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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전쟁 2
게시물ID : freeboard_111820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돌싱
추천 : 0
조회수 : 29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10/21 21:20:52

5떠나보내기

 

17살 때 알고 지냈던 S군을 다시 알고 지내게 되었다. S군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었다. 우리 두 커플은 한 달에 한번 정도 만나서 식사도 같이하고 간단히 맥주도 한잔씩 하며 지냈었다. 좋은 날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는 동생에게 S군에게 안좋은 일이 생겼다며 나에게 확인차 물어본 것이었다. 너무 깜짝 놀라서 S군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학교고 뭐고 다 제끼고 그 친구를 보러 갔다.

일이 생긴 날은 일요일 점심 즈음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S군은 대학교에서 과외를 하고 집에 오려던 길이었고, H형과 함께 담배를 한대 태우며 30분정도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경찰이 추정한 시각은.. 그들이 우연히 만나 담배에 불을 붙였을 때 즈음이었다. 재수씨는 임신우울증이었고 부모님과의 마찰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한다. 그 일이 벌어진 이후 한우리교회에 다니는 그녀의 부모님과 지인들은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 냈다. S군이 바람을 폈고 가정폭력이 있었으며 때려죽였다는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내가 그 소문을 들었던 날은 재수씨의 장례식에 다녀온 날이었다. 이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오클랜드 시티의 한 술집 J사장이었다. 나보고 그런 새끼랑은 친구하지 말라고 부산 사투리로 짖어댔다. 쓰레기새끼.. 알지도 못하면서 개처럼 짖고 다니는 그 인간이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듣자마자 형이 뭘 아는데 그렇게 얘기하냐며 따졌다. 몇 대 맞을뻔했지만 다행히 술을 안먹어서 그런지 날 때리진 않았다. 한우리 교회에서 시작한 헛소문은 없어지지 않고 점점 나빠져만 갔다. 하지만 나는 S군과 알고 지낸 기간과 함께 식사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절대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런 소문을 들으면 오히려 내가 성질을 내며 막으려 노력했었다.

그 다음날엔 입관식이 있었다. 모두들 삽으로 묻을 때 S군은 무릎을 꿇고 찬 바닥에 앉아서 맨손으로 조금씩 흙을 넣어주었다. 그 모습에 나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S군의 아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보였다. 아이가.. 너무 평온해 보였다

그 다음날엔 S군이 브라운스 베이에 있는 삼촌댁에 살림살이를 다 옮겨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학교도 안가고 이사를 도와주었다. 그 다음날엔 재수씨의 부모님과 아이 양육문제와 장례비용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 하러 알바니에 가야한다고 했다. 물론 같이 가고 나는 차에서 두어 시간 정도를 기다렸고 다행히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재수씨의 부모님께선 아이를 달라고 하셨지만 절대 안된다며 아이를 데려왔다고 했다.

그 다음날엔 잡다한 일들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다음날엔 마지막 송별회를 하고 일요일 아침비행기로 아이와 함께 한국에 가겠다고 하였다. 일은 이때 터졌다. 1차 때 S군의 아버님께서 계셨고, 2차때는 일찍 집에 가셨다. 2차는 알바니의 A 노래방에서 간단히 하기로 하였지만 초상집이다보니 분위기가 좋진 않았다. S군이 마이크를 잡으며 이 노래는 우리 와이프가 좋아하던 노래라며.. 노래를 하였는데 그 방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울기 시작했다. 나 또한 친구녀석이 불쌍해서.. 재수씨가 원망스러워서 눈물이 났다. 아이는 어떻하라고… S군은 어떻하라고.. 그렇게 매정하게 가버리나

이 때 A 노래방의 직원이 들어오더니 우리에게 좀 조용히 놀면 안되겠냐며 따지곤 나가버렸다. 처음엔 참았다. 다른 노래를 부르다가 또 다시 다 같이 울고 H형은 자신이 담배피자고 얘기만 안했어도 구할 수 있었다며 자책을 했다. 홈스테이하던 동생녀석도 울고그녀도 그 자리에 있었다.

A 노래방의 사장이 다시 문을 박차고 들어오더니 어린노무 새키들이 시끄럽다며 조용히 하라고 말한 후 문을 쾅 닫아 버렸다. 후회, 미련, 미안함, 자책감, 안타까움 등의 감정으로 꽉 차있던 그 곳이 분노와 화로 바뀌는데엔 몇초 걸리지 않았다. 모두 뛰쳐나가 직원들과 싸움을 하였다. 나는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 기억이 없다. 정신을 차려보니 경찰서였고 어떻게 된일인지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직원 중 한 명이 경찰에 신고를 하였고, 모두들 건물 밖으로 나가있을 때 나만 건물 안에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경찰에게 했던 말은.. I did all. I did all… 이였다고 한다. 다음날 S군이 아들과 함께 한국에 가는 것을 취한 상태에서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모든 죄를 뒤집어 썼다.

그 친구는 한국에 가버렸다. 몇 일 후 S군과 통화하며 물었더니 A 노래방 사장이 재수씨 니가 때려죽였다며?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화가 많이 났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중요치 않다. 이미 모든 죄는 내가 다 뒤집어 썼고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보였다. 모든 술자리에 함께 했던 그녀의 증언이 정말 중요하였다.

 

6자살시도

 

친구가 가버린 후 나는 패닉에 빠졌고 최대 징역 5년을 구형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하루 이틀정도 넋이 나간 채로 멍하니 있었고, 그녀의 도움으로 정신을 차리고 변호사를 찾아 다니기 시작하였다. 몇 군데 돌아다녔는데 변호사비가 최소 NZD30,000 정도라고 하였다. 아르바이트라도 시작하려 하였으나 아르바이트로 변호사비용을 만들기가 너무나도 힘들어보였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가 너무나도 고마웠고 미안했다.

그 전까지 술을 마시고 실수를 한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과 그녀에게 느꼈던 미안함과 고마움, S군에게 느끼는 서운함과 배신감, 경제적인 문제, 학교 공부, 진로, 비자문제 등등 너무나도 많은 일들과 감정들이 나를 점점 힘들게 만들었다. 물론 이 감정들은 내 스스로 만들었었다. 내가 만약 조금만 강했더라면 잘 이겨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S군에게 연락하여 변호사비를 조금만 도와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자신도 힘들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 일이 지난 후 난 매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괴로운 생각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다른 친구녀석들과 아무일 없는 것처럼 술을 한잔 하였고, 친구가 장난으로 헤드락을 걸었는데 내가 기절을 하게 되었다. 정신을 차린 후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죽어버리면 좀 편하겠구나 싶었다. 한 순간의 실수로 17바늘을 꿰매야만 했다. 평생 지울 수 없는 흉터뭐 내 주변에도 자살시도 여럿 했더라고? ㅋㅋㅋㅋ 나만 그런거 아니니까 괜찮아ㅎㅎ 얼마전에 병원 여러곳 돌아다녔는데 이 흉터는 절대 지울 수 없다고 하더라….. ㅎㅎ

그 날 이후 부모님도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오라고 하셨다. 하지만 참고 공부하겠다고 말씀드렸고, 변호사 비용에 대한 부담감도 덜었다.

이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비자문제도 해결되었고 거의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갔다. 간간히 술에 취해 실수 했던 일들을 제외하면 모든 일이 좋았다. 오클랜드 대학교에 입학도 하였고, 친구도 많이 만들고 외로움을 조금 덜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도움으로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이 일 이후 절대 남을 위해 희생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큰 돈 들여서 좋은 것 배운 것 같다. 친구야 미안해 하지마니 잘못 하나도 없다. 다 내가 선택했던 일인데 뭐.. 이미 오래된 일이라.. 난 잊었다.

이 코트 진행 기간동안.. 그녀와 참 많이 다퉜다. 그녀의 집착과 구속이 나를 너무 힘들게 만들었고, 나보다 강한 성격에 항상 눌려서 살았다.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수 백번 하였지만 코트때문에 참고 참고 또 참았다. 어쩔 수 없었다. 헤어지곤 싶었지만 그녀의 증언이 정말 필요했다. 그녀가 없었다면 난 유죄판결을 받았을테고 한국으로 돌아왔어야만 했다. 여러 번 싸울 때 마다 내가 질 수 밖에 없었고, 이기려 해도 항상 졌다. 그리고 그녀의 술버릇도 점점 심해져갔다. 이 코트만 아니었으면 진작 헤어졌을 텐데많이 아쉬움이 남는다

 

7– Unexpected

 

우선 그녀의 가족 환경을 좀 이야기 해야 할 것 같다. 그 분께선 능력자이시다. 지금 같이 살고 계신 아주머니는 7번째 와이프라고 그녀가 얘기해주었다. 그분께서 처음에 이혼하신 이유는 폭행 및 폭언이었다고 들었다. 그 분께서 친어머니의 친척에게 돈을 빌려주셨는데 약속 기간이 지난 후에도 돈을 받지 못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돈 갚으라고 어머님께 심한 욕설과 폭언 등으로 상습 가정폭력을 행하셨다. 결국 친어머니께서는 참다 참다 못하고 교회에서 만나신 분과 함께 중국으로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가셨다고 했다. 몇 번 맞은 적도 있다고 들었다. 그 이후로 그분께선 교회를 안 좋아하신다. 어머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그분을 사랑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억지로 살 바엔 그렇게 도망쳐 나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정말 어머님께서 너무 행복하게 사시는 것 같다.

그 이후 다른 여자를 집에 데려와서 3개월 혹은 6개월씩 데려다가 살았고, 다툼이 있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구타와 욕설을 하고 물리적으로 집 밖으로 쫓아냈다고 한다. 그런 여자들은 아이들 셋과 항상 문제가 발생하곤 했고,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고 따먹히기만 하고 쫓겨 났다고 한다. 어떤 여자는 이삿짐 차를 불러와서 가구들을 죄다 쓸어갔다고 했다. ㅋㅋㅋㅋ 그분 아직 뉴질랜드 사시던데 ㅋㅋㅋㅋ 세상 참 좁지요~ 아 이 얘기는 그녀에게 직접 전해들은 것이다. 거짓은 1%도 포함되어있지 않다.

그리고 내가 그녀와 처음 사귀기로 했을 때 현재의 7번째 아줌마가 그분과 함께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아이들과의 마찰이 심했다. 이 아줌마는 아들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T군이라 부르겠다. 나중에 T군 얘기가 좀 나올 거다. 여튼 그분께서는 아이들과 7번째 아줌마가 사이가 안 좋아지자 결국 참지 못하시고 로토루아로 이사를 가버리셨다. 사업 겸 도피였다. 애들 모아놓고 이년저년ㅆ년 별별 욕설을 다 하면서 너희들 때문에 자신이 살고 싶은 데로 못살아서 너무 화가 났고, 로토루아로 이사를 가겠다고 선언하셨덴다. 알바니 집은 렌트를 주고, 아이들에겐 H47 아파트에 집을 얻어주었다. 이런 좆 같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그녀가 조금은 불쌍해 보였다. 엄마에게 버림받고, 시간이 지나 아빠에게도 버림받았다. 뭐 버림이라기보단 7번째 아줌마 > 아이들 이런 거였겠지.

20105월초에 그녀와 헤어지려 마음먹었었다. 진지하게 생각해봐도 이런 연애는 절대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결국 술을 좀 마시고 헤어지자고 말했었다. 큰 용기 내어 말했었다. 하지만 다음날 그녀는 기억을 하지 못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생일이었고, 그녀가 아는 동생에게 큰 실수를 하는 것을 목격하고 도저히 이런 여자랑 사귈 수 없다고 판단하여 헤어지자고 말하였다. 하지만 뭐 결국 내가 또 나쁜 놈이 되어서 미안하다고 하고 걍 만나기로 하였다. 절대 결혼은 하지말아야지 하고 다짐을 수백번을 했었다.

6월엔 final exam이 있었고 이 시험이 끝나면 진심으로 헤어지려고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시험보기 3일전에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고뭐 고민 없이 낳자고 하였다…… 물론 exam 2fail했다. ㅡㅡ….

헤어지려 마음먹을 때 마다 무슨 일이 생겨서 헤어지지 못했고, 어쩌다보니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그냥 하느님이건 부처님이건 우리가 헤어지지 못하게 막는 것 같이 느껴졌다. 부모님께 약간의 버림은 받은 그녀와 동생들이 안쓰러웠다. 또한 T군의 존재가 그들의 상속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여 7번째 아주머니에게 더욱 더 못되게 굴었었다. 원래는 T군이 다시 뉴질랜드에 돌아와서 공부를 하네 일을 하네 마네 얘기가 나왔었는데 그녀가 지랄해서 막았다나 뭐라나.. ㅋㅋㅋ 여튼 돈에 대해선 독한년이여

 

8상견례

 

양가 부모님께 아이를 낳겠다는 허락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엔 허락이라는게 무의미했다. 그냥 일방적인 통보라고 생각했다. 통보를 하고 어떤 식으로 나오던 키울 생각이었다. 이 때는 나와 그녀는 같은 집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부모님께서 한 달에 NZD3500씩 보내주셔서 부족하진 않았지만 1년 정도 그녀와 동거생활을 하다 보니 절대 풍족하게 지내진 못하였다. 임신 3개월이었나결혼 일로 심각하게 싸우다가 서로 지우네 마네 하면서 싸웠다. 근데 무슨 일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안난다.. 아 이거 쓰고싶은데기억이 안나.. 진심 대판 싸웠는데

임신 3~4개월 때 그분께서 로토루아로 잠깐 내려오라고 말씀하셨다. 집에 도착했을 때, 거실 테이블엔 통장 5개가 올려져 있었다. 무엇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같이 둘러 앉았을 때 그분이 이 통장이 뭐일 것 같냐고 물어보셨다. 물론 대답은 모르겠습니다 였다. 그녀와 그녀 동생들의 명의로 된 통장이었고 현금 5억씩 들어있었다. 다른 통장에도 몇 억씩 들어있었다. 이걸 보여주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자네는 이제 우리 집안 식구가 되었으니 졸업하고 나면 돈 버는 법을 알려주겠네” … 솔직히 그땐 그냥 음 얘네 돈 좀 있나보네.. 하고 말았다. 그 돈 탐나지도 않았고 돈 일케 많을 줄은 몰랐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새키.. 돈으로 나 기죽일라고 했던거였다. ㅋㅋㅋㅋ 내가 그깟 종이통장에 기가 죽을거 같았니….. ㅉㅉㅉ사람을 잘못봐도 한참 잘못봤다. 오히려 난 그 분이 더 찌질해 보였다. 얼마나 내세울게 없으면 돈으루 사람을 누르려하나..

시간이 흘려 임신 5~6개월 정도 되었을 때, 한국에 잠시 나가 상견례를 하게 되었다. 한국에 가게 되었을 때 그분께선 그녀 루이비통 가방 2, 내 루이비통 가방 1개를 사주시고, 부모님 선물로 불법포획으로 잡은 삐꾸냐라는 동물로 만든 카페트와 블루라벨 스페셜 에디션을 준비하셨다. 빠꾸냐는 남미에서 절대 죽이면 안 되는 동물이다.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이고 천연기념물? 뭐 그런 동물이다. 암튼내가 결혼생활 4년넘게 하면서 받은 건 가방 하나 끝이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께서는 선물은 준비하지 않으셨고 우리가 묵고 있던 호텔과 그분과 7번째 아주머니께서 지내시는 호텔의 비용을 모두 처리해 주셨다. 하루 이틀 치도 아니고 2주정도 지냈는데 이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분께선 이 걸 가지고 나중에 툴툴 대더라…. 선물도 준비 안 했다고시발.. 당신 묵었던 방 하루에 30만원이 넘었고 이거 15일 치면 450만원이고 우리방도 15만원이 넘는 방 이었어. 이것도 15만원인데 그럼 225만원이고 두개 합하면 최소 675만원이야.. 거기에 상견례 할 때 모든 식사비용 200만원정도 우리 부모님이 내셨다며? 그럼 거의 천만원 쓰신건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고 나중에 툴툴 거릴 수 있는건가요대우받고 싶어 환장한 새끼

한국 도착하고 몇 일 후에 상견례를 하게 되었다. 혼전 동거로 인한 결혼이라 그런지.. 약간의 어색한 분위기로 시작을 하였지만 양가 부모님들께선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가셨다. 1차로 호텔에서 식사를 하였고, 나와 그녀는 우리가 묵고 있던 호텔로 먼저 돌아가게 되었다.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부모님들께서는 국악바에 가셔서 간단히 술을 한잔 하신다고 하였는데 그분께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말씀하셨다. “내 방으루와하고 그냥 끊어버렸다? 부모님들께서 무슨 마찰이 있으셨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분의 호텔 방에 들어갔을 땐 심각하게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생활비를 서로 부담하자고 말씀하셨덴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NZD4000을 보낼 테니 그쪽 부모도 NZD2000을 부담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유는 나도 학생이고 이 여자도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의 이 부탁이 너무 했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암튼 우리 부모님의 어처구니없는 요구가 너무나도 마음에 안드셨나보다. 호텔 방에 들어가자마자 ㅅㅂ새끼들아 니네가 얼마나 호화스럽게 살고싶은데 한 달에 그 많은 돈이 필요하냐?” “너 채XX 쌍년아 내가 널 그렇게 키웠어?” 라며 욕설을 하셨다. 그녀는 맨바닥에 편하게 아빠다리를 하고 앉아있었다. 그러나 그분께선 무릎 꿇고 똑바로 앉으라며 임산부를 막대하셨다. 나에게도 ㅅㅂ놈 미친놈 등등 1시간동안 폭언이 이어졌다. 임산부 앞에서 담배 반 갑은 태우셨다. 이 때 정말 느꼈다. 이사람 정상이 아니구나똑 같은 이야기 10번을 반복하시더니 나가랜다. 무슨 얘기를 해도 들어먹질 않는 귀머거리새끼가 빡쳤었나보다. 한달에 2000불씩 내는 게 그렇게 아까웠나봐결론적으론 우리 부모님께서 매달 NZD6000씩 지원해 주시기로 하셨다. 그분은 안한댄다.. 죽어도 자기딸 생활비는 못주겠단다..

다른 내용의 욕설과 폭언이 이어졌지만.. 중요하지 않으므로 패스하겠다.

최악의 장인어른. 뉴질랜드에서도 간간히 그 분 차에 탈 때가 있었다. 어김없이 피는 담배임산부인 딸이 뒷자석에 타고있던 말던 담배는 죽어도 펴야겠단다. 내가 담배 태우지말라고 몇 번을 말했었는데 쌩까셨다. 나중에 지후가 태어난 이후에도 지후 앞에서 담배피는건 당연한 거고.. 술처먹고 욕설하거나 담배피면서 애한테 뽀뽀하는 몰상식한 행동을 하는 분이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그녀와 아이들.. 절대 정상일수가 없다…. 어떻게 보면 이해한다.. 애비가 저따위니 배운게 그따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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