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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전쟁 3
게시물ID : freeboard_11182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돌싱
추천 : 0
조회수 : 43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10/21 21:21:19

9내 아들 김지후

 

중간 중간에 분명 좋았던 기억이 있었을 법 한데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즐거웠던 시간들이 진심으로 즐거웠었는지가 의심될 만큼 좋지가 안았던 것 같다분명 싸우기도 했을 것이고 많이 사랑도 했을 것 같은데 아무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임신기간은 그녀의 대학교 마지막 학기였다.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1fail 하여서 마지막 학기엔 5개의 과목을 듣고 있었다. 참 대단한 여자다. 만삭의 몸으로 학교까지 걸어다니고 공부하고 시험보고 모든 과목을 pass하고 졸업하였다. 난 대학교 2학년이었다. 졸업하려면 한참 남았다ㅎ ㅏ내가 분명 그녀 배 오일 마사지도 해줬고 발에 동상이 걸려서 매일 밤마다 따뜻한 물에 오렌지 껍질을 넣어 발도 싰겨 주고 과일도 깎아주고, 새벽 몇 시가 되었던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은 말하자마자 사다 주곤 하였다. 뭐 시험공부 핑계 대고 밖에 나가서 pc방간적도 몇 번 있긴 한데뭐 도덕적으로 큰 문제는 없었으므로 패스! 이 땐 DOTA에 빠져서 답이 없었다. 그렇다고 뭐 매일 가서 밤을 새거나 그녀에게 소홀히 한적은 없었다. 그냥 일주일에 몇 번 몰래 갔지. 그러다가 전화 안받았다고 pc방까지 쫓아와서 내 뒷덜미 잡아 끌고 나간 적은 있다진심 개 챙피해.. 아니 남편 pc방좀 가겠다는뎈ㅋㅋㅋㅋㅋ 일주일에 한번 갈까말까인데 ㅋㅋㅋ 너무하자낰ㅋㅋㅋㅋ 아~ 그리고 임신한 이후로 술 끊었었다. 임신 4개월 정도부터 아이 100일 정도까지 술 끊었었다! 그래서 아무 기억이 없구나 ㅋㅋㅋ 사고친적이 없으니 말이다.

아 그리고 그녀는 일반 병원이 아닌 개인 병원에서 care를 받고 출산을 하고 싶어했다. 임신초기부터 산후 6개월까지 관리해주는데 NZD5000~7000 정도 했었던것같은데 기억이 안난다.. 얼마였더라.. 아무튼 이때는 이 액수가 너무나도 커보였다. 부모님께 돈 달라고 하기도 좀 죄송스럽고 돈은 없고.. 해서 친어머님의 남편분께서 운영하시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주급도 넉넉히 챙겨주셨고 너무나도 잘해주셨다. 이 시기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감사하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 봉투를 받고 열어보지도 않고 그녀에게 전달하였다. 미안하다. 내가 이것밖에 못벌어.. 미안해.. 라고 얘기하였지만 그녀는 고마워 라는 말 없었다. 그리고 나중에 부족한 1000불정도는 친어머님께서 해주셨던걸로 기억한다. 나머지는 내가 다 벌어다가 준걸로 기억한다. 참고로 나 대학생이었다.

시간이 흘러 2011128일이 되었다. 새벽에 같이 미드 보고 있는데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했다. 예정일보다 10일정도 빠른 진통이었다. 친어머님께서는 출산하실 때 진통이 많이 짧은 편이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도 처음 가진통이 온 이후 얼마 되지 안아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카시트를 설치하고 아이 용품과 몇 일 입원할 때 입을 옷들을 챙겨서 부랴부랴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첫 가진통이 온 시각은 대략 새벽 2시 경이었고, 병원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7시 경이었다. 분만실로 이동을 하고 여기저기에 전화를 돌렸다. 우리 부모님, 그분, 친어머님, 처제에게 전화를 돌렸다. 전화할데도 많다. 그녀의 부모가 네분이어서 다 전화해야했다. 뭐 나쁘진 않았다. 남들보다 사랑을 2배 더 받는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간호사는 자궁이 충분히 벌어지지 않았다며 마냥 누워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자궁이 완전 벌어져서 힘을 줘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뭐 오후가 되야 아이가 나올꺼라고 했었는데 30분있으니까 힘주랜다. 돌팔이 간호사.. 암튼 조금 후에 처제와 처남이 왔고 친어머님도 곧 오셨다. 그분은 호주에 계셨고 전화 받자마자 비행기 티켓사고 오후 5시경에 병원에 도착하셨던 것 같다. 아 이거 좀 웃긴얘기긴한데 그녀가 분만실에서 막 아파하고 무통주사 맞고 힘들어 하고있을 때 처남이 갑자기 아 나 바람좀 쒜고 올께 라고 걸어 나가더니 기절해버렸다. ㅋㅋㅋㅋ 기절한 채로 걷다가 앞에 있는 벽에 부딛혀서 앞니가 깨졌다. 애가 눕더니 못일어나 ㅋㅋㅋㅋ 아니 나는 와이프 애낳고 있어서 뭐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있는데 얘는 왜 와서 혼자 기절하고 자빠지냐 ㅋㅋㅋ 결국 응급실에 실려갔다. ㅋㅋㅋㅋ 그리고 처제는 전날 밤에 과식을 해서 체해있었다. 아니 몸이 안좋으면 오질말지 왜 둘다 와서 응급실 실려가냐고 ㅋㅋㅋㅋ 암튼 ㅋㅋㅋ 애 낳다가 애들 응급실 실려보냈다 ㅋㅋㅋ 아 개 웃곀ㅋㅋㅋㅋㅋㅋㅋㅋ

한 시간 정도 고생을 하다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수술실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힘 조금만 더 줘보다가 안되면 제왕절개를 해야 한다고 했다. 아니 그럼 처음부터 수술해줬으면 이렇게 고생도 안 했을 텐데.. 참 야속했다. 결국 수술실에 가게 되니 나도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힘들어 하고 있을 때 난 계속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고 결국 울음이 터져버렸다. 3번씩 3세트 힘줘보고 안되면 수술하겠다고 했다. 그녀가 아파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안쓰러웠고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답답했다. 손을 붙잡고 엉엉 울고 있는데 응애 소리가 들렸다. 그 때 정말 엉엉 울었던 것 같다. 기특하고 고맙고 미안하고 빨리 나오지 왜 안나오니.. 원망스럽기도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이름은 김지후. 체중은 2.89kg 남자아이였고 아픈 곳 없이 잘 태어났다. 내가 울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다시는 애 낳자고 안 할게 미안해 ㅠㅠㅠㅠㅠㅠㅠ 엉엉엉엉.. 나를 많이 닮은 아이가 너무나도 예뻤다. 너무 사랑스러웠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10평범한 결혼 생활

 

지후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바니의 주택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직까지 잊지 못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공간이다. 7 Gold street… 지금도 가끔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녀가 그리워서 돌아가고 싶은건 절대 아니다. 그냥 아무 별 일없이 공부하고 일하고 아이 키우면서 지냈었다. 일부러 욕심을 내서 조금 큰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랜트비는 매주 650불 정도 였고, 5개 화장실 3개 더블 게라지에 거실이 3개나 있는 큰 집이었다. 오후 5시쯤이 되면 동네 오리 4마리가 우리 집 정원으로 날아와 빵을 달라고 꽥꽥 울어댔다. 그래서 매일매일 집에 올 때면 슈퍼에 들려서 식빵을 샀다. 지후는 오리에게 모이 주는 것을 참 좋아했다. 나도 그랬고.. 그녀도 좋아했다. 주말엔 집에서 세차도 하고 가까운 바다에 놀러 가거나 같이 놀이터에 가서 놀기도 하였다. 일주일에 세네번은 지후의 또래 친구들도 같이 만나서 놀았었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4주마다 5000불씩 보내주셨고, 그분께 처남의 홈스테이 + 용돈 + 기타 잡비 해서 매달 3000불씩 받았다. 그리고 플렛 3명을 두어 4주마다 1500불 가량 수입이 있었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였었고, 주말엔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간간히 중고 가구를 급매에 사서 비싼 가격으로 판매를 하기도 하였다. 한달 수입은 대략 12000불 정도가 되었었다. 세 식구가 매달 12000불씩 다 쓰기엔 다소 많은 금액이었다. 펑펑 쓰고도 매달 5천불가량을 세이브 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돈은 쌓여만 갔고, 2~3만불이 될 때마다 우리 세식구는 해외여행을 다녔다. 뉴칼레도니아, 시드니, 골드코스트, 남섬 등등 여러 곳을 여행다녔다. 내가 학생이기에 가능했던 생활이었다.

그녀가 가지고 싶어했던 명품 가방들도 많이 구매했고, 원하는 유모차는 다 사주었다. 그녀가 가지고 싶어하던 모든 물건들은 거의 다 사주었었다. 지후 장난감도 수백불짜리도 사줬고, 지후 옷도 예쁘면 가격표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사버렸었다. 물론 나는 그닥 원하는 물건들은 없었다. 일주일 용돈이 담뱃값포함 100불이었으니.. 뭐 말 다했지나머지는 그녀가 하고 싶은 데로 하게 해주었다. 이래서 내가 조금씩 삥땅을 치기 시작했다 ㅋㅋㅋㅋ 뭐 돈 좀 꼬불쳐서 나쁜 짓 했던 것은 아니고 몰래 낚시 장비를 구매하거나 pc방에 간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현금을 좀 꼬불쳤었다. ㅋㅋㅋ 근데 이건 누구나 하는 행동 아닌가? ㅋㅋㅋ 비자금은 항상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ㅋㅋ

시험기간에는 죽어라고 공부를 하였고, 그녀는 도시락도 싸주고 내조도 잘 해주었다. 매일 버스정류장까지 픽업을 해주었고, 처남이 메시대학교에 다니는 것도 픽업해주고 아이도 돌보고 지극히 평범하고 행복한 날들이었다. 그녀의 취미는 애기 엄마들이랑 여기저기 놀러 다니기와 제빵이었다. 간간히 술도 마시러 나갔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나는 술을 먹고 싶으면 친구나 동생들을 집에 초대하여 같이 놀았었다. ACG에서 알게 되어 친하게 지냈던 많은 동생들이 왔다 갔으며 그녀도 내 동생들을 좋아하고 같이 술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하였다. 간간히 10명씩 불러서 포커도 치고 술도 마시며 지냈다.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던 2년 이었다. .. 몇 몇 헤프닝이 있었지만 그냥.. 참고 이해하고 넘어갔던 적이 있다.

 

11이 집안의 가정교육과 손버릇

 

처음에 소개했던 우리 처남은 문제가 좀 많은 아이이다. 하지만 심성이 착하고 마음이 여린 녀석이다. 3살 때 뉴질랜드에 오게 되었고 8~9살 즈음에 부모님께서 이혼을 하셨다. 어머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고 그분께선 여자놀이와 사업을 하시느라 바쁘셔서 아이들을 챙기지 못하셨다. 아이들은 가정교육은 절대 받지 못하였고, 어렸을 때부터 어머님의 부재로 인해 미안한 마음이 커서 어린 막내에게 손찌검 한번 하지 않으셨다고 하셨다. 큰누나는 6살 위, 작은 누나는 3살 위였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아무리 까불고 다녀도 이 녀석을 혼내는 형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밖에선 그닥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냥 누나 믿고 까부는 애 정도…?

간간히 친어머니께 전화해서 용돈 달라고 개지랄하고 욕 한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 때마다 어머님께서 굉장히 속상해하시며 나와 그녀에게 털어 놓으셨다. 내가 여러 번 얘기했었다. 제발 어머님께 깝치지말라고.. 너 그러다 형한테 쳐맞을거라고.. 뭐 웃으면서 얘기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몇 년 동안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급기야는 뉴질랜드에 계시면서 중국이나 한국에 계신다고 거짓말을 하여 연락을 끊어버리신 적도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도 정말 답답했고 어머님께 너무나도 죄송스러웠다.

7 Gold street에서 지내던 평범한 어느 날이었다. 내 컴퓨터 방 책장엔 저금통이 있었고, 이사 온 이후로 항상 저금을 하였다. 내 기억으론 2~300불 정도 동전과 지폐로 들어있었다. 내가 컴퓨터를 하고 있는데 그녀가 방에 들어왔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가 돈 많이 모았냐며 저금통을 흔들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뭐야 이거밖에 못모앗어? 라고 물어보았다. 내 기억으론 2~300불정도 넣었었다. 처음에 돈 많이 모아야지! 라고 생각하며 50불짜리 지폐를 넣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저금통의 동전소리가 너무나도 초라했다. 저금통 배를 갈라 확인해보았더니.. 10센트짜리만 남아있었다.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났었다. 그녀는 정말 화가 많이 나서 처남을 혼냈지만 처남은 아 ㅅㅂ 나가면될거 아냐 라고 소리친후 가방을 싸서 집을 나가버렸다. 이 상황이 정말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나는 그냥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였고 충분히 이해한다고 너는 잘못한 것 없다고 하였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가 처남녀석 잘 가르쳐보자고 이야기 하였고, 내가 전화해서 싫은 소리 안 할 테니 집에 들어오라고 하였다.

이 시기에 몇 번 쌈질도 하고 어디가서 쳐맞고 오기도하고 친구들 불러서 사람 때리기도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마다 형이 뒤 바줄 테니 까부는 애들있으면 다 패고 다니라고 했었다. 뭐 예전에 누군가 둘째 누나 욕을 하고 다닌 애가 있었는데 처남보다는 형이었다. 그래서 보자마자 뭐 때렸었는데 나중엔 그 놈이 친구를 데려와서 둘이서 때렸다고 했다. 그 이후엔 처남이 길가다가 그 놈이랑 마주쳐서 친구들 다 불러서 팼다고 했다. 그 때 내 왼팔 이었던 MJ군이 지나가는 길에 이 장면을 목격하고 해결해 준 적이 있었다. 뭐 내 일도 아니었고 좋은 일도 아니어서 대충 쓰고 넘어가겠다.

 

12중독

 

그러던 어느 날 그분께서 목이 아프시다고 하셨다. 로토루아 병원에 모시고 갔었는데 의사가 조직 검사를 좀 해봐야 할 것 같다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안아 연락이 왔고, 림프암 1기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모든 사업을 직원들에게 맡겨두고 한국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녀는 엄청나게 울었다. 인터넷으로도 많이 알아보았는데 1기는 치료만 잘 받으면 90%이상 완치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달래주고 까불지 않고 조용히 지냈었다. 몇 주 후, 그녀는 한국에 가서 7번째 아주머니와 함께 병수발을 들겠다고 한국에 갔다. 이 때 처제는 대학졸업하고 한국에서 자리 잡아보겠다고 간 이후였고, 작은 원룸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녀는 8~10주정도 한국에서 머물겠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아프실 때 7번째 아주머니가 너무 잘 할까 바 걱정이 되어서 가겠다는 것이었다. 7번째 아주머니에게 마음을 홀랑 뺏겨버리면 자신들의 상속될 유산이 7번째 아주머니 아들 T군에게 나누어질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절대 그분이 걱정돼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까 바 간 것이 아니었다. ㅋㅋㅋㅋ 이건 나만 알고 있던 비밀이다. 돈 때문에 지 아빠 병간호 하러 갔던 것이지 걱정이 되어서 간 것은 절대 아니다. 그분께 이 사실을 알려드렸어야 하는데 ㅋㅋ 아쉽다. ㅋㅋㅋ 기회가 되면 꼭 알려드려야지. 유산 주지말라고~ ㅋㅋㅋㅋ 근데 이미 한국에 애들 3명 이름으로 5억씩 들어가있다. 이거 상속세 내야 되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조사하면 다 나와~ 외국인이라 안내도 되나…?

그녀와 아들이 한국에 간 이후였다. 처남의 눈빛이 이상했었다. 눈은 풀려있고 빨갰다. 행동은 느렸고, 집안에 일주일치 음식을 사두면 하루이틀이면 처남이 혼자 다 먹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땐 전혀 눈치 못 챘었다. 그냥 처남 식성이 좋아져서 많이 먹나보다..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알게 되었다. 처남은 마약 중독자이다. 15살때부터 피기 시작한 대마초를 아직 까지 못 끊고 있다.

어느 날 아는 동생녀석이 나에게 놀자며 말아서 피는 담배 같은거를 챙겨왔다. 이게 뭔가 했더니 대마초였다. 호기심에 해보자고 하였고, 실수로 한 모금 이빠이 빨았는데 좆됐었다. 불이 꺼져서 라이타로 불을 붙인 상태로 훅 빨았는데 솔리드 반까치를 빨아버렸다. 옆에 있던 동생들은 미친듯이 웃어댔닼ㅋㅋㅋㅋ 형 좆됐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 음진심 좆됐었다. 이날 맥도날드에가서 세트 6개 먹었다. 이 때 처남이 집에 들어오게 되었고 자신도 떨 좀 핀다고 같이 피자고 하였다. 그날 처남이 마리화나 중독자인 것을 알게 되었다.

몇 일이 지나고 다시 한번 유혹의 손길이 다가왔다. 처남이 친구를 데려왔고 가방에서 작은 봉지와 유리병을 꺼내었다. 같이 피자고 해서 같이 폈다. 난 두번 빨고 시체가 되었다. 좋은 것도 모르겠고 샤워를 하는데 제대로 서있을 수가 없었다. 자꾸 바닥이 날 땡겨ㅎ ㅏ.. 눈을 감으면 중력이 10G는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진심 미친듯이 토를 하기 시작했고 대략 3시간동안 변기를 잡고 있었다. 침대에 누웠더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약이 깰 때 까지 실실 쪼개고 있었다. 나는 이 느낌이 너무나도 싫었다. 뭐가 좋은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두 번 대마초를 펴보고 이후로 피지 않았다.

문제는 처남이 끊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돌아온 후 문제의 심각성은 커져갔다. 처남의 방과 생후 13개월인 지후의 놀이 공간은 문 하나를 두고 붙어 있었다. 처남은 자신의 방안에서 대마초를 피워 댔고, 방 밖에서는 대마초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그리고 아래층 거실 중에 한 개는 지후의 ball pool과 미끄럼틀이 있었는데 ball pool안에서 대마를 피워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플렛하던 친구들이 몇 번이나 보고 밖에서 피라고 경고를 주었다고 했다. 이 잔소리가 싫었는지 이제는 자기 방안에서 피워댔다. 지후가 노는 공간 바로 앞인데 대마초를 피는 모습은 그의 아버지인 그분께서 하시는 행동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대마초를 피운 직후에 지후에게 뽀뽀하는 모습도 본적이 있었다정말 심각했다.

이런 심각성을 알게 된 이후 혼자만 알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한국에서 돌아온 이후에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하였다. 내가 먼저 대마를 피우고 있었고 처남은 중독이 너무 심하게 되어있더라.. 지 방에서도 피고 거실에서도 대마를 피워대고 있다 라고 말했다. 사실 내 저금통에서 돈을 훔친 것도 마약 살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었고, 친어머니께 욕설하며 돈 달라고 했던 것도 마약 살 돈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었다. 더 이상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방에서 피운걸 3번 정도 걸렸을 때 내가 경고하였다. 한번만 더 집안에서 피면 혼내겠다고 하였다. 그녀도 내가 처남을 때리는 것을 허락하였고, 친어머니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너무나도 속상해 하셨고 제발 패서라도 정신차리게 해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다시 방안에서 대마초를 핀 것을 알게 되었다. 이상안 냄새가 나서 처남 방문을 열어보니 창문 앞에서 대마를 피고 있었다. 처남 멱살을 잡고 나와 집 밖으로 끌고 나갔다. 내가 물어보았다. 주먹으로 맞을래 몽둥이로 엉덩이 맞을래?? 이랬더니 주먹으로 맞겟다고 하였고 왼손으로 먼저 때릴 테니 이 꽉 깨물으라고 하였다. 카운트까지 해주고 때렸다. 한대는 잘 맞았다. 몇 초 후 이번엔 오른손 주먹으로 때리겠다고 하였는데 이 녀석이 쫄아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잘못맞아서 눈커풀 안쪽이 찢어졌고 안구에 멍이 들게 되었다. 피가 멈추지 않고 붓기가 너무 심해져서 결국 응급실에 데려가서 치료를 해주었다. 다시 집에 돌아온 후 처남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나 미안하게 만들지 말라고.. 약도 내가 발라주고 병원도 데리고 갔다.

몇 일 후 CAD라는 마약중독자들이 가서 법적인 문제없이 무료로 치료할 수 있는 곳에 데려갔다. 같이 상담하고 픽업까지 해주었다. 본격적인 치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하였고처남은.. 그날 이후 한번도 CAD에가서 치료를 받은 적이 없다…. 내가 픽업까지 해주겠다고 했었으나.. 단 한번도 간 적이 없고, 몇 주간은 대마를 피진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피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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