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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전쟁 5
게시물ID : freeboard_11182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돌싱
추천 : 0
조회수 : 39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10/21 21:22:13

17최악의 아내 (상반기)

이렇게 돈을 먹고 튀어버린 그분을 생각하면 그녀가 너무나도 미웠다. 그분과 그녀는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분께서는 우리 부모님이 자기 자식의 분수도 모르고 너무 많은걸 원하셨다며 욕을 하셨고, 우리 부모님께서는 딸 시집 보내는데 꼴랑 7500만원이 아까워서 파토 내고, 가는 길엔 아들 내외가 준 3만불도 먹튀를 한 것이 쪼잔해 보였다. 한 없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결혼 안시킬꺼면 3만불은 주고 가야지 ㅋㅋㅋㅋㅋㅋㅋ 너무 하는거 아니냐 진짜.. ㅋㅋ

암튼 이렇게 됐고그분 뱅기 타기 전날 그분께 말씀드렸다. “우리 부모님께서 제가 일자리를 구하기 전까지 매달 생활비와 양육비를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용돈은 당신이 챙겨주십시오. 생활비 타 쓰는데 그녀를 위한 돈을 따로 달라고 하기가 죄송스럽습니다.” 그랬더니 알았다고 했다. 일단 이렇게 마무리!!

위에 결혼식 파토난 얘기는 정말 정말 간단하게 요약한 내용이다. 이것 외에 크고 작은 다툼이 많았고, 말장난식의 말다툼도 많았다. 여튼 그녀와 나는 사이가 절대 좋아 질 수가 없었다. 이 내용으로 몇 달을 다퉜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한국에서 친구가 없기 때문에 나는 미웠던 그녀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적어도.. 최소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해주고 싶었다. 어차피 얘기 해봐야 끝도 없이 싸움만 일어날 것이고 답도 없었다. 이땐 이혼 생각을 하지도 않았었으니까.. 그냥 결혼은 나중에 우리가 돈 모아서 하기로 결론을 내렸었다. 나는 그녀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거의 매일 지후랑 단 둘이 키즈카페에 가서 아이랑 단 둘이 온 어머니들께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외국에서 살다가 얼마전에 한국에 들어왔어요. 제 와이프가 친구가 없어서 그런데 시간되시면 언제 한번 같이 뵐 수 있을까요?” 라고 말을 걸고 며칠 안에 그녀와 함께 식사도 하고 키즈카페도 가며 그녀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만들어 준 친구가 3. 그리고 다음카페도 알려줘서 친구를 더 쉽게 사귈 수 있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4월부터 한 달간 정말 열심히 공부하였다.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강남에서 토익, 토스, 오픽, 모스자격증 공부를 하였다. 월화수목금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쉬는 시간도 없어서 강의실 옮길 때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 하나 사 먹는 것이 하루 식사의 끝이었다. 주말에는 매경테스트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한달동안 아이랑 놀아줄 시간도 없었다. 오로지 취직을 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하였다. 나는 이 때 그녀에게 부탁하였다. 미안한데.. 아침에 일어나서 나 간단하게 먹을 것 좀 챙겨주면 안되냐고여러 번 부탁하였는데 그녀는 아침마다 못 일어났다. 몇 번은 내가 일어날 때 깨웠는데 알아서 챙겨먹으라며 짜증을 부리곤 다시 자버렸다. 참 야속했다. 물론 나랑 사이가 안좋은건 알지만 이건 너무하는거 아닌가? 나는 다시 잘 해보려고 그녀에게 친구도 만들어주고 해줄수 있는건 다 해주려고 했는데 아침 한번 챙겨준적이 없다.

5~6월에는 시험보고 대기업에 이력서를 넣고 인적성 시험을 보고 면접 준비를 하는 기간이었다. 이 때도 역시나단 한번 아침 식사를 챙겨준적이 없다. 단 한번도 없었다.

결국 대기업 면접에서 다 떨어지고 7월에 볼빅이라는 골프공 제조 회사에 해외영업팀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아침 8시반까지 출근이었고 퇴근은 오후 10시 이후였다. 이 때도 아침 한번 챙겨준 적 없었다. 그리고 3달 정도 다니다가 도저히 못해먹겠다 싶어서 때려쳤다. 지후가 깨있는 모습을 평일엔 하루 있을까 말까였다. 지후랑 놀고 싶어서 때려쳤다. 좀 철이 없었지 ㅋㅋㅋ 후회는 없다. 그리고 연봉 3000으로 계약했는데 한달에 받아봐야 200밖에 안되더라 ㅋㅋㅋㅋㅋㅋ 월급은 90% 그녀에게 주었다. 어디다 썼는지 난 모른다.

 

18최악의 아내 (하반기)

 

몇 월이었더라…? 9~10월 정도였던 것 같다. 건대에서 살고 있던 처제에게 급한 전화가 왔다. 어떤 사람이 오토바이 하이바를 쓰고 자신의 집 초인종을 누르면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무섭다고 울면서 전화가 왔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혼자 살고 있는 처제가 안쓰럽기도 했고 너무 걱정이 되서 부엌칼이랑 몽둥이 하나 챙겨서 처제의 집으로 날아갔다. 늦은 시간이었고 속도를 즐기는 나에겐 멀지 않은 길이었다.

처제 집에 도착했을 때는 그 남자는 없었다. 며칠 동안 우리집에서 지내기로 하고 짐을 조금 싸고 우리집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몇 달간 우리 집에서 생활하였다. 근데 너무 불편했다. 그녀는 나보다 자기 동생과 지후를 항상 먼저 챙겼다. 처제가 집에 들어온 이후로 나는 거의 그림자 수준으로 개무시를 당하며 지냈다. 시발 내집인데.. 이런 대우를 받는 게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단 한번도 처제보고 다시 돌아가라는 말은 하지 안았다. 적어도 공과금은 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ㅋㅋㅋ 그냥 있더라고.. .. 뭐 괜찮아 가족이니까개무시당해도 괜찮아.. 가족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편해지겠지.. 라고 생각하며 그냥 참았다.

그러던 중에 내가 라섹수술을 하게 되었다. 아침 10시 수술이었고 마치고 돌아오니 오전 11시 반 정도 되었던 것 같다. 라섹수술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정말 너무너무 아프다. 눈도 뜰 수 없고 괴롭다. 잠을 잘 수도 없고, 핸드폰이나 tv를 볼 수도 없다. 혼자 수술을 하고 택시를 타고 집에 왔는데 그녀와 처제는 집에 없었다. 그래서 tv를 켜고 거실 쇼파에 누워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 처제가 들어왔고 그녀는 나에게 안방에 들어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눈이 매우 아프고 잠도 잘 수 없고 눈도 못 뜨니까 그냥 쇼파에 누워서 tv를 보겠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처제 불편하니까 안방에 들어가라는 말을 하였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소리인지 정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안방에 들어가서 내가 뭘 할 수 있냐며 따졌지만 나보고 거실에서 사라지라는 소리를 하였다. 너무 화가 났고, 더듬더듬 며칠간 입을 옷을 챙겨 나왔다. 나에게 어디 가냐고 물어보지도 않았고 그 이후에도 돌아오라는 말 조차 없었다. 너무 서럽고 분해서 주먹으로 벽을 쳤는데 손이 뿌러졌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발ㅋㅋㅋㅋㅋㅋ 살살 쳤어야했는데 눈감고 벽을 치다보니 거리감이 없어서 너무 세게 쳤나보다 ㅋㅋㅋㅋㅋ 암튼.. 챙겨 나온짐을 들고 정형외과를 찾아 다녔다. 눈도 못뜨는데.. 그냥 아무나 붙잡고 주변 정형외과가 어딘지 방향만 알려달라고 하였으나아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택시를 타고 아무 정형외과나 가달라고 부탁하여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촬영하고 깁스를 하였다.

이제 부모님댁에 가려고 하는데 젠장 안약을 놓고 나왔다….. 그래서 다시 집에 가서 안약을 챙겨서 나왔다. 역시나 깁스하고 있는 거 보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다. 둘은 식탁에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뻔히 봤으면서 아무말도 없다. 결국 나 눈 붓기 빠지고 통증이 사라질때까지 엄마집에 있었다. 4일정도 엄마집에 있으면서 엄마가 밥 떠먹여주셨다. 너무 분해서 부모님께 처제 때문에 너무 짜증난다고 말씀드렸다. 뭐 결론은 내보내라는 거였는데.. 나는 그런 말 못 한다눈을 제대로 뜰 수 있을 때가 된 후 다시 집에 돌아갔다. 그리곤 한동안 대화를 하지 않았다.

11월 이었다. 난 하반기 대기업 공채에서도 다 탈락하였다. 면접에서 항상 떨어졌다.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있을 시기였다. 부모님께는 매달 200만원씩 받았고 만원도 띵겨먹지 않고 그녀에게 전달하였다. 아이 영어유치원비와 학원비는 매달 170~200만원씩 나왔었는데 어머님께서 전액 지원해주셨다. 내가 쓸 돈은 따로 주셨다. 그렇게 1년정도를 생활하고 있는데 그녀는 단 한번도 우리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한적이 없다. 그녀는 받을 땐 한마디 말없이 받고 써야 할 땐 별 지랄을 해가면서 안 쓴다. 참 좆 같은 년이다. 어느 날 생활비가 다 떨어졌고, 생활비를 받으려면 5일 정도가 남아있었다. 근데 식탁 위에 못 보던 통장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뭐지? 하고 열어봤는데 그녀의 통장이었다. 연초에 그분께 그녀의 용돈을 따로 챙겨달라고 말씀 드렸고 그걸 지켜주신 것이었다. 500만원씩 2번 들어와서 총 1000만원이 입금 되었고, 쓴 내역을 보니 가관이었다. 어디 술집 어디 맥주 집 어디 카페 음식점 옷 가게 등등 지 쓸돈 다 쓰면서 나한테는 돈 없다고 지랄한 것이었다. 보통 낮에 나가서 쳐먹고 놀았나 보다. 간간히 밤에도 나갔던데 아마 처제에게 애 맡겨두고 나가서 아줌마들이랑 놀았나 보다. ㅋㅋㅋㅋ 그렇게 돈 없다고 지랄하더니 지 용돈은 따로 챙겨 받고 쓰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생활비 얼마 안 남았으니 밥 좀 사라고 말했더니 이 돈은 자기 돈이라며 왜 자신이 밥을 사야하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난 몰랐다. 그녀가 니돈 내돈 따져가며 살고 있는 것 몰랐고 나는 월급이나 생활비 받으면 다 줬는데 이런 식으로 얘기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11월 말경 그녀는 뉴질랜드에 돌아가서 시민권을 받아 오겠다고 하였다. 그러려면 최소 6개월 이상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뭐 나쁘진 않았다. 처제랑 아들이랑 같이 가겠다고 하여서 당연히 가라고 하였다. 차라리 그녀가 안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19일방적인 이혼 통보

 

그녀가 아들, 처제와 함께 뉴질랜드에 간지 1주일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아이는 너무나도 보고싶었지만 그녀의 역할 없는 존재감과 이기심, 돼지 같은 몸매가 너무나도 지겨워서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많은 고민 끝에 그녀에게 연락을 하였다. “나중에 돌아올 필요 없을 것 같아. 너의 물건들은 소포로 보내 줄 테니 한국에 오지 마라. 양육을 선택할 권리는 주겠으니 아이를 키울지 말지만 선택해서 연락해라.” 라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였다. 그녀는 갑자기 왜 그러냐며 나에게 물었다. 몰라서 묻나…? 혹시나 그녀가 볼지도 모르니 다시 한번 확실하게 이야기 하겠다.

당신은 한국에서 1년간 단 한번도 아침을 차려줘 본적이 없다. 아침에 뽀뽀를 하고 나올 때도 나에게 심하게 짜증을 냈고, 알람 시간에 맞춰 일어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너의 생활습관은 쳐 누워서tv만 보고 아이는 거의 방치했다. Tv만 틀어주고 당신이 한 것이 뭐가 있는지 다시 한번 묻고 싶다. 또한 우리 부모님께서 한 달에 4~500만원씩 생활비 지원을 해주셨지만 단 한번도 감사하다는 말씀 드린 적이 없었다. 나보다도 너의 동생, 아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었고 나를 남편으로 또는 아이의 아빠로서 대우해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대우 받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최소한 당신의 동생이 우리 집에서 얹혀 살고 있었을 때 나에게 고맙다고 얘기는 못할 망정 나를 개무시하고 그림자 취급했었다. 나는 뭐 처제가 좋아서 같이 사는걸 허락 한 줄 아나본데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과 그분과 친어머니, 처남과 관계를 생각해서 내가 100번 참고 희생한거다. 나는 당신이 니돈 내돈 따져가서 쓰고 살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 실망감이 컸다. 내가 갖고 싶은 거 다 양보하고 큰 사치는 단 한번도 없었다. 있어 바야 낚시용품 정도였다. 하지만 너는 명품 가방을 좋아했고 유모차를 4개나 샀다. 어떤 정신나간 애엄마가 유모차를 4번이나 사는지 한번 데려와바라. 그래도 나는 너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싶었기 때문에 돈 아까워하지 않고 당신이 원한다면 다 해줬다. 나는 뭐 갖고 싶은게 없었는 줄 아니? 내가 참고 사지 않고 다 너와 아들에게 양보했다. 그 때는 그게 행복이라고 믿었다. 당연히 내가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당신이 희생한게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이럴 때는 키위 마인드, 저럴 때는 한국인 마인드였던 당신과 그분은 정말 맞추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다. 또한 받을 때는 고마워하지 않고 다 받아 쳐먹으면서 정작 당신들이 써야 할 때는 아까워하고 어떻게든 덜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이 너무 가식적이라 역겨웠다. 당신이 T군에게 빼앗길까 바 걱정했던 유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정말 가증스러웠다. 7번째 아주머니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매번 미친년이라고 불러대던 당신과 동생들이 불쌍했다. 얼마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았으면 그렇게 싫어할까하는 마음이었다.

우리의 결혼식이 무산되고 몇 달 후 그분께서 한국에 오셨다. 그녀만 불러내셨다. 나에게 아이를 봐달라고 얘기를 한 후 나갔다. 3~4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샤넬 가방을 들고 왔다. 대략 400만원 정도 했던 고가의 가방이다. 나에게 자랑하듯이 얘기하였다. “아빠가 나 결혼했는데 받은거 없다고 아빠가 가방 사줬어라고 얘기하고 페이스북에 올렸다. 나는 받고 싶지도 않았고 이 빌어먹을 노친네는 내 3만불 먹튀해놓고 지 딸년 샤넬 가방 사주는 꼬라지가 정말 싫었다. 나는 그대로 쪼로로 달려가 부모님께 말씀드렸고, 며칠후 부모님께서 1000만원짜리 명품 시계를 사주셨다. 그리곤 나 또한 페이스북에 사진을 찍어 올렸다.

이렇게 사이가 안좋은데 굳이 같이 살 필요가 없다고 느꼈고, 언제 사랑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도 나를 사랑하지 않다고 확실하게 느꼈고, 나 또한 그녀를 언제 사랑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부부관계도 거의 없었고 처제가 집에 들어온 후 혼자 해결하기도 짜증이 났었다. 이렇게 안맞는데 아이 하나 때문에 너랑 나랑 아이랑 셋이 억지로 살고 싶지 않았다.

 

20 - 엄마랑 아빠랑 같이 갈래

 

1~2주 후 그녀가 한국에 왔다. 돌아오자마자 집으로 바로 온 것이 아니고 신당동에 새로 얻은 아파트에서 만났다. 나는 분명 방배동 집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했으나 그녀는 일단 집에 가서 얘기하자고 하였다. 추운 겨울이었고 아들을 추운 곳에서 벌벌 떨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선 내가 능력도 없고 벌어 놓은 게 없으니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너에게 양육에 대한 선택권을 주겠다고 말하였는데 결정했냐고 물어봤다. 그녀는 아이를 데려가고 싶어했지만 그분께서는 지후를 버리고 오라고 명령하셨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아이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며 아이의 양육을 주장하였다. 모든 이야기가 정리 되었다.

며칠 후 그분께서 한국에 오셨다. 나에게 신당동 아파트로 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갔다. 술 한잔 하고 계셨다. 나는 꿀릴게 없으므로 아주 편한 아빠다리로 앉아서 대화를 하였다. 그분께서는 딸의 어떤 모습이 가장 싫으냐고 물으셔서 있는 그대로 다 말씀 드렸다. 돼지 같은 모습이 창피해서 같이 다니기 창피하다는 얘기부터 속궁합도 맞지 않고 밥 한번 제대로 차려 준 적 없고 생활비 받는 거 감사해하지 않고 니돈 내돈 따져가며 살고 있다고 말씀 드렸다. 그 때 그분께서는 그녀를 혼내셨다. 자신은 그런 줄도 몰랐고 교육을 잘못시켰다며 미안하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절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의미 없는 대화가 한창 이어져 갈 때쯤 그분께선 나에게 진지하고 작고 굵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전주에 아는 조폭 형님이 계시는데내 딸 불행하게 한 당신들.. 담궈버릴꺼야…” 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의 대화를 하지 않고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이 미친 자식은 사위와 사돈에게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하였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그녀가 임신했을 때 맨 바닥에 무릎 꿇게 하고 ㅅㅂ년 ㅆ년 죽일년 등등 임산부가 들어서는 안될 쌍욕을 하셨던 그분이 생각났고, 지후가 탄 차 안에서, 내 집에서 내 허락도 없이 담배를 피워댔던 그런 몰상식한 그분이 떠올랐다. 솔직히 이혼의 원인은 몇 십억 현금으로 있다고 자랑했으면서 7500만원이 아깝다며 결혼식을 파토 낸 그분이라고 생각한다. 가정교육 하나 받지 못한 두 딸과 막내 아들이 많이 모자란 것 같았다. 지후 놀이방 앞에서, 거실에서 대마를 피워대고 마약 중독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마약에 취해 내 돈도 훔쳐갔던 처남도 미웠다. 맞아도 정신 못 차리고 마약을 끊지 못했다. 처제는 눈치도 정말 없었고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라고 느꼈다. 오로지 친어머니께 너무 죄송했다. 그리고 나 바람 폈던 거는 당신도 술 쳐먹고 어디 가서 따먹히고 왔던 즐기고 왔던 했으니까 퉁.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이혼 서류를 작성하러 가기로 한 전날 밤이었다. 내가 지후에게 말했다. “지후야, 아빠가 지후 정말 많이 사랑해. 근데 엄마랑 비행기타구 뉴질랜드 슝~ 가야 되.” 지후는 싫다고 하였다. 그래서 장난으로 그럼, 엄마랑 아빠랑 비행기타구 슝~ 갈까?” 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바로 이라고 대답하였다.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던진 얘기였는데 지후가 알아들었다. 엄마랑 아빠랑 같이는 가더라도 아빠 없이는 가고 싶지 않다고 표현한 내 아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내 방에 들어가서 혼자 흐느껴 울었다. 그리곤 담배를 한대 피러 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잘못한 선택이었다... 지후한테 낚였다...... ....

담배를 피고 온 후 그녀에게 물었다. “그냥 뉴질랜드 같이 가서 다시 한번 잘해볼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한참 대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가서 뭐할 건데? 어떻게 할 건데? 부모님에겐 뭐라고 할 건데? 라고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솔직히 그녀와 나 사이에는 양가 부모님들께서 너무 깊게 관여를 하고 계셨다. 서로의 부모님에게 악감정이 많았으며 전혀 서로 사랑하진 않았지만 아들을 위해서 그냥 평생 예전과 같이 희생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다시 양가 부모님께 우리는 뉴질랜드에 돌아가서 다시 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완전 반대를 하셨고, 그분께서는 니네 장난 치냐고 물어보셨다. 결국 우린 양가 부모님께 다시 허락을 받아 뉴질랜드에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우리 부모님께선 우리가 살 집을 사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우리가 일 할 수 있는 회사를 주겠다고 하셨다.

2013년 1229일 아침 우리는 다시 우리의 익숙한 그 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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