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을 떠올리면 항상 아버지의 주폭으로 인해서 맞거나 집에서 쫒겨나는 것이 일상이었어요.
아주 어렸을 때는 엄마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기억에 엄마는 없었어요.
아버지의 주폭으로 인해 집을 떠나신 거죠.
그리고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의 어린나이인 어느날
그날도 우리 가족은 산속에 있었어요. 집앞의 냇가를 지나서 윗동네로 도망을 간다든지 뒷산으로 도망을 간다든지 그랬거든요. 항상.
할머니, 작은누나, 큰누나, 형.. 이렇게 잠을 자고 눈을 떳을 때 할머니와 큰누나는 없었어요.
할머니와 큰형도 아버지의 주폭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어요.
우리는 아버지의 주폭이 있을 때마다 다른 집을 전전하며 밥을 얻어 먹거나
계절에 나오는 과일등을 서리를 해서 먹으며 일상을 보냈죠.
한 날은 아버지가 설교를 하시는데 졸았나? 그랬는데, 그랬다고 빨래방망이로 맞아서 코피가 나기도 했는데 이건 기억이 생생하네요.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때 엄마가 돌아오셨어요.
장난감.. 학용품.. 과자.. 그리고 가전제품 등을 사가지고 오셨죠.
이때 가져온 가전제품은 아버지가 술에 취하시면 집 밖으로 내동댕이 쳐져 성한 데가 없었죠.
방 문도 다 부러져서 철사로 동여매고 못질하고 해서 엉망진창이었죠.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우리는 계속 그렇게 살았어요.
그래도 엄마가 있었기에 밥은 먹을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비록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초등학교 5학년 눈발이 흩날리던 어느날
아버지가 출근을 하실 때 저는 이렇게 인사를 했어요.
"안녕히 가세요"
왜 그렇게 인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인사를 했던 것만은 기억을 해요.
그리고 그날
아버지의 사고 소식이 전해졌어요.
교통사고로 사망을 해서 종합병원 영안실에 있다는 것이었죠.
우리는 오후에 종합병원으로 갔고,
이때 저는 처음으로 상주가 되었어요.
이 날의 사고로 인해서 할머니가 돌아오셨고
엄마는 다시 집을 떠났어요.
그리고 얼마 후 학교와 선생이 싫어지는 일이 발생했죠.
이때부터 선생에 대한 반감이 생겼던 거 같아요.
저는 책을 보거나 읽고, 또 시를 쓰거나 하는 등, 글과 친했어요.
어떠한 발표를 할 때는 항상 제가 하곤 했죠.
그래서 그날도 선생은 저에게 질문을 했어요.
"여러분들은 살면서 언제가 가장 슬펐어요? 대답 해 볼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이윽고 선생은 저에게 질문을 했죠.
"해준(가명)이가 대답해봐"
"네.."
"해준이는 언제가 가장 슬펐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요"
"언제 돌아가셨는데?"
"몇 달 전에요"
"어떻게 돌아가셨는데?"
"아침에 출근하시다가 교통사고로.."
이때 반은 숙연해졌고 저는 이내 울음이 터져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울었지만
선생은 수업을 계속 진행했죠. 이게 선생한테 처음으로 받은 비참한 충격이었어요.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어요.
이때 저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고자 신문사에 들어갔어요.
근데 신문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들이 다들 노는 애들이었죠.
그래서 그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술과 담배를 하고 집에 안 들어가고 그냥 신문사에서 친구들과 술 마시고 잠을 자거나 했죠.
신문사에 있던 88오토바이를 타고 놀기도 했고요. 이때 처음으로 오토바이를 접했네요.
그렇게 중학교 생활 3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졸업을 하게 되었고
이때 저는 제 인생 설계를 했어요.
'어차피 나는 집에 돈도 없고 나에게 돈을 줄 사람도 없고 내가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한다
그럼 인문계는 필요없고 실업계에 진학을 해 빨리 취업을 나가서 돈을 벌자'
그렇게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며칠 전
또 다시 비보가 날아왔어요.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는데..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었죠.
저는 이렇게 두 번의 상주를 하게 되었고
지인이 얼마 없던 장례는 초라하게 치뤄졌어요.
그리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후
담임선생이 교실에서 가족조사를 했어요.
"아빠 없는 사람 손 들어"
"네"
"엄마 없는 사람 손 들어"
"네"
"둘 다 없는 사람 손 들어"
"네"
"야? 넌 뭔데 계속 손 들어? 장난쳐?"
"아니.. 손 들으라고 해서 손 들었는데 뭐가 잘못 됐어요?"
"그럼 넌 고아냐?"
"네??"
네.. 저는 그렇게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자마자 반 친구들 모두에게 고아라고 공표를 하게 되었어요.
엄마가 돌아가신 일은 몰랐던 친구들도 수근수근 대고.. 그때 창피했던 일은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었어요.
그리고 저는 일찍 취업을 했던 형에게 오토바이를 사달라고 해서 오토바이를 구입한 후
더욱 더 일탈을 했고 공부는 뒷전이었죠.
그렇지만 암기력이 좋아서 시험을 볼 때는 암기과목에 있어서는 매우 높은 점수를 받아서 등수는 항상 상위에 있었어요.
일본어나 영어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고요.
그래서 결국 학교에서는 짤짤이(동전놀음)와 고스톱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학교가 끝나면 오토바이를 타고 선후배들과 놀러 다니기 바빴죠.
이때 과 선배들 중에서 소위 잘 나간다는 선배들은 모두 오토바이를 탔기 때문에 학교 생활은 편하게 했고
없어서는 안 될 친구 한 명을 만나게 되었어요.
이때부터 우리는 1년 365일 중에 360일은 같이 있었죠. 고등학교 생활 2년 반 동안.
고등학교 때의 모든 추억은 이 친구와 공유를 했어요. 물론 지금도 없어서는 안 될 가족보다도 친한 사람이고요.
저는 꿈을 꾸었어요.
실업계 고등학교를 내가 원하는 과에 들어가서 졸업 후 대학교 산업디자인과에 들어가서 디자인 관련쪽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그렇지만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자마자 그 꿈을 모두 버렸죠.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2학기때 취업을 나갔고
저는 이때부터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돈을 집으로 보냈어요.
작은누나는 아버지의 반대로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한 채 취업을 해서 돈을 벌었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작은누나는 저에게 언제나 엄마같은 존재였죠.
작은누나는 결혼을 일찍했어요.
20대 초반에 결혼을 했죠.
왜 그렇게 결혼을 일찍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결혼으로 인해서 작은누나의 인생은 끝없는 내리막으로 치닫게 되었죠..
그렇게 불행했던 결혼은 조카가 3살이 되던 해에 한때 매형이었던 쓰레기 양아치새끼가 집을 나간 후
법원과의 힘겨운 씨름 끝에 이혼으로 결론을 맺었지만
이제 누나는 할머니를 모시며 딸을 데리고 살게 되어 저는 제가 번 돈을 모두 누나에게 보내주게 되었던 것이었어요.
군대는 꼭 가고자 했던 제 꿈은 또 다시 돈과 타협을 하고 취업을 나갔던 회사에서 병역특례를 받았고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병역특례가 끝나자 외국계(일본계) 기업으로 이직을 했어요.
이직을 하기 전 3개월이란 공백이 있었는데
이때 3년 정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졌어요.
서로 20살 중반의 어린 나이였지만 결혼을 전제로 사귀었고
제가 자취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제 자취방으로 놀러 와서 저는 그때 외롭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나마 행복했던 것 같아요.
이 행복도 약 3년만에 깨지며 곧 불행이 되었지만.. '
그녀는 저에게 계속 결혼을 재촉했어요.
하지만 저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로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다가 이윽고 저도 결혼을 결심하고 그녀의 부모님을 만났어요.
기분 좋게 저녁식사를 마친 후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을 때
그녀의 아버님이 말했어요.
"난 네들이 결혼해도 돈을 한 푼도 줄 생각이 없다 네들이 알아서 해라"
그리고 어머님이 말씀하시길..
"나이도 어린데 왜 그렇게 결혼을 서두르냐? 좀 더 천천히 해도 되지 않나?"
제가 말했죠
"지금 할머님의 춘추도 연로하시고 하기 때문에 할머님 살아 계실 때 좋은 모습 보여드리는 게 효도라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그러자 어머님이 말씀 하시길..
"네 인생 네가 사는 거지 뭐하러 할머니를 신경쓰냐?
그리고 지금 네가 벌어놓은 돈이 많냐 집이 있냐 부모가 있냐?"
'아.. 말 참 예쁘게 하시네.. 돈도 없는 고아가 사치를 부렸구나..'
"아.. 네.. 일단 알겠습니다.. 생각을 좀 더 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그 자리가 파하고 나서
여자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맞는 말이기는 한데 내가 기분이 더러워서 아무 얘기도 하고 싶지 않다 다음에 얘기하자"
그 이후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가 저에게 전화로 이별 통보를 했고
저는 그녀에게 말했죠.
"조금 더 시간을 갖고 생각을 해 보자니까 아무 얘기도 없다가 갑자기 이러면 어떻게 하냐?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아니, 됐어. 이제 만날 필요 없어. 그리고 엄마가 그렇게 얘기를 했다고 해도 네가 엄마를 설득 시켰어야지
그렇게 우리집에 연락도 한 번 안 하고 찾아가지도 않고 그러면 돼?"
'아.. 그 부모에 그 자식이구나..
"알았다. 더 할 말 없다. 전화 끊자"
그렇게 우린 연락이 끊어졌고 그녀는 전화번호를 바꾸었는데
얼마 후 황당한 일이 벌어졌어요.
헤어지기 전에 그녀가 제 카드로 현금 서비스를 300만원을 받았더군요.
그 당시에 카드 만들면 사은품 준다는 게 많아서 여친의 권유로 만들었고 저는 그 카드는 사용도 하지 않고 다른 카드만 사용했는데
헤어지고 나서 고지서가 날아오더군요.
'아.. 나 이런 미친X을 봤나.. 집구석으로 쫒아가서 죽여 살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어요.
"누구씨(여친) 아시죠?"
"왜요?"
"그 사람이 돈을 500을 빌렸는데 이번달에 연체 되고 전화번호도 바뀌어서요"
"그런 사람 모릅니다. 이제 나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아.. 나 이런 정신나간X을 봤나 어디가서 뭔 짓을 한 거야??'
'그래.. 에라이 미친X아 내 돈 300 먹고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리고 2달 후 외국계(일본계) 기업에 취직을 하게 되었고
바로 일본으로 1개월간 연수를 떠났어요.
빚은 남았지만 일본에 있는 동안 그녀에 대한 기억은 서서히 잊혀졌죠.
참으로 고마운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4년 후 할머님이 돌아가셨어요..
이렇게 전 3번의 상주를 하게 되었죠.
울다가 실신을 한다는 것을 이때 처음으로 알았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당시에는 눈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었는데..
그렇게 장례를 치루는 3일동안 거의 음식물을 먹지를 못 했어요.
음식물 냄새만 맡아도 구토를 했으니까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장례가 끝난 후에는 구토 증세도 없고 음식도 잘 넘어가더군요.. 사람은 사람인가 보더라고요.
그 후에는 회사에서 차장까지 진급을 했고
술도 즐겼고 여러가지 운동을 즐겼기 때문에 주위에는 사람도 많았어요.
몇 명의 소수 인원에게 회사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했고요.
참 즐거웠던 시간들이었어요.
그러던 2012년 가을..
밤 1시가 다 되던 시각에 형한테서 다급한 전화가 왔어요.
너무 피곤했던지라 처음에는 그냥 받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울리길래 받았더니
"작은누나가 약을 먹고 병원에 실려갔어. 빨리 병원으로 와. 오늘밤을 넘기기 어렵대"
'아.. 이게 무슨 일인가..'
일단은 차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갔어요.
큰누나와 형은 도착 해 있었고.. 작은누나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어요.
그리고 누나는 우리가 다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가 다 모인 얼마 후 세상을 떠났어요.. 영원히..
나에게는 엄마와도 같았던 누나가.. 그렇게..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여자 혼자서 딸을 키운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을 것이며,
딸은 사춘기가 되어 엄마 말도 듣지 않고 밖으로만 돌았으며,
누나는 사기마저 당한 후 심각하게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아 오다가 결국 스스로 세상을 등진 것이었어요.
이렇게 작은누나의 죽음으로 한 번의 상주를 더 겪으며
제 정신은 이때부터 피폐해가기 시작해요..
그리고 작은누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정리할 때 어이 없는 상황은 또 발생 됐어요.
작은누나의 딸이 있으면 해결 될 것이라 생각했던 일들이
조카가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보호자가 있어야 하며
보호자는 누나가 죽으면서 딸의 친권이 친부에게 갔기 때문에 누나에 관련된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선
친권자인 그 쓰레기가 필요하게 된 것이었어요.
16년을 먹여살린 저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경찰서 강력계에 가서 누나에 관련된 사기를 언급하며, 도움을 요청 했으나..
경찰의 대답은 피해자(누나)가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였어요.
'TV에서 보면 이런 거 잘도 해결해 주고 하더니.. 결국 그것도 일부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그 쓰레기의 행방에 대해서 묻자 그것에 대해서는 주소를 알려 주더군요.
결국 쓰레기를 찾아가서 현재의 상황을 얘기한 후 도움을 요청하니 선뜻 다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자신의 딸에 대해서는 친권을 포기 하겠다.
애를 키울 생각도 없고 키울 돈도 없다. 나도 지금 자식이 셋이다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누나에 관련된 것들을 거의 모두 정리를 하고
회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얼마 후 그 쓰레기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친권을 포기하지 못 하겠다. 그리고 애는 내가 키우겠다. 그러니 양육비를 달라"
'이건 또 어디에서 들려오는 개소리인가... 개가 개소리를 내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
막무가내였어요. 도저히 대화도 되지 않았죠.
그래서 결국 조카에 대한 미안함으로 300만원을 보냈죠.
그랬더니 개소리가 멈추더라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공동명의로 되어 있던 누나 소유의 땅에 대한 소유권이 딸에게 가고
딸이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그 소유권이 그 쓰레기에게 갔으며
이제는 그 땅에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그에 대한 땅값을 요구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친권을 포기한다고 했다가 돈 냄새를 맡고 변해버린 거죠.
13년만에 자기 품으로 온 딸을 인질로 삼아서 그 딸을 13년 동안 키워준 저에게 돈을 요구하는 상황이 된 거죠..
또 딸을 어떻게 현혹했는지.. 조카가 저에게 전화해서 돈을 요구 하더군요.
자기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돈이 필요하다. 엄마가 남긴 돈과 땅을 나에게 달라.
이 조카는 또 저에게 문자메시지로 갖가지 욕을 하더군요.
"이러지 마라... 너는 나에게 고마운 것이 아무것도 없냐.. "
"없는데요? 이제 다시는 전화도 하지 마세요. 당신같은 놈이랑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아요"
미친 세상입니다.. 미친 세상.. 옷 사주고.. 밥 사주고.. 선물 사주고.. 용돈 주고.. 자기 엄마한테 생활비를 매달 보내줬던..
집에만 가면 달려와서 나에게 안기던 그 조카가.. 저에게 욕을 합니다..
그 쓰레기에게 가기 전에만 해도 전화 통화하면서 삼촌 사랑해요라고 말하던 녀석이..
이때부터 수면제가 아니면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술을 마셔야 했고 그런 시간이 몇 개월째 지속되며
제 몸과 마음은 심하게 병이 들어 있었습니다.
회사에서는 멍한 상태로 있다가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어김없이 소주를 들고와서 마시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저는 연봉 5천을 받던 회사를 퇴직했고
벌써 1년이 흘렀습니다.
1년동안 알콜중독자와 히키코모리의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냥 이대로 제 의식이 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내일 눈을 뜰 수 없게..
그.. 회사를 이직하고 즐거웠던 시간이 있었을 때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었습니다.
나이는 저보다 1살이 어렸는데 우리부서로 입사했을 때 첫눈에 반했었죠.
귀여운 얼굴과 예쁜 얼굴을 동시에 가진 아이..
그렇게 몇 년간을 대시 했는데 넘어오지 않던 그녀가
어느날 전화로 만나자는 얘기를 했고 저는 서둘러 나가서 그녀를 만났죠.
그렇게 우리는 친구같은 연인같은 사이가 되어 일주일에 3~4번씩 만나며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고 운동도 같이 하며 누가 보더라도 연인같은 사이가 되었죠.
그렇게 1년 정도가 지났을 때,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돌더군요.
그녀가 어느 부서의 누구와 결혼을 한다더라.
상견례도 마쳤다더라.
그렇지만 그녀와 함께 새벽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대리운전을 불러서
함께 그녀 집앞으로 가서 그녀가 잠든 사이 그녀 차의 콘솔박스에 있는 그 남자의 사진을 보고 확신을 하게 되었죠..
그렇게 나는 그녀를 울면서 놓아주었는데 그녀는 우리사이는 연인사이가 아니라 그냥 친구사이였다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미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맞았습니다.
피폐해진 제 상태에서 또 그녀를 매일 같은 사무실에서 본다는 게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회사를 그만 두었죠..
그리고 부하직원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업무 얘기를 하고 전화를 끊을 때 그는 항상
"조만간에 연락 드리고 술 한 잔 사겠습니다"라고 얘기 했죠.
이 부하직원은 두 아이의 아버지이며, 한 사람의 남편입니다.
수십장의 이력서를 검토한 뒤 제가 뽑았습니다.
제가 하던 일에는 익숙하지 않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가르쳤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맛집에 가서 술을 한 잔 하면서 업무 얘기며 개인적인 얘기들을 하며
업무 외적으로 개인적인 친분도 쌓았습니다.
그 직원의 생일, 추석, 설날, 어린이날.. 항상 선물을 챙겨 줬습니다. 애들에게는 책이나 학용품과 문화 상품권을 선물고 줬고
그 직원에게는 백화점 상품권이나 구두 상품권과 한우셋트라든지 선물셋트를
그 직원의 아내에게는 건강식품 등을..
해외 출장 때에도 필수적으로 선물을 챙겨 줬습니다.
그 직원과 술을 마실 때는 항상 제가 계산을 했고..
제가 회를 좋아했기 때문에 고급 일식집도 많이 갔습니다.
그런데 몇 달 동안 연락이 없자
다른 직원들과 술을 마시다가 그 직원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밥 사줘, 선물 사줘, 술 사줘, 일 가르쳐줘 그렇게 했는데 밥 한 번 술 한 번을 안 사고 연락도 없냐?"
다음날 그 얘기를 그 직원에게 같이 술을 마신 직원이 얘기를 했고
그 직원이 저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상국(가명)과장한테 섭섭하다고 했다면서요? 내가 지금 바빠서 술을 마실 시간도 없고 돈도 없고 다른 사람들하고도 술을 안 마시는데
내가 왜 차장님하고 술을 마셔요? 하여간 조만간에 시간될 때 연락 드릴께요. 지금은 시간 없어요'
정말로 이제는 사람도 싫고
이 세상도 싫고
대한민국이 싫습니다.
이제 저도 그만 이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