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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전쟁 7
게시물ID : freeboard_11182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돌싱
추천 : 0
조회수 : 23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10/21 21:23:26

25밑 밥 ()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좋았다. 알파카 카페트와 씨름하며 몸을 쓰는 것도 좋았고, 여러 거래처를 돌아다니며 즐기는 것도 좋았다. 경쟁사를 견제하며 일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나이가 많으신 직원분들과 함께 땀흘리며 일하고 같이 낚시도 다니면서 인생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내 일에 만족했으며 단 한번 힘들다거나 하기 싫다고 투덜댄 적이 없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 91일부터 102일까지 호주 출장이 잡혀있었다. 그분 사업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프로젝트였다. 중국에서 4500여 명이 호주로 단체 여행을 온다고 하였고, 그 단체를 받으려면 알파카 카페트 5000장 준비해야만 했다. 말이 5000장이지.. 끔찍하다카페트 수선 및 관리 시설도 뉴질랜드보다 나쁘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실제로 갔을 땐 최악이었다. 이곳 노동환경은 호주에서 법률로 정한 것에 위배되는 환경이었다. 노동청 전화번호가…… 그리고 여행자 비자라서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하였더니 세상은 법대로 살면 돈 못 번다고 하였다. 이분께 법은 그냥 뭐 엄마 잔소리 정도로 밖에 안보이나 보다. 이제 법의 심판을 좀 받으셔야 할 것 같다.

나는 이 출장이 너무나도 가기 싫었다. 이 때 그녀 임신 8개월 정도였고 지후가 너무 걱정돼서 가기 싫었다. 그녀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5시반에 집에 와서 아침이 될 때까지 침대에서 나오질 않았다. 임산부의 몸으로 혼자 아이를 보는 게 힘들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고, 당연히 아이를 방치 방관 할 것 같아서 너무 걱정됐었다. 그녀 걱정은 애초에 전혀 없었다. 집 청소 빨래 설거지도 안하고 집에서 하루 종일 TV만 틀어놓고 아이 방치 할 까봐 가기 싫었다. 여튼 시간이 흘러 91일이 되었고, 나와 처남은 호주 행 비행기를 탑승하였다. 오후 4시경 호주에 도착하였고 바로 그분의 공장으로 갔다. 함께 일하게 될 워홀 2명과 사무실에서 일하시는 분들과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숙소는 그분의 집….이었다.. 예상했다. 아 좆됐구나

92일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을 했고, 뉴질랜드로 돌아오는 날 까지 쉬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 처남, 워홀 2명까지 총 4명이 현장에서 알파카 작업을 하였다. 본 건물에 쌓아놓은 3000장을 옆 건물로 옮기면서 라벨 작업까지 했어야 했다. 아침 9시부터 우리 넷은 담배타임을 제외하고 놀지 않았다. 트롤리에 15장씩 옮기다가 결국엔 차량에 100장씩 넣어서 옮기기로 하였다.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내가 작업 지휘를 하면서 옆 창고에서 라벨 작업을 하였다. 라벨 5천장 박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알파카 5000장 옮겨봤던 사람도 알 것이다알파카 5000장 접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같은 작업을 2일동안 하였고 94일 그분께서 호주에 오셨다. 오시자마자 하신 말씀은 뭐했니?” 였다. 고생했다, 고생한다 등의 격려가 아닌 뭐했니?” 이 때 직감했다. 아 한 달 동안 좆됐구나

호주에서 있었던 일중에 가장 큰 이슈는 7번째 아주머니에게 심한 욕설을 한 날이었다. 뉴질랜드 공장에서 이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물건을 챙겨오셨다. 케리어가 없어서 우리집에 있는 케리어를 아무 말도 없이 훔쳐서 가져오셨다. 하지만 케리어에 표시를 하지 않아 호주공항에서 잘못 가져오셨다. 며칠이 지난 후 자물쇠가 잠겨있는 케리어를 발견하였고 7번째 아주머니께서는 지금 당장 이 자물쇠를 따라고 하셨다. 그래서 자물쇠를 따서 확인해 본 결과 잘못 가져온가져온 것 말씀을 드렸다. 그날 점심시간에 그분께서는 7번째 아주머니에게 ㅅㅂ년아 머리빈년아 멍청한년아 등등 차마 듣지 못할 욕설을 하셨다. 만약 우리 엄마가 재혼했는데 이런 소리 듣고 사는 걸 알면 난 이사람 죽였다. 그리고 그분은 평소에 7번째 아주머니를 자주 구타한다고 들었다. 물론 나는 본적 없지만 회사 식구들에게 들은 말인데 1년에 3~4번 정도는 얼굴에 멍이 들어 온다고 했다. 결국 7번째 아주머니께선 박차고 일어나셨고 내가 공항에 전화하여 가져와야 할 케리어가 공항에 보관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날 밤 집에 도착하여서 두 분께서는 심하게 싸우셨고 그분께서는 7번째 아주머니를 때리려 하셨다. 내가 몸으로 막아서 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7번째 아주머니가 맞고 산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안말렸으면 좀 심하게 맞았을 것 같다. 그 때 그분께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년은 쳐맞아야 정신을 차리더라. 너 이리와 ㅅㅂ년아" 솔직히 공항에서 케리어를 고른건 그분인데 왜 7번째 아주머니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고 욕설을 하시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 이야기는 처남에게 확인 하면 된다. 친어머니께서도 좀 맞으셨다고…. 그분은 평생을 여자 패고 사신 분이다.

26밑 밥 ()

 

일 하면서 그분께 참 많이 혼났다. 일을 못해서가 절대 아니었다. 처음엔 시키는 대로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래서 하라는 데로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뇌가 없냐 생각이 없냐 니가 로보트냐 미친놈아 등등 욕설을 들어야만 했다. 처음 2주간은 말대꾸 없이 참았다. 일을 하면서 개선해야할 부분이나 다른 방식으로 하면 훨씬 효율성 있게 일을 할 수 있던 것들이 많았다. 내가 지적을 하면, 니가 뭘 아냐 나보다 일 오래 했냐 초짜가 까불지마라 그냥 시키는데로 해라 ㅅㅂ 좀 닥치고 해라 등등 욕설을 들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지적한 부분이 크게 문제가 되어 처음부터 다시 하거나 비효율적으로 일을 해야 했다. 절대 생산적이지 못하였다. 나와 같이 일하던 워홀에게도 ㅅㅂ 호로새끼 등등 욕설을 하였다. 그러다가 뻔히 보이는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더니 이런 것도 발견 못하면서 무슨 일을 하려 하느냐 라고 혼났다. 어느 날은 직원 20여명 앞에서 욕설을 하셨고 심한 모욕감과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연세 많으신 직원들께서 나에게 물어보셨다. “자네 사위 맞나? 아니면 자네 집안이 힘든가?” 엄청난 욕설과 무시로 인해 직원들께선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줄 아셨나보다. 그분의 작업지시나 일하는 스타일을 보면 똑 같은 일 2번하게 만드시는 분이다. 내가 말 한데로 하면 5시간에 끝날 일을 꼭 10시간 이상 끌게 만든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남 탓 세계 1위다. 자신이 불리하면 말을 돌린다. 말 돌리기도 세계 1. 여자패기도 내 지인 중 1.

처음 이 행사를 준비하면서 그분께선 예상하셨다. 이거 한달 잘 하면 1000만불정도 매출이 나올 것이라며 호언장담을 하셨다. 뉴질랜드 이 업계에서도 큰 관심거리였다. 그분께서는 많이 뿌듯해하셨다. 이제서야 천운이 자신에게 온 것이라며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고 다니셨다. 사실 맨 처음에 이 행사를 하자고 나에게 전화가 왔었다... 내가 그분께 토스 하지 말았어야했다. 괜히 알려줘서 개 고생만 했다. 아침에 출근하여 5번정도 욕먹고 점심 먹으면서 쌍욕 쳐먹고 오후에도 5번정도 개쌍욕 쳐먹고 퇴근하고 같이 식사하면서 첫날부터 그날까지 있었던 나와의 마찰을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집에 가선 새벽 1시까지 술 상대를 해야만 했다. 이 패턴은 매일 똑같았다. 퇴근 후 자유시간은 딱 2일뿐이었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모멸감을 느꼈어야했다. 군대에서도 이렇게까지 무자비하게 욕설을 듣진 않았다. 3주차가 되었을 땐 정말 많이 울었다. 너무 화가 나고 억울하고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까지 욕을 먹어야만 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지후가 많이 보고 싶었다. 직원 분들께서도 나에게 항상 참으라고 말씀하셨다. 참으면 잘 참았다고 칭찬해주셨다. 터지면 난 네 편이다 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분은 일부러 심하게 대해서 내 기를 꺾고 가르치려 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강도가 너무 강하였고 결국 나는 부러졌다. 나는 칭찬해줘야 잘 하는데… 3주차 중반 즈음부터 그분을 피하기 시작했다. 작업하는데 그분께서 오시면 화장실로 도망쳤다. 그분께서 가시면 뭐래? 뭐하래? 하고 물어보고 작업을 하였다.

3주간 들었던 욕설이 잊혀지지 않았다. 내가 인생을 정말 잘 못 살고 있구나 라고 느낄 정도로 가슴에 대못을 박을 만한 상처도 많이 받았다. 내가 지적한 부분이 다 문제가 되어 결국엔 내 말대로 되었지만 그분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셨다. 대략 10번의 큰 다툼이 있었고, 30번의 작은 다툼이 있었다. 그분께서도 많이 힘드셨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모욕감을 주진 않았다. 욕설도 하지 않았다. 틀린걸 틀리다고 지적하였고 아닌건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90% 정도 내 말이 옳았다. 10번중에 1번은 내가 틀렸다. 인정한다. 그분에게 욕설을 듣고 난 후 창고에서 빡쳐서 혼자 울고 있을 때 직원들이 와서 달래주었다. 자신들도 이 행사 끝나면 다 그만두겠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 회사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계셨던 분께서 행사 중간에 욕설을 하고 그만 두셨다. 7년을 일하신 분인데 욕설과 함께 사라지셨다. 호주에서도 그분께서는 욕을 참 많이 드시는 분이었다. 불쌍하기도 했지만 한결 같은 ㅄ스러움에 감탄하였다. 어떻게 뉴질랜드에서 소송 2개 호주에서 소송 1개 페루에서 소송 1개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을까….. 엄청난 ㅄ력이다. 국보급 ㅄ력이다. 님킹왕짱.

행사가 시작되었다. 50여개의 팀이었는데 35개 팀이 물건을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행사 기간은 1주일 이었고 1주일 동안 총 매출은 꼴랑 25만불이었다. 이정도면 뉴질랜드에서 성수기 1달 매출액이었다. 원가 빼고 남는 건 얼마 안 된다. 뭐 한 3만불 남았나….? 1,000만불을 예상했는데 꼴랑 25만불. 목표치의 2.5%를 달성하셨다. 역시 엄청난 ㅄ력축하드립니다. 뉴질랜드 호주에 그렇게 자랑 질 하고 다녔는데 꼴랑 2.5%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행사 시작 전날까지는 현장에서 작업하였고 행사 첫날부터는 회계파트에서 정산을 하였다. 정산 파일 아직도 가지고 있으니 원하시는 분 계시면 보내드림. 행사 진행 기간에 그분께서는 맨탈이 깨지셨는지 사무실 바닥에 드러누워 주무셨다. 참 안쓰러웠지만 참 많이 비웃었다. 처남을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엄청나게 낄낄댔다. 다시 한번 그분의 대인관계의 한결같음에 감탄했다. 그분 지인 100명중에 100명이 그분이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한다. 한번 같이 일했다가 그만둔 사람들은 절대 그분이 좋은 분이라고 칭찬하질 않는다.

그분께선 절대 리더의 자격이 없으시다. 자질도 없다. 아랫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절대 듣지 않으셨고 직원들의 장단점을 파악 하지 못하셨으며 개인 사정 따위는 이해해주지 않으셨다. 항상 모순이 많은 말들만 하고 자신의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으시며 틀린 것을 지적하면 화를 내며 니가 뭘 아냐며 무시하셨다. 결국 거의 대부분의 내가 지적한 곳들이 문제가 되었고 손을 보게 되었다. 진작 손댔으면 됐을 일을 꼭 2번 하게 만들었다. 그분께 이유 없이 하루 10번 이상 욕을 안 먹는 날이 없었고 잘못된 가치관과 잣대로 평범한 사람들을 힘들게 하였다. 직원들에게 몇 불 쓰는 거 아까워하시는 졸부이며 사업가가 아닌 장사꾼이다. 그릇도 작고 남 탓 하길 좋아하며 이기적인 사람이다. 이해심 배려심 이딴건 개 줘버린지 오래인 듯 하다. 소송하길 좋아하고 대부분 진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분 욕하라고 하면 밤새서 할 수 있다. 태어나서 이 순간까지 한 사람을 이렇게 미워해 본 적이 없다.

결국 4주차엔 거의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그분께서도 맨탈이 깨져버려서 나에게 뭐라고 하질 못하셨다. ㅈㄴ게 창피했겠지. 이해한다. 어디 가서 숨고 싶었겠지. 그래서 맨날 책상 아래에서 숨어 잤겠지. 행사가 끝나고 마지막 2일동안 뒷정리를 마무리 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뉴질랜드로 날아왔다. 인사도 안하고 왔다. 당분간 볼 생각이 없었다. 나는 죄송한 것도 없고 그분은 내가 문제점을 지적했을 때 내 말을 듣고 계획을 수정하셨어야만 했다. 태어나서 이유 없이 가장 많은 욕을 들은 한달 이었고, 그때 까지만 해도 내 인생 최악의 한 달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더 최악의 순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호주의 한 달이 나를 몰아내기 위한 덫이었다.

 

27변화된 상황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72일 세틀 하고 2주 후에 어머니께서 오셨다. 한창 갱년기를 겪고 계셔서 밤에 추위를 많이 타셨다. 엄마가 너무 춥다고 하셔서 히터를 사서 방에 놓아드렸다. 하지만 몸이 너무 춥다고 하셨고 그녀의 반대에 무릅쓰고 전기장판을 구매하였다. 그녀는 어머님께서 호들갑을 떠신다며 전기장판 구매를 반대하였었다. 천하의 썩을 년. 니 애미애비가 춥다고 해도 똑같이 생각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110만불을 보내주셔서 집을 샀고, 남은 돈으로 하와이 여행까지 다녀왔는데 이년은 200불짜리 전기장판도 아까워하였다. 정말 너무 한다 싶었다.

어머님께서 한국에 돌아가신 후 얼마 후에 우선 집 명의 변경이 있었다. 72일 집 세틀 할 때는 그녀와 나의 공동명의 었지만 우리 부모님께 말씀 드렸더니 크게 화를 내셨다. 그녀와 그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며 내 개인명의로 바꾸라고 하셨다. 추후에 우리 어머니께서 뉴질랜드에 오시게 되면 다시 엄마 명의로 바꾸라고 하셨다. 이건 8월달의 일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앞을 잘 내다보신다…. 어머니께서 오셨을 때 명의를 바꿔야만 했다……

한창 추울 시기였다. 7~8월쯤 우리는 각방을 쓰고 있었고, 내방이 새벽엔 너무 추워서 입김이 나올 정도였다. 얼마 전 엄마가 왔다 가셨을 때 샀던 전기장판을 깔고 생활하였다. 얼마 후 전기세가 많이 나왔다며 전기장판을 쓰지 말라고 하였다. 그녀의 방이 추울까봐 800불짜리 히터를 사서 넣어줬는데 나보곤 전기세 많이 나온다며 쓰지 말라고 하였다. 진심 얼탱이가 없어서 무시하고 사용하였는데 며칠 후 그녀가 전기장판을 숨겨버렸다. 너무 화가 났었다. 내 월급에서 1500불을 제외하고 모든 돈을 다 보내주었고, 그녀의 수입도 3300불 정도 됐었다. 전기세가 많이 나와 바야 300불밖에 안 하는데 그게 아깝다고 전기장판을 숨겨버렸다. 그 다음날 나는 감기에 걸렸고 침낭을 사서 두 달 동안 침낭에서 생활하였다. 이 정도로 돈에 환장한 년이다. 내가 가져다 준 돈도 다 지돈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뭐 식모나 아이 돌봐 주는 사람 생각했나 보다. 이 부분도 나중에 다 이해가 갔다.

그분께서 그녀의 친어머님을 만나지말라고 셀 수 없이 말씀 하셨지만 나는 친어머님이 너무 좋았다. 너무 자상하시고 잘 챙겨주시고 때론 우리 엄마처럼 좋았다. 어머님 핸드폰이 고장이 난 적이 있었고 1500불 용돈에서 어머님 핸드폰도 사드렸다. 갤 노2가 나온지 얼마 되지않아서 800불 정도 였는데.. 내 용돈 반을 써서 어머님께 선물해 드렸다. 어머님께서는 너무 좋아하시고 고마워 하셨다. 물론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진 않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년은 받을 땐 말없이 다 받아 쳐먹고 자신이 써야 할 땐 10센트도 아까워 하는 여자이다. 언제나 돈돈돈 돈타령이었고, 한달 수입 10000불이 적다고 불평하는 여자였다. 한달에 천만원을 버는데 그래도 불만이 많았다. 어쩔 땐 키위 마인드, 또 어쩔 땐 한국 마인드.. 이게 너무 싫었다. 이중 잣대를 들이대며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밀어 붙여댔다. 지 아빠랑 똑 같은 여자다.

임신 8개월 쯤인가 둘째 유모차와 카시트, 침대를 사야한다고 하길래 원하는거 아무거나 고르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우리 엄마한테 사달라고….. ? 우리 월급이 얼만데 이걸 또 사달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싸우기 싫어서 어머니께 부탁드려서 구매하였다. 이제 유모차 5개 째다. 그 비싼 부가부를 골랐다. 미국 직구로 구매하였는데 150만원이 넘었고 아이 침대도 30~40만원정도 하였다. 그걸 굳이 우리 부모님께 부탁해서 사려했던 그녀가 이해가 안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일들 외에도 십여 가지가 더 있지만 큼직한 것 몇 개만 적어보았다. , 그리고 나는 매주 일요일 7시부터 11시까지 볼링 동호회는 항상 참여하였다.

 

28복수의 시작

 

호주에서의 지옥 같은 한 달을 보낸 후 집에 돌아왔다. 더 이상 알파카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한 두달 정도는 쉬었다가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다른 사업을 하던 하겠다고 하였다. 사업 아이템도 있었고, 계획도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조금 머리와 마음 좀 다스린 후 시작하겠다고 하였다. 그분에 대한 화가 전혀 가라 앉지 않았고, 그녀를 볼 때마다 그분이 떠올라서 너무 싫었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녀의 가정환경, 그분의 ㅄ력, 처남의 마약중독, 금전적으로 나를 압박하던 그녀, 우리 부모님, 내 아들 지후 등등 많은 것들이 생각났다. 집에서 10일 정도 청소 빨래 설거지 등등 모든 집안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낮에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며 나만의 시간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 내가 호주에서 돌아왔을 때 처제가 한국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우리집에 들어와서 무료로 살고 있었다. 처음엔 주당 150불씩 받겠다고 하였지만 나에게 처제에게 플렛비를 받았다는 증거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게 10일이 지났다.

오클랜드에서 일은 그만두었지만 로토루아에서 같이 일하던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분과 그녀는 내가 로토루아에 가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이유는 호주에서 큰 행사를 치웠지만 그분께서 자랑하시던 매출 1000만불은 2.5% 밖에 달성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내가 말할까바 걱정이 되어서 였다. 하지만 나는 그 것을 눈치채고 때문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중국인 직원들에게도 다 얘기하였고, 경쟁사 K사의 직원에게도 알렸다. 매우 뿌듯했다.

차가 없어서 버스를 타고 다녀왔고, 오클랜드에 오는 길에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그분과 7번째 아주머니께서 우리집에서 주무시겠다고 했다. 호주에서의 지옥을 경험하기 전에는 그분들께서 오시면 내가 쓰던 장판도 내려드리고 히터도 틀어드렸었지만 진심 꼴도 보기 싫었다. 이 때 처음으로 욕을 하였다. “ㅅㅂ년아 꼴도 보기싫으니까 내 집에서 나가라그래.” 어찌됐건 그녀가 내보낸듯하다. 진심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서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클랜드에 도착하였고 버스가 우리집까지 가질 않았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2시간은 걸어야 했다. 그래서 친한 친구에게 연락하여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그 친구가 2시간은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고,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형에게 연락하여 밥을 먹기로 하였다. 나는 밥만 먹고 친구 차를 차고 집에 가려고 하였으나 형이 나를 룸으로 데려가서 밥을 시켜준 후 양주도 시켰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밥먹고 술마시며 얘기하다보니 취해버렸다.

술을 먹는 중간에 거래처에서 연락이 왔다. 분명 나는 일을 그만 두었다고 얘기를 하였지만 급하다면서 나에게 연락하였다. 그래서 다른 알파카 납품업체의 연락처를 주었다. 하지만 그 업체는 내 거래처에게 물건을 줄 수 없다고 하였고 나에게 전화하여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지만 가족사에 자신이 끼면 너무 난처해 진다고 하였다. 거래처를 넘겨 준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이렇게 빼앗아 가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였다. 이 분과는 몇 달 후에 낚시도 가고 식사도 하였다. 나의 경쟁업체였지만 참 생각이 곧은 분이었다. 술에 취해 실수 했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그분이 망하거나 죽어버리길 진심으로 원했기 때문에 거래처도 다른 업체에 다 넘겨주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이 나기 시작한 때는 형 차를 타고 집에 오는 길에 창문을 열고 토를 했다는 사실이다. 고속도로에서 창문 열고 토를 해본 사람 있나…? 반 정도는 차 안으로 들어온다……… 이 형 차 BMW 신형이었는데…… 10만불정도 할 텐데…… 차 산지 한 달도 안되서내가 토를 해버렸다……. 집에 도착하여 내가 입고 있던 잠바로 형 차를 닦아준 후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집에 들어갔다.

그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녹음기를 켜둔 상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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