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구소련의 붕괴 원인을 이야기 할 때 '레이건이 군비 경쟁으로 소련을 붕괴시켰다'는 주장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이를 현재에 대입시켜 '미국이 구소련처럼 중국도 군비 경쟁으로 붕괴시킬 것이다!'는 주장을 아주 쉽게 하곤 하죠.
과연 이것이 근거가 있는 주장일까요?
1. 레이건이 소련이 더 많은 방위비를 지출하게 강제함으로써 소련을 붕괴시켰다?
위 표는 소련 전반에 대한 분석을 담은 CIA 보고서에서 소련의 총 GNP와 방위비 지출을 분석한 내용입니다.
보시다시피, 소련의 방위비 지출은 레이건 재임기(1981-1989) 동안 GNP 증가 대비 전혀 급격한 상승을 보이지 않앗습니다. 오히려 70년대에 비해 굉장히 낮은 방위비 증가폭을 보였고, GNP 대비 방위비 지출도 그 비율이 엄청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여주죠.
저 표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7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소련 경제의 성장률 둔화입니다. 당시 군비경쟁에 앞서 구소련 지도자들의 우선 고려 사항은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한 이러한 경제적 성장 둔화를 해결하는 것이었고, 다양한 경제적 개혁이 시도됩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대내외적 요건(슬프게도 80년대를 정점으로 당시 소련 내부의 여러 굵직한 사건 사고가 나타나는 한편 이상기온으로 인한 집단농장 생산성 저하 등의 문제가 몰아쳐서 나타나죠)으로 인해 결국 실패하게 되죠(이 부분은 다룬 저서와 논문만 수백편일테니 넘어갑시다).
2. 레이건의 스타워즈 계획이 구소련 지도층을 압박하는 유효한 수단이었나?
냉전이 종식되고 구소련의 기밀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레이건의 스타워즈 계획이 구소련 지도층을 압박하는 유효한 카드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잃고 있습니다.
레이건의 스타워즈 발표 이후 미-소 핵무기 감축 협약이 진행되면서 이것이 미국이 소련 지도층을 압박하여 군축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는 유효한 수단이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만,
오히려 해당 리포트에 따르면 소련 군부는 스타워즈 계획을 큰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미국의 스타워즈와 같은 미사일 방어 체계의 불과 5% 비용 지출만으로도 이 체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으리라 판단했으며, 실제로 80년대에 (큰 부담 없이) 다양한 anti-MD 프로젝트들을 발주시키죠(그리고 그 프로젝트의 일부 결과물들은 지금 러시아가 잘 물려받아서 써먹고 있습니다).
더불어 해당 리포트는 앞서 언급한 사안 - 당시 소련 지도층의 선결 과제는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고, 군사적인 지출의 문제는 비교적 후순위의 문제였음 -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3. 미국의 방위비 압박 공작은 유효했나?
CIA의 지원을 받아 전직 SOVA(소련분석국) 분석관 두 명이 공저한 <Soviet Defense Spending: A History of CIA Estimates, 1950-1990> 라는 책은 방위비 압박을 통한 구소련 붕괴에 대해 미시적, 거시적인 관점에서 회의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당시 대소련 첩보전의 최전선을 담당했던 CIA조차 미시적인 관점에서 '경제에 유효타를 줄 수 있을 만큼 국방예산을 증액하도록 소련 지도부를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한 거시적인 관점에서 '실제 군비의 변동이 미치는 영향도 전체 GNP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 없는 수준이었다'고 인정하고 있죠.
그래서 결론은...
- 레이건 재임 시절 소련의 방위비는 급격하게 증가하지 않았고,
- 소련 지도부에게는 미국의 SDI에 대응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아니었으며,
- SDI가 실제 유효한 정치적 압박 수단이었는지도 미지수고,
- 소련 경제는 70년대부터 이미 구조적인 한계에 부딛힌 상태였다(=개혁 실패하면 어차피 망할 운명이었다).
입니다.
뭐 이쯤되면 레이거노믹스의 실책을 보면서 '그래도 우리가 소련을 무너뜨렸어!!!!'라고 행복회로를 돌린 끝에 나온 얘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