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자료는 아니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두가 꼭 읽어야 할 자료이기에 올립니다. 문제제기가 있을 시 좋은 글 게시판으로 옮기겠습니다. 이하 [펌] 윤봉길 의사 4/29 의거일을 맞이하며 4월은 식민지 시절 제국주의에 맞선 우리 민족의 독립투쟁에 아주 의미가 있는 달입니다. 우선 상해 임시정부 수립이 4월 11일에 있었습니다. 1919년 3.1 만세 운동 이후 더욱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구심점이 필요함에 따라 애국지사 30여명이 상해에 모여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였습니다. 하지만 현재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은 4월 13일로 되어 있으며 백범기념관에서 열리는 기념식도 13일에 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 받는다고 분명히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임시정부 수립일은 그저 그런 단순한 기념일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탄생한 날이며 일본 제국주의 치하의 힘들고 고단함 속에서도 절대 꺾이지 않는 민족혼을 세계에 당당히 선언한 날입니다. 따라서 4월 13일 날로 잘못 알려진 수립일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또 다른 역사적 사건은 1932년 4월 29일, 김구 선생님이 단장으로 있던 한인애국단 단원인 윤봉길 의사의 역사적 상해 홍구공원(현재 중국에서는 노신공원이라고 부릅니다. 아Q정전 아시죠?) 의거입니다. 일명 홍구공원 폭탄투척 사건으로 잘 알려진 4월 29일 의거는 당시 제국주의 전쟁에 광분하는 일본 제국주의가 자신의 위세를 더욱 높이고자 상하이(桑海) 홍구(虹口)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겸 전승 축하 기념식에 윤봉길 의사가 단상으로 접근해 가지고 온 폭탄을 던져 당시 상하이 일본 거류민 단장 가와바타와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로카와 대장이 그 자리에서 폭사시켰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 등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 일대 쾌거입니다. 하지만 최근 우연히 인터넷을 보다가 우리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독립운동사의 홍구공원 의거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그냥 넘어가면 안될 것 같았습니다. 첫 번째 잘못 알려진 사실은 윤봉길 의사가 던졌다는 도시락 폭탄에 대한 부분입니다. 매헌 윤 의사는 거사 당일 김구선생과 아침을 같이 먹고 상해 병공창의 주임이었던 김홍일장군의 주선으로 마련된 수통 형 폭탄, 도시락 폭탄을 가지고 홍구공원으로 출발했습니다. 수통 형 폭탄은 거사용이었고 도시락 폭탄은 자살용이었습니다. 오전 11시 40분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 윤봉길 의사는 수통 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뺀 후 앞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온 힘을 모아 단상위로 폭탄을 투척하였습니다. 폭탄은 그대로 야촌과 중광의 면전에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얼른 정신을 차려 다른 도시락 폭탄을 꺼내 안전핀을 뽑으려는 순간, 성난 일본군들이 달려들어 그를 쓰러뜨렸던 것입니다. 그 후 모든 기록에 증거물인 도시락 폭탄이 소개되었고 던진 포탄도 자연스럽게 도시락 폭탄으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오류는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다는 장소에 대한 부분입니다. 상해 홍구공원에 가면 한쪽에 매원이라 이름 붙여진 곳에 별도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윤봉길 의사 의거비가 나옵니다. 관리는 중국에서 하는데 의거비를 세우면서 의거 현장이라는 글을 새겨 놓았습니다. 이러한 왜곡은 아마 노신공원이라고 이름을 바뀌어 놓은 이유와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실을 정확히 알려야 할 우리시대의 방관적 태도입니다.
홍구공원 의거비 조선족 현지 가이드들은 바로 의거비를 설명하면서 이곳이 폭탄을 투척했던 곳이라고 설명합니다. 가이드 입장에서 멀리 떨어진 진짜 투척장소(노신의 묘가 있는 곳)까지 가지 않으려는 알팍한 이유로 이러한 왜곡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늘 시간에 쫒기는 관광 일정상 가이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지만 역사적 장소에 대해서는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또 우리라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면 합니다. 세 번째는 투척 후 체포 당하는 당시 사진인데 매우 악의적인 의도로 만들어진 오류입니다. 의거비를 지나 매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2층으로 만든 단정한 건물이 하나 나옵니다. 윤봉길 의사의 호 ‘매헌’을 따서 지어진 ‘매정’ 이란 건물인데 이곳에 가면 여러가지 자료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전시 자료 중 체포 당시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데 1932년 일본 <아사히신문> 5월1일자 호외 전면에 실린 윤봉길 의사의 체포 모습 사진입니다.
지난주 일요일 상해에서 직접 찍어온 따뜻따끈한 사진입니다 ^^ 이 사진은 옷이 멀쩡한 채 중절모를 들고 약간 겁먹은 얼굴의 중년 남성이 윤봉길 의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윤봉길 의사의 모습이 이랬을까요? 당시의 중국 신문들의 기사를 찾아보면 금방 거짓이 탄로 납니다. 이 사진에 대한 왜곡에 대해서는 프레시안 인터넷 신문과 중국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강효백 경희대(국제법무대학원) 교수에 의해 밝혀졌는데 몇 가지 근거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당시 화둥(璜) 지방 최고 권위 지였던 <상하이타임스>의 4월30일자 기사를 살펴보면, 이 신문은 당시 정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폭탄이 터진 후)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는 군중들 사이에 조선 사람 윤봉길이 있었다. 그는 군경들에 의해 구타 당해 쓰러졌다. 주먹, 군화, 몽둥이가 그의 몸을 난타했다. 만일 한 사람이 죽게 된다면 바로 그 조선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곧 그 회색 양복은 갈기갈기 찢겨져 땅에 떨어졌다. 잠시 후 그 한국인은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총검을 가진 군경들이 그가 쓰러져 있는 곳에 비상 경계선을 치고 군중들로부터 그를 차단했다. 군경들이 비상 경계선 안에서 그를 감시하였다. 곧 차 한 대가 나타났다. 그 조선인은 (일본군에 의해) 머리와 다리가 들려 짐짝처럼 통째로 차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5월3일 발행된 <노스 차이나 해럴드>도 마찬가지 상황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폭탄 투척자(윤봉길)의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은 분노하였다. 그들은 그를 붙잡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으며 주먹으로 몰매를 때리고 그의 옷을 찢어 내었다…그는 머리에서 허리께까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같은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당시 거의 모든 신문이 공통적으로 집단으로 구타 당해 만신창이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얌전히 두 팔을 잡고 체포하는 사진이라니요. 이왕 조작을 하려면 사진합성으로 얼굴도 비슷하게 했어야지 중년 남성의 사진을 이제 앳된 25살 청년 윤봉길 의사라고 주장하다니.. 일본이 얼마나 모질게 했으면 사진조차 제대로 실을 수 없을 만큼이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윤봉길 순국장면> 그 해 12월 19일 일본 오사카에서 처형 당하는 모습. 일본인들은 애국지사 윤봉길을 죽이는 것도 모자라 시체를 쓰레기 하치장에 던져 방치시키는 만행도 저질렀다. 처형직전 일본인들에게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머지 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 않으며, 대한 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오 ” 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래 사진에서 윤 의사의 얼굴이 이제 나의 할 일을 마쳤다고 생각한 의사의 편안한 미소로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인가? 매헌 윤봉길 의사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는 신동으로 불리만큼 머리가 비상해다고 합니다. 덕산보통학교와 오치서숙에서 공부하였고 19세 때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20세 때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했으며, 22세 때 월진회를 조직, 농촌운동을 정열적으로 전개하였습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 때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1년 김구선생의 한인애국단에 가입 하였습니다.
작년 여름 수덕사에서 돌아오던 중 찍었던 윤봉길 의사의 사당 충의사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는 당시 침체의 늪에 빠진 우리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 놓았습니다. 만주사변·상해사변으로 방황하던 중국에 살던 동포들과 한국에서 온갖 고초를 겪고 있던 조선 민중에게 상해의 임시정부와· 해외의 독립운동 지사들이 아직도 건재함을 알게 하였습니다. 국민 정부의 장개석 주석은「중국의 백만 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의사가 능히 해냈으니 장하도다.」라고 말하면서 김구 단장과 면담을 청하고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적극 지원을 약속하게 되니 만보산사건으로 붕괴된 한· 중 양국 민족간의 연대를 다시 회복하여 강화하고, 중국에서의 한국 민족 독립운동을 가능케 하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거사 당시 그의 나이 25세. 두 아들은 아직 걸음마도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습니다. 그 어린 아이들과 고향의 부모를 두고 어떻게 그리 큰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요? 거사 직전 김구에게 남긴 그의 유서들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 강보에 싸인 두 아들 모순과 담에게 >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한-일간 독도 영유권과 역사인식의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강조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뿐 아니라 우리도 되새겨야 할 문제입니다. 윤봉길 기념사업회 사이트에 윤봉길 유서하나 제대로 적어놓지 못한 채 기념사업회 회장인 이명박 서울시장의 사진과 인사말이 전부인 것을 보며 아직 우리의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윤봉길 의사뿐 아니라 타국의 낯선 땅에서 이름 모를 들꽃으로 산화해간 많은 애국자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후손을 돌봐주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그것이 독도를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며 우리가 역사에 부끄럽지 않는 길입니다.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들 계십시오." -윤봉길 유서 중 동포에게 보내는 글- 여러분은 어떤 답장을 보내시겠습니까? 2006 . 04 . 27 금강안金剛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