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와 철학적 일상
시험기간인지라 공부하기 싫기 때문에 이번에는 하이데거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려고 합니다. 독일인들 사이에 이런 농담이 있다죠?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언제 독일어로 번역되는 건가요?” 하이데거는 독일 사람이고 평생 독일어로 철학을 했지만 이런 소리를 들었으니 전문적인 철학이란 정말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난해하고 어려운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왜 우리가 철학을 ‘뻔한 이야기를 괜히 어렵게 하고 있는’ 학문으로 오해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죠. 우리가 철학책을 펼쳤을 때 맞닥뜨리는 난해함은 보통 이런 식입니다.
“형이상학(존재론)은 존재로서의 존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위 문장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형이상학>이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언뜻 쉽게 와 닿지 않고, “도대체 뭔 개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일반적일 겁니다. 아니 차라리 “형이상학은 존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썼으면 “아하, 형이상학은 존재를 탐구 하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텐데, 저렇게 돼먹지 않게 써 놓으니 괜히 어렵게 써서 잘난 척 하려고 하는 걸로 오해받기 십상이죠.
하지만 위와 같이 “존재로서의 존재”라는 표현을 쓴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학문은 어떤 존재하는 대상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물리학은 “물리적 현상”을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물리학이라는 이름이 붙었죠. 물체가 낙하하는 현상, 혹은 바퀴가 굴러가는 현상 등에 대해서 체계적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 물리학입니다. 반면 생물학은 생물을 탐구합니다. 생물체는 어떻게 숨을 쉬는지, 혹은 생물의 기본단위인 세포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답을 하죠. 이 모든 것들은 각각 “너는 무엇을 탐구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형이상학은 그러한 개별적인 “무엇”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그 개별적인 “무엇”이라고 부르는 “무엇”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해서 해명을 시도합니다. 즉 형이상학은 “무엇이라고 불리고 있는 이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존재로서의 존재”라는 표현은 “도대체 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라고 할 수 있고요.
그런데 여기서 다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드실 겁니다. “우리가 그 무엇이 무엇인지 꼭 알아야 하나요? 무엇은 그냥 무엇 아닌가요?” 라는 의문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더 이상 형이상학적 의문들을 철학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철학을 철저한 과학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흔히 ‘논리실증주의‘ 라고 불리는 철학적 사조가 이런 경향을 띄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이 이 “무엇”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시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많이 하고 있는 거죠. 예컨대 여러분은 “도대체 나란 뭐지?” 라는 질문을 하신 적이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방금 전까지는 게임하고 노느라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왜 숙제도 안하고 하루 종일 게임만 하느냐고 엄마한테 엄청 혼나서 기분이 엄청 우울하거든요. 엄마는 왜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을 사랑해주지 않고 이렇게 나를 혼내는 걸까요?
그런데 여기서 다시 멈칫 하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뭘까? 게임하고 놀고 있던 나와 엄마 말을 잘 들으며 착실하게 숙제를 하는 나,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나 일까? 만약 둘 다 나라고 한다면 왜 하나는 엄마한테 칭찬을 받고 하나는 엄마한테 혼난 거지? 하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현상으로 존재하는 두 개의 모습이 ‘나’라고 하는 통일된 실체로 받아드려진다는 것은 사실 엄청나게 놀라운 현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지금의 ‘십대 모습의 나’와 ‘60년 후에 할아버지가 된 나’는 정녕 같은 사람일까? 만약 이 대답에 yes! 라고 말한다면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일상적인 깨달음에서 불확실함과 놀라움을 느끼고 그에 대한 대답을 갈구하면서 시작된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그렇게 사소한 동기로 시작된 철학이 이토록 난해해진 것은 저 사소한 질문이 결코 대답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존재란 무엇인가?” 라는 단순한 질문에 수 천 년 동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버클리, 흄, 밀, 칸트, 러셀, 윌리엄 제임스 등의 잘 알려진 천재들이 머리를 싸매고 덤벼들었지만 그 누구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답을 내려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소소한 성과는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해석 중에 하나가 이런 것입니다.
“존재란 주어 자리에 올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비겁한 대답인가요? 하지만 상당히 설득력 있는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엄마한테 혼났다.”, “나는 숙제를 열심히 한다.”, “나는 못생겼다. 잉잉” 하는 다양한 현상을 서술하는 표현마다 주어자리에는 ‘나’라는 표현이 들어가게 되죠. 하지만 이러한 설명만으로 완전히 만족하실 분들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다양한 반박들이 존재하지만 지금 이 글은 하이데거를 설명하기 위한 글이니까 일단은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흔히 난해하고 이해다고 알려졌지만, 저는 운이 좋게도 한 훌륭한 선생님으로부터 제법 쉽게 하이데거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든 생각은 하이데거가 어렵다는 생각이야 말로 철학의 난해함에 대한 오해 중에서 가장 큰 오해였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외계어로 쓰인 것은 맞습니다.) 음, 개인적으로 헤겔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잘 이해가 안 갔어요. 하지만 하이데거는 생각보다 술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하이데거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 철학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을 번역하신 한국외국어대학교 이기상 교수님─거의 40년 가까이 하이데거를 연구하신 진성 하이데거 덕후─의 번역서 말미의 쓰인 ‘옮긴이의 말’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제가 멋대로 편집했습니다.)
“어떤 점이 <존재와 시간>을 그것이 출시된 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하게 만들까? 그는 다가올 세기를 기술과 과학의 세기로 보았고, 그 기술과 과학이 인류에게 안겨줄 이익과 환희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보이지 않는 어두운 그림자를 앞서 느낀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기술과 과학을 움직이고 있는 인류역사의 ‘논리’가 무엇인지를 밝게 파헤쳐 보이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하이데거는 기술과 과학이 서 있는 토대가 서구의 형이상학임을 간파하고, 그 형이상학이 간직하고 있는 일면적이고 일방적인 ‘이성중심의 논리를 비판하며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규명하려고 시도한다. 과학의 논리가 삶의 문법을 지배하며 과학이 생활세계를 식민지화하고 있음을 꿰뚫어보고 그 전도된 관계를 밝혀 바로잡으려고 노력한다.”
정리하자면 하이데거는 자신이 “생활세계”라고 부르는 것이 과학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음을 깨닫고 이를 해소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재밌는 사실은, 우리가 ‘현대 철학’의 세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니체─각각, 영미철학, 유럽철학,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 모두 “삶을 지배하는 과학의 문법”에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절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이들이 ‘과학이 가져다주는 결실’을 비판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공학자였고, 니체는 다위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을 만큼 이들은 과학과 무관한 사상가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은 다가올 시대가 ‘과학의 시대’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험성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여러분의 동의를 좀 더 구하기 위해서 비유를 하자면
철저한 분업과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도입한 포드주의는 분명 막대한 생산성을 가져다주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공장의 노동자들을 마치 기계나 부품처럼 대하는 풍조를 야기하고 말았죠. 효율적인 통제를 통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박스 안에 물건처럼 움직이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누구나 막대한 생산성과 이익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실 겁니다.)
위의 인용에서 하이데거가 “기술과 과학이 서 있는 토대가 서구 형이상학임을 간파” 했다고 쓰고 있는데요. 제가 다루고자 할 내용의 핵심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즉 하이데거는 기존의 서구 형이상학의 인식론이 우리가 생활 세계에서 발견하고 있는 다양한 가치와 진리들을 폄하하거나 소외시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니 과학이 우리에게 이토록 많은 이익과 진리를 가져다주고 있는데 하이데거는 왜 이런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근대 자연과학의 기초를 마련한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을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의 존재론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법서설>과 <성찰>을 추천 드립니다. 여기서는 그냥 결론만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데카르트는 그의 철학적 반성을 통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사유하는 나’와 ‘연장성을 가진 물체’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존재’는 가변적인 현상적 존재가 아니라 위에서 말한 절대 불변하는 ‘존재로서의 존재’를 의미합니다. 데카르트가 분석하기에 인간에게서 모든 요소를 제거해도 ‘사유’라는 속성만은 제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물체를 떠올릴 때 색, 질감, 부피, 모든 것을 다 제거할 수 있지만 그것의 ‘형태(연장)’를 떠올리지 않고 그 물체를 떠올릴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유’와 ‘연장’은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이 됩니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사유’와 ‘연장’의 이원론이 근대 자연과학의 아버지가 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① 인간을 사유하는 주체(subject)로 놓고, 자연을 인간에 의해서 분해되고, 분석되고, 탐구되는 대상(object)으로 환원시켜 버렸습니다. ② 우리가 대상을 이해할 때 가변적인 것들은 모두 제거하는 태도를 전제하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가 과학적인 시선으로 물을 바라볼 때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의 시원함이라던가, 청량감, 그리고 목마를 때 느끼는 갈증의 해소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것의 불변의 본질인 H2O로 바라보고 분해하고 분석하려 할 뿐이죠.
아니 불변하는 것들을 파악해냈으니 과학이 잘한 거 아니냐고요? 물론 그렇죠. 분명 과학은 잘 해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근대 과학은 철저하게 공간을 중심으로 사유되는 ‘공간의 학문’입니다. ‘공간의 학문’으로서의 과학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법칙’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오늘 향기를 내뿜고 내일은 시들어버릴 꽃의 현상을 이해하는 것은 과학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할 일이고, 예술은 될지언정 결코 ‘진리를 보장하는 학문’은 될 수 없다는 것이 과학적 사고방식입니다.
하이데거는 서구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우뚝 선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와 과학적 세계관이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우리는 꽃의 향기를 맡고 즐거움을 느낄 때도 마치 과학적 진리를 발견할 때만큼 앎의 기쁨을 느끼는데 말이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서구 형이상학이 간과한 중요한 존재의 문제를 하나 되짚어냅니다. 그것은 <존재와 시간>이라는 제목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바로 ‘시간’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시간’이란 기존의 철학과 물리학에서 말하는 시간, 즉 선형적으로 흐르며 1, 2, 3 수로 끊어서 셀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미 시간도 과학에서 충분히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죠. 하이데거는 이 시간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존재를 의문시하고 있는 존재자’를 불러내게 됩니다. 이는 바로 하이데거가 ‘현존재(Dasein)’라고 부르고 있는 ‘인간’입니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사유하는 것’인 ‘주체’가 아니라 그저 거기 있을 뿐인 현존재입니다. 현존재의 뜻 자체가 ‘거기 있음’을 의미하는 독일어를 붙여 쓴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현존재가 있는 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 즉 생활세계입니다. 물의 분자구조 대신에 시원한 물을 마시고, 꽃의 세포구조 대신에 꽃의 향기를 맡는 그런 실천적인 세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생활 세계에서 인간은 시간적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현존재의 존재는 시간성이라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라는 다소 어려운 말로 표현하죠.
그렇다면 다시 우리는 묻게 되겠죠. 이 인간이 ‘시간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냐고. 그렇습니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이는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과학적 세계관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몹시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을 통해서 존재를 사유할 때만이 우리는 ‘존재를 끝으로부터’ 사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존재라는 복잡해 보이는 단어가 그냥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었듯이 이 ‘끝으로부터의 사유’ 역시 굉장히 간단한 의미입니다. 그것은 바로 끝이란 바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변화하는 현상들은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것들이고, 그 끝은 죽음이다.”
즉 하이데거는 우리가 이토록 애타게 존재는 무엇인지, 진정한 나란 누구인지 질문하게 되는 이유를 존재의 숨겨진 본질인 시간, 그리고 그 유일한 원리인 죽음으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이 언뜻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실이 몹시 중요한 이유는 이 사실에 주목할 때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부터 지금의 나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역사’가 됩니다.
이 역사는 ‘과거의 기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단순한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실증주의적인 방법론에 따라서 틀린 사실로부터 ‘정확한 사실’을 가려내는 하나의 과학으로 작용하게 되죠. 하이데거가 말하는 역사는 정확한 사실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과거로부터 그리고 내가 되고자하는 미래의 ‘나’로부터 이끌어지는 현재의 ‘나’를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죽음에 대해서 사유할 때 가능합니다. 죽음이란 역사의 끝이고, 죽음을 기준으로 남는 것이 바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짐승이 눈앞에 작은 생물을 발견했습니다. 이 짐승은 이 생물을 잡아먹겠죠. 짐승에게는 ‘배고프다’라는 사건이 주어졌고, 그는 이 욕망을 해결하고 싶어 할 테니까요. 아마 이 짐승은 고민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죽음’으로부터 존재를 이해하는 인간이라면 어떨까요? 죽이기 전에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그의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총체적인 존재를 소멸시키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반성을 통해서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만약 그 잡아먹으려는 대상에 대해서 우리가 더 많은 역사적 이해(단순한 눈앞의 사실을 넘어 그의 과거와 미래로부터의 현재 이해)를 하고 있다면 아마 인간은 그 대상을 잡아먹는 것을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흘러도 결코 변하지 않는 본질을 찾는 과학적 삶 vs 시간의 끝은 죽음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반성하는 역사적 삶
이 두 가지 삶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다거나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전자는 우리에게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많은 편리와 효율성을 가져다주었죠. 반면 후자는 끊임없이 죽음이라는 조건 한에서 존재의 의미를 해석(이해)하도록 만듭니다. 제가 보기에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좀 더 필요한 것은 후자인 것 같습니다. 어느 쪽이 더 옳고 따라서 더 많은 이득을 가져가야 할지 묻는 것은 물론 중요한 문제죠. 하지만 그와 더불어 상대방의 존재의 의미(역사)에 대해서 이해하려는 노력 역시 필요한 게 아닐까요? 하이데거의 난해한 책 <존재와 시간> 속에는 아마 이러한 의문에 대답하려는 열망 역시 숨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