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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백일장] 식물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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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리얼판타지
추천 : 3
조회수 : 22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1/20 11:48:01

식물인간

 

1.

해가 거듭될수록 날씨가 점점 무더워지는 여름입니다.

제가 근무하는 대학은 이제 곧 있으면 방학이 시작됩니다. 교수님의 대학은 이번에 수업일수가 한 주 줄어서 교수 학생 할 거 없이 고생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편지를 받는 즉시 답장을 부치기 어려울 정도로 바쁠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저도 그닥 한가한 때는 아닙니다만, 여러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다 못해 답답한 마음에 잠시 쉴 겸 시간을 내어 이렇게 메일을 보냅니다.

요새 연구는 꾸준히 하고 계십니까? 그러고 보니 ‘한국 생명 과학 진흥을 위한 생물학 연구 학회(줄여서 ‘생진회’)’에서 주최하는 학술회가 약 5개월 남짓 남았습니다. 저야 연구도 계속 꾸준히 해왔고 논문도 쓰고 있으니, 앞으로 시간에 맞춰 연구 성과를 내기만 한다면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왠지 싱숭생숭한 마음에 평소만큼 집중도 잘 안되고, 제가 낸 이 연구 성과가 학회에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를 미리 걱정하는 탓에 조금은 힘이 듭니다. 교수님께서는 어떠십니까? 연구할 마땅한 소재가 없다고 고민하셨던 때가 생각나 걱정이 됩니다.

더 이상 길게 말하면 바쁘신데 폐를 끼칠까봐 내용은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가족 분들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2.

녀석, 내 제자 시절 때부터 왠지 좀 고상한 성격이더니, 메일도 꼭 편지체로 써놨구나. 뭐, 격식 차리는 거야 나쁠 건 없는데, 귀염성이 없으니까 하는 소리다.

안 그래도 요새 애들 시험문제 출제하느라 아주 쎄가 빠진다. 이놈의 자식들, 명색이 명문대 대학생이란 것들이 공부는 더럽게 안하려고 들어. 뭐, 어딜 가도 마찬가지겠지만. 녀석들이 대학은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건지… 그래서 일부러 공부 시키려고 과제도 많이 내고 시험도 어렵게 출제하는데, 걱정이다. 너무 공부를 안 해.

여튼, 수업 일수는 한 주 줄었지, 수업 듣는 놈들 성적 관리해야지, 여간 바쁜 게 아니다. 게다가 ‘생진회’에서 여는 학술회에 제출할 논문도 써야하고… 갑자기 머리가 아파지는구만. 사실, 요새 아주 흥미로운 연구 거리가 하나 생겨서 말이지. 근데, 지금까지 학계에서 발표한 논문이나, 혹은 우리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연구 거리라는 게 문제야.

‘식물인간’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뇌에 큰 충격을 입어 뇌기능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이지만 신진대사기능은 멈추지 않는 ‘뇌사 상태’에 이른 사람들을 우린 ‘식물인간’이라고 불러 왔지. 그러나 이젠 ‘식물인간’이라는 단어도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연구 소재로 얻은 개체는, 말 그래도 ‘식물인간’이야. 인간은 인간인데, ‘식물’과도 같은 인간.

뭐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해가 단번에 쉽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무슨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도 아니고. 근데, 나도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는데, 연구하면 할수록 이건 ‘인간’보다는 ‘식물’에 더 가까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물론, 이건 언제까지나 객관적 물증이 부족한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계속 연구해봐야지. 남은 시간동안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어느새 메일이 길어졌구만. 뭐, 자네도 잘 살고 있고 나도 잘 살고 있으니 일단 마음은 놓인다. 언제 한번 시간 내서 양쪽에 애엄마 데리고 나와서 밥이나 한 끼 하자고. 그럼 이만.

 

3.

처음에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구나 생각했다.

가끔 인터넷 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기괴한 일들과 같은 것이었다. 생물학을 전공하여 지금까지 숱하게 연구와 논문발표를 반복해온 나에게 있어서, 그런 기괴한 일들, 아직 학계에서도 제대로 입증해내지 못한 일들은 더 큰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포유류의 뱃속에서 인간의 형상을 띤 식물이 태어난다… 감히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더 이상 긴 말이 필요가 없다. 계속해서 연구를 진행해나가는 수밖에. 이 돌연변이 생물의 정체를 규명해 내는 거야말로 연구자로서의 사명이 달린 문제이다.

 

4.

1997년 6월 16일.

한 산부인과에서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P씨 부부의 산모가 아들을 출산했다. 아이는 7개월밖에 못 채우고 태어난 미숙아였다. 체중은 보통 아이들보다 낮았고, 아이의 심장박동수도 불안해서 일단 인큐베이터에 아이를 넣게 되었다. P씨 부부는 아이를 낳은 기쁨보다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걱정을 했을 것이다.

아이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미숙아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보통 아이들보다 성장속도가 빠른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심장박동이 멈췄습니다!”

불이 다 꺼진 산부인과에서 아닌 밤중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까 전만 해도 이상이 전혀 없었던 아이가 갑자기 심장박동이 멈춰버린 것이다. 의사와 간호사가 집에 가려다 말고 발걸음을 되돌려 다 같이 응급처치 준비를 해야만 했다.

응급처치가 시작된 지 불과 3분 만에 아이의 심장이 다시 정상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때 응급처치를 했던 한 간호사가 이런 얘기를 했다.

“조금 이상한 부분이 몇 가지 있었어요. 7개월 만에 태어난 미숙아가 바깥세상으로 나온 지 사흘 만에 보통 아이들만큼의 체격과 체중만큼 성장한 것도 그렇고, 그때 응급 처치할 때 사실 응급실에 들어가자마자 아이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거든요. 그러더니 한 3분정도 지나니까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듯이 심박수가 정상수치로 올라갔어요. 굳이 손 쓸 필요가 없었다니깐요.”

 

5.

아이는 그 이후 산부인과에서 나와서 부모의 집에서 길러지게 되었다. 미숙아 치고는 아이의 상태가 너무 멀쩡한 게 보는 사람들마다 신기하다고 할 정도였다. 뭐, 부모로서는 다행인 것이었다.

 

아이는 해가 거듭할수록 다른 아이들과는 현저히 다른 성장속도를 보여주었다. 아이가 6살 때 키가 145cm였다. 그렇게 쑥쑥 자라주니까 P씨 부부도 아이를 보면 흐뭇했다. P씨 부부는 아이가 더 쑥쑥 자라라고 이것저것 많이 먹여도 보고, 사랑을 많이 쏟아 부어 주었다.

어느새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 운동장에 아이들이 서있으면 쬐끄만한 꼬마들 사이로 가장 머리가 높은 곳에 있는 아이가 P씨 부부의 아이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8살인 P는 그때 158cm였다. P보다 키가 큰 아이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아이는 줄곧 말썽을 부리고 다녔다. 키가 유난히 크다는 이유로 아이들이 피해 다녔다. 하루는 자기도 노는 무리에 끼어들고 싶어서 어떤 아이한테 다가갔는데, 그 녀석이 이렇게 말하며 쫓아냈단다.

“저리 꺼져, 이 거인 자식아!”

그 말을 듣고 상처를 받은 P는 집에 와서 엄마한테 징징거리며 매달렸다.

“그만 울어. 그 녀석 참 나쁜 놈이네. 왜 우리 멀쩡한 아들한테 거인이라고 놀려? 쬐끄만 게. 앞으로 그런 놈들 있으면 가서 한 대 쥐어박어버려. 키도 쬐끄만 것들이 덩치 큰 애들한테 안 혼나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란다.”

그 이후로 P는 자기에게 ‘키가 크다’는 이유로 놀리는 아이가 있으면 그 녀석과 한바탕 싸우고 집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 키도 쬐끄만 것들이!!”

“닥쳐, 이 괴물아! 너네 집에는 젖소공장을 차려놨냐? 맨날 우유만 먹어대니까 키만 크지, 이 괴물 자식아!”

그러면서 싸우고 돌아오는 P에게 엄마는 오히려 힘을 북돋아주었다.

“이 녀석들이 지들은 아무리 우유를 많이 먹어도 키가 그만큼 안 크니까 네가 부러워서 그러는 거야.”

하지만 P의 엄마도 P가 점점 싸우는 횟수가 늘어나자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P가 어떤 아이와 크게 싸운 문제로 P의 엄마가 학교에 불려와야 했다.

“아이가 애들이랑 잘 못 어울리는 건 저희 책임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걸 관리하지 못한 선생님도 책임이 있는 거 아닌가요? 제 아들이 맨날 학교에서 돌아오면 애들이 안 놀아준다, 어쩐다 하면서 씩씩거리지를 않나, 어디 한군데는 꼭 터져서 돌아오지를 않나, 애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선생님들은 도대체 뭐하신 거예요?”

“아, 흠… 듣고 보니 저도 교사로서 잘못이 있는 것 같네요.”

“애들 가르치는 선생님이시면, 애들 좀 똑바로 관리시켜주세요. 벌써부터 애들 사이에서 왕따가 있으면 애가 학교 무서워서 어디 다닐 수가 있나.”

“아하, 죄송합니다.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 한 가지 물어볼게 있는데요…?”

“뭔데요?”

“혹시, P가 어느 정도 성장을 하는지 꾸준히 체크하는 편인가요?”

“아뇨, 그건 왜요?”

“아니, 제가 봐도 P가 보통 아이들과는 다르게 좀… 성장속도가 빠른 것 같이 느껴져서요.”

“그래서, 뭘 어쩌라는 말씀이죠?”

“아, 그냥 별거는 아닙니다만, 혹시 오늘 집에 가시면 P의 키와 체중을 한번 재보심이 어떨까 하고….”

P의 엄마는, 이놈의 작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어이없는 말을 지껄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쨌든, 미리 준비한 봉투를 내밀고 P의 엄마는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P의 엄마는 P의 키를 재보았다. 167cm. 2월 달에 입학했을 때가 158cm였는데, 두어달 만에 9cm가량 자랐다. 더불어 체중도 재봤는데, 체중은 40kg이 채 나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이가 좀 빨리 자라는 것 같지?”

“응. 그게 뭐?”

P씨 부부가 잠자리에 들 때 아내가 말을 꺼냈다.

“아니, 뭐랄까… 좀 지나치게 빨리 자라는 것 같아서 말야.”

그러나 남편이 대수롭지 않게 맞받아쳤다.

“에이, 당신도 참. 요새 젊은 애들한테 뭐가 인기인지 모르는구만.”

“…?”

“요샌 남자들이 키가 커야 인기가 있어. 180cm 이상만 되면 여자들 호감 사기 쉽다니깐. 쟨 아마 나중에 커서 엄청 인기 있는 남자가 될 거야.”

“…그렇겠지?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거지?”

“아우, 피곤하다. 얼른 자기나 해.”

 

6.

아이는 키가 크면 클수록 날로 더 흉폭해져갔다. 처음에는 없던 맷집이 생기니까 키가 쬐그만한 놈들에게 맞아도 별로 큰 상처가 나지 않았다. 이미 녀석은 덩치가 일반 성인들만큼 커져있었다. 물론 그만큼의 정신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한글을 벌써 깨우쳤을 때에도 P는 아직 한글 공부에 한창이었다. 방학쯤 돼서 P의 부모가 P의 키를 쟀을 때, 솔직히 P의 부모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184cm. 혹시나 해서 P의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한번 찾아가 보았다.

“아이가 지금 8살밖에 안됐는데 벌써 키가 180cm을 넘어요. 혹시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뇨. 별 문제는 없는데요. 솔직히 이 정도의 성장속도로 말하자면 ‘거인비대증’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호르몬 수치나 성장판에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냥 유난히 다른 아이들보다 성장속도가 빠른 것으로 밖에는 볼 수가 없겠네요.”

P의 부모는 아이에게서 문제가 전혀 없다는 말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다. 그냥 보통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성장속도가 빠른 것, 그 뿐이었다.

 

7.

P가 하루는 그림을 그려서 엄마한테 보여줬다. 키가 기린처럼 큰 아이의 주변에 키가 반에 반도 안 되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키가 큰 아이는 키 작은 아이들을, 마치 체스판을 손으로 쓸어버리듯이 그렇게 쓸어버리는 듯한 그림이었다.

“이게 무슨 그림이니?”

엄마가 묻자, 아이가 답했다.

“음, 여기 키가 큰 건 나고, 이 주위에 개미같이 작은 것들은 다 우리반 애들이야. 이 쬐그만한 녀석들이 다 덤비니까 내가 손바닥으로 확 쓸어버려서 아이들이 다 날라가는 그림이야.”

그 말을 듣던 엄마는 잠시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이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 덩치도 쬐그만 난쟁이 똥자루들은 죄다 쓰레기야. 먹는 건 나랑 똑같이 먹어대는데도 왜 다들 이렇게 조그만한 건지 모르겠어. 얘네들 다 이상한것같애.”

아이가 평소에 덩치가 조그마한 녀석들에게 놀림을 받고 사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거구나, 엄마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엄마는 흥분한 아이를 끌어안고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럼. 이 난쟁이 똥자루들이 이상한거야. 이 쬐그만한 것들이 다 우리 아들 질투하는 걸거야. 우리 아들이 이렇게 키가 크라고 하느님이 우월한 유전자를 주신건가봐.”

“우월한 유전자? 그게 뭐야?”

“응,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 아들이 훨씬 좋은 거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돼.”

“우와, 그럼 나 좋은 거네?”

“그럼. 우리 아들, 앞으로 난쟁이 똥자루들이 덤비면 혼내버려. 알았지?”

“덤비지도 못해. 애들은 너무 작아.”

엄마는 잘 준비를 마친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잘 자, 우리 아들. 그리고 불을 끄고 나가려는 순간, 아이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악!!!!!!!”

“왜…왜그래?!”

“불 켜! 불! 불!”

불을 켜자 아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거렸다.

“왜. 불 끄면 귀신나올까봐 무서워?”

“아니 아니. 불 끄면… 숨이 막혀….”

“뭐라구?”

불을 끄면 숨이 막힌다…. 그냥, 공포심에 그런 게 아닐까, 엄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오늘은 불 켜놓고 엄마랑 같이 자자.”

엄마는 아이를 눕히고 손으로 식은땀을 닦아냈다. 아이의 뒤통수를 매만지며 고요한 자장가를 불러주다가 엄마도 잠이 들었다.

 

그날 밤,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귀가한 P의 아빠는, P의 방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방 안을 살펴보았다. 아이와 애엄마가 한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있었다.

“이 시간에 자는 애 방에 불은 왜 켜놓은 거야. 전기세 나가게.”

아빠는 방의 불을 끄고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새벽 5시경.

한참 꿈속에서 허우적대던 엄마는 아이가 숨을 못 쉬어 헐떡대는 소리를 듣고는 간신히 잠에서 깼다. 갑자기 아이가 호흡곤란을 일으킨 것이다.

“얘, 왜이래?!”

아이는 숨을 못 쉬어 거의 사색이 되었다. 엄마는 다급한 마음에 방에 불을 켜놓고 안방으로 들어가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아이씨, 왜에에에에.”

“빨리 일어나! 큰일 났어. 애가 숨을 갑자기 못 쉬어!”

“뭐?!”

잠결에 아빠는 흐트러진 정신을 겨우 가다듬고 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의 숨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아아아악!! 어떡해! 방금 전까지 숨을 못 쉬어서 헐떡거렸는데 지금은 숨 멈춘 거 아냐? 당신이 좀 어떻게 해봐!”

남편은 경황이 없어서 우왕좌왕 하다가, 아이의 눈꺼풀을 열고 눈동자를 살피더니 코 밑으로 손가락을 갖다대보았다.

“어때? 숨 멈춘 거 아니야?! 아오 좀 빨리 어떻게 좀 해보란 말야!”

“아따, 시끄럽네. 아무렇지도 않구만 뭘.”

“아무렇지도 않다고? 정말이야?”

엄마는 아이의 상태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그제서야 안심한 듯 아이를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이힝힝… 뭐야 방금 그건(딸꾹!)…이힝힝힝…(딸꾹!)”

“거참… 당신, 꿈꾼 거 아냐?”

남편의 그 무심한 물음에

“아니야! 애가 진짜로 숨넘어갈 것 마냥 헐떡대면서 얼굴이 창백해지는 게 꼭 죽을 것 같았단말야!!”

라며 버럭 화를 냈다. 퍽! 퍽! 아내는 남편의 팔뚝을 몇 대 후려쳤다. 왠 한밤중에 일어난 소란 때문에 아이는 자다가 눈을 떴다. 우으으응… 뭐야 엄마…

애엄마도 겨우 진정하고 다시 아이를 끌어안고 침대에 누웠다. 이미 아침 해가 점점 밝아지고 부엌에는 새벽 여명이 물들어 있었다. 애엄마에게 있어서는 그날만큼 잠을 이루지 못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8.

그 후로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아이는 거의 ‘문제아’로 낙인이 찍힌 상태였다. 그만큼 해가 거듭될수록 아이와 학부모가 교장실에 불려가는 일도 잦아지게 되었다. P씨 부부도 아이가 계속 문제를 일으키자 전학을 고려해보았다. 주변의 시선에 견디기가 어려운 것도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이 교육도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았기에, 결국 P씨 부부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는 겸 아이도 전학시키기로 결정했다.

 

아이가 처음 학교로 오던 날이었다.

문이 열리고,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안경 쓴 여선생이 들어왔다.

“자, 오늘은 우리 반에 전학생이 한명 와서 소개부터 먼저 하고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겠어요. P야, 들어와.”

문 밖에 서있던 2m 30cm의 아이가 들어오자마자 문 천장에 머리를 꿍 부딪치더니, “이런, 씨팔!!”이라는 육두문자를 외치며 교실 안으로 몸을 구깃구깃 꾸기면서 들어왔다. 아이가 처음부터 한 행동이 반의 분위기를 순간 싸늘하게 식혀버렸다. 당황한 여담임이 말을 더듬으며,

“어… 저기… 어… 아, 자기소개부터 해야지…?”

라고 말하자, 아이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내 이름은 P야. 근데 여긴 왜 이렇게 천장이 낮아? 제기랄.”

이라는 말로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끝내버렸다.

“요… 욕하면 못써 아가야… 저기 빈자리 있는데 저기 앉을까?”

들어올 땐 꽤나 도도하고 엄해보이던 여담임도 아이의 태도와 몸집에 압도당했는지 시종일관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교실에는 무슨 기린 같은 아이 하나가 터벅터벅 걸으며 교실 한복판을 가로질러갔다. 빈자리를 찾아서 앉는데, 아이가 의자에 앉자마자 10초도 안돼서 또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우라질, 의자가 똥구녕에 끼겠네, 왜 이렇게 작은 거야? 책상도 그렇고. 여긴 무슨 스머프 학교야?”

아이의 거침없는 말버릇에 다른 아이들도 여담임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무지 나이에 걸맞지 않은 행동의 연속이었다.

쉬는 시간, 옆자리에 앉은 소심한 여자아이가 가만히 앉아 있다가, P와 우연히 눈길이 마주쳤다.

“아… 안녕…? 하세요?”

“뭘 봐 꼬맹이 년아.”

여자아이는 그 한마디에 자는 척하고 엎드려버렸다.

학교를 전학 와도 P의 문제라면 교사들이 하나같이 혀를 내둘렀다. P는, 소위 말하자면 일진과도 같은 존재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런 자유분방한 환경에서 P는 마음껏 이리저리 활개치고 다녔다. 입만 열면 “여긴 무슨 난쟁이 세상이냐? 애새끼들이 왜 이렇게 쬐그매?!”라며 아이들을 괴롭히질 않나, 수업시간에는 디비져 자고 점심시간에 종 치기 10초 전부터 손가락을 꼽더니, 종 치고 나서 0.0001초도 지나지 않아서 그 육중한 몸을 초스피드로 이동하여 복도를 달리지를 않나, 또 유난히도 키가 작던 아이를 “난쟁이, 똥자루, 스머프.”등등, 온갖 열등감을 불러일으킬만한 단어들을 조합하여 놀리고 때리기를 밥 먹듯이 하질 않나. 하루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서 교장이 P의 엄마를 소환하였다. 교장실 쇼파에는 교장 선생님과 P의 엄마, 그리고 P가 앉아있었다. P는 한 1m는 족히 넘어 보이는 다리를 방정맞게 떨며 앉아있었다. 교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오늘 P의 어머님을 모시고자 한건, 아이가 학교에서 학업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함께 얘기도 나누고, 문제점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해볼까 해서 이렇게 연락을 드린 겁니다.”

“아이가 아직도 학교에서 말썽을 피우나요?”

“어… 음…… 일단 아이가 이 학교에 오던 날부터 좀, 나이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한다는 얘기를 제가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예를 들자면 어떤 행동을 한다는 건가요? 얘야, 다리 떨지 마라. 쇼파 흔들려서 정신없다.”

엄마의 잔소리에 다리떨기를 멈춘 P는 이번에는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보시다시피 아이가 워낙 덩치가 좋아서 말이죠, 보통 아이들보다 체격이 월등히 좋다보니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을 자꾸 괴롭힌다는 거죠.”

교장의 말을 듣더니, 엄마가 P를 보며 정말 그러냐고 물었다. 그러자 손톱을 물어뜯던 P가 말했다.

“애들이 왜 다 키가 개미만한지 모르겠어. 어딜 가도 다 나보다 작던데? 다들 난쟁이 똥자루야. 난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운동도 열심히 하니까 이렇게 쑥쑥 크는데, 다른 애들은 게을러 터져서 그것도 안하나봐. 그러니까 다들 그렇게 키가 작지. 게으름뱅이 꼬맹이 새끼들! 나보다 작은 것들은 다 루저(loser)야. 내가 왕이야!!”

아이가 난데없이 깔깔깔 하고 웃자 교장도 아이엄마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엄마는 아이가 ‘꼬맹이 새끼들!’이라고 말하자 굉장히 당황했고, 교장은 아이가 내뱉은 그 말 자체가 굉장히 어이없었다. 아마도 아이가 쓸데없는 우월감에 젖어서 저런 말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날 대화도 결국 결론 없이 끝나버렸고, 아이엄마는 집에 가는 차에서 욕은 어디서 배워먹은 말버릇이냐며 아이에게 소리를 빽빽 질러댔다. 하지만 아이는 뒷좌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9.

이제 학교도 방학을 했고, 나는 연구실에 죽치고 앉아 이놈의 신기한 ‘생물체’에 대해 연구할 일만 남았어.

도대체 이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체야. 지금은 나이가 만 13세이지만 신장이 4m에 육박하지. 이 거대한 몸 때문에 결국에는 사회에서 고립당하고 말았지. 지금은 어느 수용소에서 특별 감호조치를 받고 있어.

이 녀석이 ‘포유류’냐 ‘식물’이냐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아직 없어. 하지만 한 가지 짚이는 게 있긴 있지. 가족들의 말을 들어보니, ‘어둠’을 굉장히 싫어한다는군. 어둠에 장기간 노출이 되면 호흡곤란을 일으킨다네. 그래서 집에 있으면 거실이든 방이든 항상 불을 켜놓는다고 해.

만약 이 녀석이 ‘식물체’라면, 어둠에 장기간 노출되었을 때 호흡곤란이 일어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아마 광합성 작용이 멈췄을 때 대사 작용이나 신체기능 중 일부가 멈춘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조금 더 심도 있게 연구하기 위해선 이 녀석을 연구실로 데려와야겠는데, 도통 쉬운 일이 아니야. 격리 수용소에서 빼내는 것도 그렇고, 그 놈의 그 엄청난 몸집은 또 어디다 구겨넣을거란 말이지? 하여튼, 내가 참 골 때리는 걸 갖다가 연구를 하는 것 같아. ‘미친 과학자’, 이 말이 내게 가장 어울리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시간 좀 내라 이 자식아. 네 연구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좀 들어보고도 싶고. 아무튼, 시간 나면 연락해라.

 

10.

시간이 가도 녀석의 성장은 끝날 줄 몰랐다. 신장이 3m가 거의 다 되어서야, P의 부모도 더 이상 아이가 학교에 다니기는 힘들겠구나 생각했다.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의 두곱절이나 덩치가 크니, 이런 곳에서 계속 있어봤자 자신의 아이도 다른 아이들도 득이 될 게 없었던 것이다. P의 부모는 아이를 학교에서 자퇴시키고 당분간 집에서 학습지 교육을 시키려 했다. 물론 학습지 교사들도 P의 거대한 몸집에 질겁을 해서 하루만 하고 다음번에는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이는 집에서 동물과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어느 날, 아이가 엄마아빠에게 하소연했다.

“엄마, 아빠. 이 방 천장이 너무 낮아서 밖으로 나가기가 힘들어.”

그럴 만도 했다. 어느새 아이는 일어서면 허리를 약간 숙여야 할 정도로 키가 컸다.

P의 부모는 아이를 위해 집에 천장을 높이는 공사를 했다. 그러나 그 동안 아이가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았으며, 공사를 할 때의 요란한 소음 때문에 위아래옆집 모두가 다 한 번씩 내려와 한바탕 싸움이 나기도 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P씨의 집은 평소보다 더 높은 천장 밑에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빌라나 아파트와 같은 연립주택에서 천장을 파봤자 몇 미터씩 팔수는 없었다. 평소의 천장보다 겨우 0.5m가 높아졌을 뿐이었다. 게다가 문도 위아래 길이가 달라진 게 아니라서 P는 방 밖으로 나갈 때 여전히 허리를 숙여야 했다.

결과적으로는 이 집에서도 살기가 불편해졌다. 하지만 마땅한 돈도 없는 지금, 이사를 간다거나 하는 것은 무리였다.

아이의 키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계속 위로 ‘솟구쳤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P씨 부부는 이제 이 거대한 아이를 집에서 키우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고민한 끝에, 그들은 아이를 병원에 한번 데려가 보기로 결정했다.

병원에서는 아이가 ‘거인비대증’이 아닌데도 성장이 지나치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아이에게 ‘성장억제주사’를 맞게 하였다. 거인비대증에 걸린 사람의 성장 호르몬을 억제하여 더 이상 키가 크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이는 보통 사람들의 머릿수를 몇 개 합쳐놓은 듯 한 엉덩이를 내릴 때마다 주사를 맞기 싫다고 덩치에 맞지 않게 땡깡을 부려댔다.

“싫어! 싫다고! 이 난쟁이 년놈들이 지금 뭐하는 거야! 저리 꺼져, 꺼지라고!”

하지만 땡깡을 부려봤자 소용이 없었다. 그 육중한 몸이 침대 위에서 심하게 요동을 치면 주사를 놓기가 어려우니까 의사들은 아이에게 주사를 놓을 때마다 그를 묶을 연장들을 동원했다. 아이는 주사를 맞을 때마다, 마치 육시를 당하는 것처럼 팔다리가 묶인 채 알 수 없는 메시지가 담긴 신음을 뱉어냈다.

병원에서 그렇게 한 달 동안 아이에게 ‘성장억제주사’를 맞힌 결과, 성장의 폭이 다소 줄었긴 하나 여전히 성장 속도는 빨랐다.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다. P씨 부부는 아이가 그래도 성장이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혼란스러워졌다. 병원 측에서도 아이가 너무 몸집이 커서 마땅히 들어갈 공간도, 편하게 잘 수 있는 기나긴 침대도 갖고 있지 않았다.

아이에게는 있을만한 적당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11.

“그래서 아이가 그 다음에 가게 됐다는 곳이 그 특별 수용소였던 거군요.”

“갈 수 밖에 없었던 거지. 하지만 그곳에서도 키가 무려 4m에 육박하는 인간을 수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거야.”

김교수는 쓴 웃음을 지으며 잔에 담긴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이씨는 계속해서 김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아이는 어떻게 해서 교수님의 연구실에 데려다 놓을 수 있었던 건가요?”

이씨가 김교수의 잔에 소주를 따라 붓자, 김교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 수용소에 내 친구 녀석이 일하고 있는데, 그 녀석이 거기 소장인가 그래. 하여튼 내가 그 친구한테 부탁을 좀 했지. 처음에는 내가 이 아이가 편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볼테니 나에게 맡겨달라고 했어. 그랬더니 그 자식이, ‘아니 왜 좋은데 놔두고 네가 걜 데려다 키우겠다는 거냐.’라고 묻는 거야. 그래서 그냥 사실대로 말했지. 연구 자료로 좀 써야겠다고.”

“그랬더니 뭐래요?”

“뭐, 안된다고 잡아떼데? 아이 부모한테 허락은 받았냐고 하니까 그랬다고 그랬지. 이미 애엄마아빠 쪽은 거의 포기한 것 같더라.”

김교수는 다시 소주잔을 들었다. 술이 오랜만에 들어가서 그런지,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뭐, 부모 측 입장도 그렇고, 그 자식 그거 성격이 워낙 까탈스러워서 말이야. 설득하는데 한참 걸렸네. 이 망할 자식이.”

그렇지만, 결국 그 김교수의 친구라는 사람은 김교수의 설득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계속해서 커나가는데, 그 수용소도 역시 아이를 데려다 놓기에는 적합한 공간이 없었다. 게다가 아이는 자기가 무슨 감옥에라도 갇혔다고 생각했는지, 힘만 생기면 소리를 지르고 벽을 부수려 했다. 의사와 간호사들도, 같은 처지의 수용자들도 하나같이 불편함을 느꼈다. 결국 가면 갈수록 아이의 입지는 좁아지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녀석이 드디어 천장이고 어디고 주먹으로 쳐서 때려부순 거야. 친구 녀석이 그걸 보고는 나에게 연락을 했지.

 

‘아니, 어떻게 된 놈이 키는 멀대 같이 커가지고 이렇게 말썽이야? 야, 네가 뭐 데려가서 삶어먹든 구워먹든 맘대로 해라 그냥. 난 두손 두발 다 들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당장 수용소로 가서 아이의 상태를 확인했지. 마취를 시켰는지 애가 온몸이 결박당한 채로 꿈쩍도 안하더군.

 

‘마취 시키는데 마취제만 한 열통 썼다. 저게 인간이냐? 괴물이지.’

 

뭐,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데려가는 수밖에. 무슨 커다란 나무상자에 녀석을 집어넣고 화물 트럭에 뉘여서 내 연구실에 들여다 놨지.”

 

“그럼 지금 그 아이는 연구실에 있겠네요?”

“응. 근데…”

김교수는 이번에는 자기 잔에 소주를 붓고 들이켰다.

“아~ 이 녀석 때문에 진짜… 골치 아파 죽겠다.”

“왜요? 막 소리 질러요?”

“소리만 지르겠냐.”

김교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소주를 계속해서 들이켰다.

“이놈의 자식, 내가 온전하게 연구실에 두려고 별 지랄을 다했다. 엄청난 크기의 실린더를 하나 제작해서 거기다가 넣는데, 아무래도 키는 멈추지 않고 계속 크니까. 그래서 내 연구실 자체를 아주그냥 개조해버렸지. 돈 엄청 깨졌다, 씨팔.”

그때 이씨는 비로소 김교수의 얼굴에 그어진 몇 개의 주름살이 눈에 띄었다. 왠지 모르게 그 주름살은 더 쭈그러져 있는 듯 한 모양이었다.

“뭐, 아무튼. 지금은 수시로 실린더 앞에 들락거리면서 녀석에 대해 연구하고 있지. 너, 시간되면 연구실 한번 찾아올래? 내가 보여줄게.”

“언제요? 오늘?”

“뭐, 오늘이든 언제든.”

“글쎄요. 시간이 좀 늦었는데….”

“늦긴 뭘 늦어. 아직 11시도 안됐구만. 네 애엄마한텐 오늘 늦는다고 말해.”

 

12.

술기운에 얼굴이 홍조가 된 늙은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실로 손님을 맞이했다. 연구실의 불은 항상 켜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랩탑 컴퓨터와, 첨탑처럼 쌓인 서적들과 논물들이 마구 어질러져 있었다. 한 20평정도 되는, 비교적 넓은 이 연구실에서 단번에 눈에 띄는 건 역시 거인이 들어가 있는 커다란 실린더였다.

“저게 그 아이야.”

늙은 과학자가 말했다. 제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의 유해를 박제해놓은 것 같았다. 저 실린더 안의 거인은 자고 있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늙은 과학자의 제자는 다리 한쪽이 보통 사람 덩치만한 저 거인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탄했다.

“지금은 자고 있는 겁니까?”

“저 녀석은 아홉시만 되면 바로 잠들어버려. 올바른 생활을 하는 착한 어린이지.”

늙은 과학자 김교수는 한쪽 입 꼬리를 슬쩍 들며 코웃음을 쳤다.

실린더 안의 거인은 몸뚱아리 곳곳에 무슨 전선 같은 게 연결된 채 구부정하게 서있었다. 실린더의 폭은 거인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 정도밖에 없을 정도로 좁았다.

“실린더가 조금 좁지 않을까요? 굉장히 답답해 보이는데.”

“시끄러 임마. 저 실린더 하나가 얼만지나 아냐? 뭐 얼마나 더 크게 만들라고. 우리 집 팔아서 저 놈한테 집을 지어주기는 좀 그렇잖냐.”

하긴 그랬다. 저 좁아터진 실리던 하나만 해도 거액의 돈이 들어갔을 것이다. 이 연구실 자체를 이렇게 만드는데도 또 몇 억은 들었겠지.

“하여튼 저거 연구해서 대박 쳐야지 뭐, 별수 있나. 안 그러면 우리 집 생계가 다 갉아 먹히는 꼴이 될 테니까.”

그때, 말하는 소리에 잠에서 깬 거인이 눈을 슬며시 떴다.

“… 뭐야?”

아주 느릿느릿한 속도로 거인이 말했다.

“잠에서 깼나보군. 우리가 떠드는 소리에.”

거인은 좁아터진 유리 실린더 안에서 기지개를 켜더니,

“네 옆에 그 잡것은 또 뭐냐?”

라고 말했다.

“잡것이라니, 이놈의 자식이 말버릇 하고는. 너 몇 살이랬지?”

“닥쳐, 이 꼬맹이 새끼들아! 감히 내가 자고 있는데 깨워?”

갑자기 거인이 몸을 막 흔들어댔다. 거인의 움직임에 땅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좁아터진 공간에서 움직여봤자 소용이 없었다.

“씨발, 이 개 같은 것들! 날 당장 이곳에서 빼줘! 빼달라고!!”

“아따, 저 새끼 또 지랄이네.”

김교수는 연구실의 불을 꺼버렸다. 얼마 안 있으니까 거인이 무섭다고 징징대기 시작했다.

“싫어! 무서워! 아저씨, 아저씨! 제발 불을 켜줘요. 앞으로 다신 욕 안할게. 한번만 살려줘!”

김교수는 다시 연구실의 불을 켰다. 실린더 안의 거인은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아이가 불을 끄면 굉장히 무서워하네요?”

“불을 끄면 광합성이 멈추고 신체기능이 급격히 저하되면서 호흡곤란을 일으켜. 아이에게 빛은 심장과도 같아. 그게 자연적인 빛이든, 인공적인 빛이든.”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너네들, 내가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다 밟아 죽여버릴거야. 이 쥐새끼들! 어디서 조그만한 것들이!”

“또 불 꺼주랴?”

김교수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아이가 발악을 멈추었다.

“넌 네가 덩치가 그렇게 큰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냐? 넌 지금 비정상이야. 이 멍청한 녀석아!”

“닥쳐! 내가 왜 비정상이야? 너희들이 비정상인거 아냐? 우리 엄마는 키가 큰 사람이 무조건 이기는 거라고 했어. 내가 여기에 갇히지만 않았어도 너희 꼬맹이들 따위 다 짓밟아버리는건데! 내가 위너고, 너희들은 다 루저야!”

“무턱대고 키가 큰 게 다 위너냐? 그런데 어쩌지? 넌 지금 거기에 갇혀서 몇 달 동안 아무것도 입에 못 넣고 그러고 있는데? 이미 네가 거기에 갇힌 이상은 우리 ‘루저’들을 이길 수는 없을 텐데?”

김교수와 거인의 언쟁이 날카롭게 펼쳐지고 있었다. 늙은 과학자의 제자인 이씨는 둘의 말싸움을 조용히 관전하고 있었다.

“네가 그 실린더 안에 왜 갇혀있게 됐는지 한번 생각해 봐라. 너는 날 때부터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성장을 했다. 아이들이 130, 140cm가 됐을 때 넌 이미 성인의 몸을 갖게 되었지. 하지만 너는 그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너보다 작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들을 괴롭혔다. 네 부모란 작자들도 참 어리석어. 네가 다른 아이들보다 뭔가 우월하다고 생각하게끔 만든 게 아주 큰 잘못이다. 넌 그 쓰잘데기 없는 우월감 때문에 항상 입에서 ‘난쟁이, 꼬맹이, 쥐새끼’같은 말들을 달고 살았던 거다.”

아이는 김교수의 말을 듣고 있더니, 말 한마디가 끝나자마자 엄마가 보고 싶다며 보챘다.

“울지 마라. 너는 네 엄마를 원망해야 해. 결국 너를 이렇게 쓸데없는 거인이 되도록 만든 건 네 부모가 심어준 우월의식 때문이니까. 알겠냐? 이 식물 같은 자식아!”

김교수가 버럭! 하는 소리에 아이의 울음이 더 커졌다. 이씨는 김교수에게 앞으로 저걸 어떻게 연구할건지 물었다. 그러자 김교수가 말했다.

“뭘 어떻게 해 이놈아. 저놈의 정체가 포유류인지 식물인지 밝히는 게 이 연구의 목적이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잖냐!”

“만약 연구 실패하면요?”

이씨가 그렇게 되묻자, 김교수도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는지 잠시 뜸을 들였다.

“뭐, 안되면 화분으로 키우든가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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