.” 그러고 보니 몇 주 전부터 문학 시간에 그 <향수>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오늘 수업 내용이야.” 너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답했다.

“뭐?”

“잊어버리지 말라고.” 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밖으로 나서려는 너를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불러 세웠다. “야!” 원래는 이름을 물어보고 싶었다.

“왜?” 하지만 너무도 무심한 그 표정과 목소리에

......너 우리 반이냐?” 나답지 않게 말이 헛나갔다. 아마도 내 얼굴은 빨갰으리라. 빨간약보다 더.

“너 감자머리냐?” 내게 그렇게 되묻는 너의 얼굴은 조금도 일그러져 있지 않았고 되레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소설책의 하얀 종이처럼 빳빳했다. 아니, 그것보다.

“뭐? 감자머리?”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래. 같은 반에서 지낸 지 삼 개월도 더 된 사람 얼굴 하나 기억 못 하다니. 감자머리가 아니면 뭐겠어?” 너는 그렇게 툭 대답하고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사라져버렸다.

나를 최초로 감자머리라 부른 녀석이 양호실을 나가버린 후 나는 침대 위에 앉아 그가 열고 닫았음이 분명한 문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고 마지막엔 큰소리로 하하거리며 웃고 말았다. 감자머리라니. 그때까지 들어본 그 어떤 심한 욕보다 더 내게 타격을 준 단어였다.

양호실을 울리던 웃음소리가 점차 옅어지고 끝내 얇은 커튼 같은 미소만이 얼굴에 남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중학교 삼학년이 된 이후로 처음 소리 내어 웃었다는 걸 깨달았다.

 

교실에 다시 돌아가 제일 먼저 너를 찾았다. 너는 내 자리가 있는 줄의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우리의 사이엔 다섯 명의 아이들이 끼어있었고 그 사실은 나를 꽤 짜증 나게 했다. 남은 수업시간 내내 눈앞엔 까맣게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전부였다. 너의 머리카락을 곱하고 나누고 나머지는 또 너의 머리카락. 너의 머리카락을 탐하고 정복하고 너의 머리카락으로 인해 사망한 이들이 약 이백만 명. 너의 머리카락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안녕히 계세요. 나는 모든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너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너는 가방을 메고 다른 녀석들처럼 내 앞을 휭 지나가 버렸다.

그때 너의 움직임이 작은 바람을 일으켰고 알 수 없는 향기가 났다. 그 향기를 맡는 순간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귓가에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쩌면 어머니가 내게 노래를 불러주신 적이 있었을지도 모를 거란 착각을 했다. 아픈 곳이 없는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니면 나도 모르게 생긴 상처들이 나도 모르게 아무는 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상처를 입는 순간보다 딱지가 앉는 순간이 더 괴로운 법이라는 걸 나는 오래전에 배웠다.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너의 모습이 보였다. 남색 바지의 주름과 헐렁한 조끼와 새로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검은 구두. 그것의 검은 끈. 그리고 검은 밑창. 네가 교실을 떠난 후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그 향기가 계속 맡고 싶어 숨을 몇 번이고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이 짓이겨진 다홍색 봉선화가 된 기분이었다. 작고 끝이 뭉툭한 돌멩이가 자근자근 내 가슴을 찧었다. 나는 그날 맨 마지막으로 학교를 나섰다. 한 손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이 오기도 전에 나는 책을 다 읽어치웠다.

 

나는 그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등교를 했다. 무엇보다 문학 시간에도 빠지지 않았다. 수업 중에 선생은 가끔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나는 그녀의 그런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향수>의 가장 마지막 문장을 보거나 너의 뒤통수를 보았다. 나는 내가 왜 그래야만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정답은 여전히 지루한 문학시간에도 한 권의 소설에도 너의 뒤통수에도 없는 것이었다. 모든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너를 기다리지 않았다. 누구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학교를 빠져나왔다. 예전과 달리 밤이 되면 쉽게 잠들 수 있었지만 꿈에서는 검고 검은 파도가 나를 집어삼키고는 했다. 그런 식으로 한 달이 지났다. 우리는 더 이상 <향수>를 공부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시를 지어야만 했다. 나는 내가 쓰게 될 시가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너의 시가 궁금했다. 선생이 가장 잘 써진 시 몇 편을 골라 직접 발표하게 했다. 그 중엔 나의 시가 있었다.

 

아침에 등교를 할 때가 제일 힘이 든다.

버스 운전기사의 웃음소리가 거슬리고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선 언제나 비가 내린다.

내 앞좌석에 앉은 남자애의 머리는 더럽고

옆에서 알은체를 해오는 녀석의 입에선 값싼 악취가 풍긴다.

싫어하는 것들은 이렇게나 많은데

좋아하는 것들은 다섯 손가락만으로도 꼽을 수 있다.

 

시라고 할 것도 없는 글이었다. 너의 시는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수업이 끝난 직후 너에게로 다가갔다.

“네가 쓴 시 좀 읽어보고 싶은데.” 다짜고짜 말을 꺼내는 나에게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너의 시를 보여줬다. 평범한 시였다. 평범한 시와 비범한 시의 차이도 모르는 주제에 그렇게 생각했다. “고맙다.” 그렇게 네게 공책을 돌려주고 몸을 돌리려 했다.

“네가 쓴 시 있잖아.”

너의 목소리에 잠시간 숨을 쉬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날 몇 번이고 들이마신 숨이 있었기에.

“좋더라. 다른 것도 있으면 보여줄 수 있어?”

나는 그것 말고는 써본 적이 없다고 했다. 너는 그래? 라고 답했다. 우리는 몇 초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공책을 쥔 너의 손을 보고 있었고 그것은 너도 마찬가지였다.

“있잖아. 공책 좀 빌려주면 안 될까? 이제 곧 기말고산데 내가 문학 수업을 한두 번 빼먹은 게 아니라서.” 내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싫은데.” 네 말은 진심이었다. 나는 아주 조금 후회했다. “공책 빌려주는 건 좀 그렇고, 같이 공부하자.”

나는 예기치 못한 너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깜빡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하니 네가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진짜 감자머린가.” 나는 어쩐지 앞으로 많이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우리의 교실이 있던 이 층 계단에 앉아서 공부를 했다. 학교가 끝나면 교실문은 항상 잠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너와 마주 앉는 것보다 계단에서 둘이 나란히 앉는 게 더 좋을 뿐이었다. 너는 내 얼굴이 아닌 공책을 보며 설명을 하는 게 편한 듯했다. 나는 언제나 너의 왼편에 앉아 너의 연필을 쥔 오른손과 왼쪽 얼굴을 번갈아 봤다. 네가 연필을 쥐는 법을 보며 문득 내가 연필을 쥐는 법이 궁금해져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꼼지락거렸던 적이 있었다. 네 왼 볼에 점이 있는 걸 보고 내 얼굴에도 점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기도 했다. 그런 시간들이 처음엔 고작 삼십 분이었다. 그것이 네가 모르는 사이에 (나는 알고 있었다) 한 시간이, 또 두 시간이 되었고, 우리의 장소는 학교 계단에서 너희 집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나의 얼굴은 언제부턴가 계속 웃고 있었다.

처음으로 가본 너의 집은 작지만 병아리 같은 노란 빛이 가득했다. 뚜렷한 계절이 없는 나라에 살고 있었건만 네가 사는 그곳엔 기분 좋은 봄이 있었고 웃음이 가득한 여름이 있었고 차분한 가을과 깨끗한 겨울이 있었다. 그 계절 속에서 너의 향기를 맡노라면 저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책으로 가득할 줄 알았던 너의 방에는 아이보리색 이불이 덮인 침대, 서로 매치가 되지 않는 연한 나무색의 책상과 검은 가죽 의자, 그리고 군데군데가 비어있는 책장이 있었다. 나는 네가 방을 나가고 없는 틈을 타 그 책장을 살펴봤다.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네가 눈앞에 있을 때는 왠지 쉽사리 주위를 둘러볼 수가 없었다. 너의 책장엔 나로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책들만이 꽂혀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이 부끄러웠다. 밤이면 잠이 들 수 없는 일보다 훨씬 말이다. 그래서 문학이 (정확히는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는 핑곗거리가) 재미를 잃어가려는 낌새나 기대를 알아차릴 때마다 너의 책장을 보았다. 사실 내 머릿속엔 우리가 함께 읽은 책들로만 채운 너의 책장이 있었다.

 

“요즘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니?”

“공부.”

“네가 언제부터 공부를 했다고.”

“엄마가 언제부터 내 걱정을 했다고.”

“너는 어쩜 네 아빠랑 똑같니.”

“나는 그게 좋아.”

“내가 통나무인줄 알지. 너나 네 아빠나.”

어머니는 그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그녀가 하는 말들이란 전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녀는 절대 욕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차라리 욕을 퍼부었으면 했다.

 

우리는 언제나 저녁을 먹고 너의 집을 나섰다. 너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은 걸어서 십오 분 거리에 있었다. 너는 내가 너의 집에 처음 간 날부터 쭉 나와 정류장까지 함께 걸었다. 우리는 우리만의 게임을 만들어 놀았다. 나는 그것을의미놀이라 불렀다.

“나무.” 내가 먼저 단어를 제시했다.

“생명, 견고함, 한결같음,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 네가 여러 가지 의미를 내놓았다.

“너무 당연해서 재미없다.”

“통나무.” 나의 투정에 대꾸도 하지 않고 이번엔 네가 단어를 제시했다.

“나무의 반대.” 나는 아무렇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무의 반대가 뭐야.” 

......절단, 차가움,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 땔감으로 쓰기에 딱 좋지. 활활 타다가 재가 되는 거야. 차라리 병든 나무가 더 나을걸.” 나는 네 앞에서 오래간만에 일부러 웃었다.

“너무 당연해서 재미없네.”

너의 대답에 놀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너의 입을 통해 나온 나의 말에 말이다. 

“있잖아, 나무는 무조건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통나무는 무조건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건 아냐. 서로 반대가 아닐지도 모르고.”

네가 정확히 뭘 알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가끔 네가 나보다는 더 많은 것들을 알고 또 이해한다고 느꼈다. 그걸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너는 앞을 보고 걸어가고 있고 나는 그런 네 옆에서 너를 보며 걸어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 같은.  

“그럼 통나무의 긍정적인 의미 하나만 가르쳐 줘.” 하지만 나는 간절했다.

“음.” 너는 고민을 하듯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휴대성.”

“휴대성?”

“어디에든 가지고 다니기엔 편할 것 같은데. 깎고 깎아서 작은 조각품으로 만드는 거지. 나무는 내 마음대로 옮길 수가 없잖아.”

“너라면 항상 가지고 다닐 거야?”

“응. 소중하다면 얼마든지.” 

나는 너에게 설득당하고 싶었다.

 

나는 딱 한 번, 우리의 게임을 공부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써먹은 적이 있었다.

“향수.”

“‘사랑’으로 끝나는 이야기.” 내가 장난스럽게 답했다.

“이번엔 새로운 게임이냐?” 너는 정말 싫다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있잖아, 내가 나중에 선생님한테 물어봤거든.”

“뭘.”

“‘사랑’이라는 단어가 딱 한 번, 마지막에만 나오는 거 말이야. 그걸 혹시 선생님께서 직접 찾아내신 거냐고.”

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선생님이 나한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던데?”

너의 표정이 무심했다. 어쩌면 그것은 나만 알고 있는 무심함일지도 몰랐다. 나는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왜 거짓말했어?”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타기 전에 네가감자머리라고 하는 걸 들은 것 같았다.

 

내가 너의 집에 머무는 시간 동안엔 언제나 우리 둘만이 있었다.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지, 형제나 남매는 있는지, 있다면 왜 지금 집에 없는 건지, 궁금한 점이 한둘이 아녔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우리를 제외한 부차적인 인물들의 부재는 중요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아서 나타나겠지.

“‘만약’에 대해선 생각하지 마. 선택할 뻔 했던 길, 결국엔 선택하지 않은 길. 그런 건 아예 생각하지 말라고.” 네가 빼곡히 채워진 공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우리는 너의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고 있었다.

“왜? 그런 상상을 하면 더 재미있지 않아?” 나는 필기를 하던 걸 멈추고 물었다. 오른손엔 검은색 볼펜이 들려있었다.

“그러면 끝이 없어.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 모르게 된다고.”

“끝이 나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끝이 나지 않으면 그건 문학이 아니야.”

“모든 책이 그렇지.”

“그래.”

“그리고 책이 아닌 모든 게 그렇잖아.”

그 말을 뱉음으로써 나는 무심코 무언가를 깨달았다. 나의 이 마지막 말에 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너의 공책을 바라봤다. 그 공백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너를 바라봤다. 네가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추는 모습을 상상했다. 너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나와 눈을 맞췄다. 마치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계산적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의 끝에는 너의 미소가 있었다. 중요한 건 너의 미소였다. 나는 너를 따라 미소 지었다.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딱 삼 년간 나는 평생치의 웃음을 너에게 다 쓰고 말았다.

  

그날 오후는 조금 추웠다. 멕시코시티의 날씨는 언제나 이상했다. 예측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기예보를 보지 않았고 우산을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다. 우리는 버스정류장에서 내가 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에는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은 남자와 긴 블라우스에 긴 정장 바지를 입은 여자가 동시에 걸어 다녔다. 마지막일 줄 몰랐던 그 날이 무슨 계절이었는지, 정확히 몇 월이었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쩌면 나는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너는 긴소매를 입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제대로 기억하고 싶었다. 계절이 없는 기억은 흐리게만 보였다. 그리고 그 기억 속 네 얼굴만은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또렷했다.

“이제 안 봤으면 좋겠다.”

“무슨 소리야?”

“정확한 이유 같은 건 없어.”

“말이 안 되잖아.”

“어차피 같은 대학 갈 것도 아니고.”

“우리 집에서 너희 집까지 버스로 한 시간 거리야. 잘만 다녔어.”

“그런 걸 따지자는 게 아니잖아.”

“너는,” 친구끼리 어떻게 그러냐? 라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우선 나는 너를 친구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너도 나를, 그건 이제 잘 모르겠다. 내게 남은 것이라곤 한때 너와 공부해 쌓은 쓸데없는 문학적 지식과 (우리의 대화는 자연주의적 연극에서나 나올 법한 것이었다) 통나무처럼 싹둑 잘린 우리의 시간, 그리고 이런 순간까지도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너의 얼굴뿐이었다. 그날 나는 걸어서 집에 갔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뜨고 있었다.

가끔 그랬다. 옆에 있으면 너의 알 수 없는 화가 느껴졌다. 어째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너조차도 그 이유를 모르는 듯했다. 너는 아주 친한 친구 몇 명과도 절교했다. 너에게서 이별을 통보받는 그들이 아픈 표정을 지으면 지을수록 너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하얗게 딱딱해져만 갔다. 나는 감히 입을 열지 않았다. “질렸어.” 네가 말했다. 그 한마디가 물고기와 같았다. 수면 위로 폴짝 뛰고는 다시 수면 아래로 첨벙 사라지는. 너는 무엇을 그렇게 감추고 싶었던 걸까. 실은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무엇보다 나는 왜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걸까. 나는 네게 나의 모든 진실과 비밀을 털어놓기만 했다. 차가운 어머니와 어머니를 미워 못하는 나와 나의 수면제. 그렇게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그래서 통나무가 아닌 우리의 크고 단단한 나무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작별인사는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너는 없었다.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만약 내가 너의 진짜 친구였더라면 우리는

 

침대 옆 서랍장 속에서 약통을 찾아 꺼냈다. 요즘엔 통 잠을 자지 못한다. 그렇지만 검고 검은 꿈을 다시 꾸고 싶지는 않다. 한 알을 먹는 날도 있고 두 알을 먹는 날도 있고 때때로 아예 먹지 않고 밤을 새우는 날도 있다. 나만의 규칙과 계획은, 그리고 그것에 따라붙는 수많은 추측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진즉에 깨달았으니 말이다. 오늘은 세 알이 좋겠다. 그리고 세 알을 꺼내려다 한꺼번에 많은 알약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네가 묻는다. 글쎄. 나는 머리를 긁적인다. 꼭 의미가 있어야 하는 건가? 내가 묻는다. 당연하지. 그러면 이렇게 적혀 있지도 않을 거 아냐. 네가 답한다. 있잖아, 이런 거 공부해봤자 써먹을 곳도 없지 않나? 나는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참 많았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런 걸 따지자면 뭘 공부해야 하는 이유 따위 아예 없어져 버려. 그러면 너랑 이렇게 같이 있지도 않겠지. 아니, 아예 만나지도 않았겠네. 그건 싫다.

나는 쏟아진 알약을 그대로 놔둔 채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랐다. 어느 누군가가 우리의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주는 일이 생긴다면 부디사랑이라는 단어만은 절대 쓰지 않기를 말이다.

I left the spilled tablets as they were, laid out on the bed, and closed my eyes. Then I wished. If someone happens to write about our story, may he never use the word ‘love.’

 



자신이 쓰는 모든 글은 다 특별한 법이겠지만 이 글은 특히나 애착이 가는 글입니다. 저에 관한 많은 것이 담겨있어서 말이죠. 올릴까 말까, 몇 번을 고민하다가 올립니다. 두 남자아이의 이야기에 혹시라도 불편한 부분이 있으셨다면 죄송합니다. 마지막 문장을 영문으로 올린 이유는, 이야기 속에도 나왔듯이 <향수>‘love’라는 단어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 설명하면 재미가 없어지려나요). 읽어주셔서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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