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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우리 외할머니 이야기 2 .txt
게시물ID : humorbest_11165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청파동
추천 : 49
조회수 : 2428회
댓글수 : 7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5/09/05 01:01:43
원본글 작성시간 : 2015/09/03 22:34:26
1.
할머니는 38년생이고 나는 88년생이다.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는 정확히 반백년의 세월이 존재한다.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4년 전 그녀의 주민등록증을 보고 나서이다.
 
할머니! 나랑 50살이나 차이 나네? 우와 늙긴 늙었다...”
그래?? 몰라. 나 어쨌든 토끼띠야.”
나는 용띠인데. 근데 무슨 토끼가 풀은 싫어하고 맨날 고기만 먹어?”
“......고기나 한 번 사다주고 말을 해 이년아.”
“.......어제 마늘 햄 먹었잖아... 햄도 고기거든?”
 

 

이렇듯 서로의 사이에 오십 년의 세월이 존재하다보니, 우리가 쓰는 언어는 조금 다르다. 한 번은 할머니가 장터에서 오 천원 짜리 티를 사 입고 왔는데 생각보다 잘 어울리길래 ! 박 여사, 티가 간지 좀 나는데?!”라고 칭찬을 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간지라는 단어를 모르는 할머니는 내게 그 단어의 뜻이 뭐냐고 물었고, 나는 응? 멋지다는 뜻이야.라고 대충 설명을 했다.
 

 그 후 언젠가 안경원에서 큰 맘 먹고 선글라스를 구입한 그녀는, 내 앞에서 안경다리를 올리며 물었다.
 
 
, 나 간지 좀 나냐?”
 

 

 

 

2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같이 티비를 보면서 빨래를 개고 있는데, 뜬금없이 할머니가 내게 아이, 러브, 라며 영어로 말을 걸었다. 갑작스런 고백에 당황했던 나는 수줍게 미 투라고 대답했는데, 할머니는 급서운해 하며 아냐! 유 러브 미라고 해야지!”라며 나를 다그쳤다.
 

아냐~ 할머니 유 러브 미는 너는 나를 사랑 한다라는 뜻이고, 미 투는 나도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내가 한 대답이 맞는 거야~”
하지만 할머니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아이, 러브, 라고 할 땐 , 러브, 라고 대답하는 거라고 가르쳐 주었다며 끝내 아쉬워했다.
그래서 나는 외할아버지가 잘못 가르쳐주었지만 나는 할머니를 사랑하므로 , 러브, 라고 대답할게라며 생색을 냈다.
그녀는 그제야 웃었다.
 

 

 

3.
이렇게 일본어와 영어를 구사하는 일흔 여덟의 그녀이지만, 틀니가 빠지는 순간만큼은 한국말을 해도 내가 잘 못 알아먹는 지경에 이른다. 한 번은 둘이 밥을 먹는데 갑자기 맞은편에서 으이-미 싀브하는 욕지기가 들렸다. 깜짝 놀라서 쳐다보니 할머니의 틀니가 입 밖으로 툭, 빠져 입술에 걸려있었다. 생소하고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나는 아 밥알을 코로 뱉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할 정도로 웃었다. 할머니도 어이가 없었는지 따라 웃었다.
틀니를 움켜쥔 채 웃는 그녀는 엄마보다 친근했고 귀여웠다. 그리고 나는 그 날 저녁, 그녀의 몇 개 남지 않은 이빨이 잘 버텨주기를 기도하며 잠이 들었다.
 

더불어 우리 할머니는 욕도 잘한다. 할머니에게 주로 욕을 먹는 사람들은 나의 구남친들이다. “할머니, 나 남자친구 생겼어!”라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할 때면 할머니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꼭 띠를 물어본다. “걔는 여름 소(여름에 태어난 소 띠)라 일은 좀 덜하겠네.”, “걔는 가을 토끼라 먹을 게 많겠네.”라며 띠 품평회를 한다.
하지만 이런 덕담은 내가 그들과 헤어지는 순간 욕설로 바뀐다.
 

그놈새끼 그거 꼭 기생오라비 같이 생겨서 별로였어. 잊어버려.”
뭐 그런 놈이 다 있다냐? 상놈 자식 같으니, 때려 쳐 그냥. 베레 먹을 놈
 
 
 
한 번은 내가 정말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지고 몇 날 몇 일을 운 적이 있었는데, 그게 안쓰러웠던지, 할머니가 내가 그놈 쫓아가서 허벅지를 물어뜯어줄까?”라고 나를 달랬다. 순간 그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고, 나는 됐어, 할머니. 틀니나 잘 챙겨. 저번처럼 밥 먹다 빠트리지 말고하며 애꿎은 할머니만 놀렸다. 그러자 할머니는, 

생각해보니까, 그 때 내가 족발에 꽂혀서 일주일 내내 그것만 먹었더니 이빨에 족발을 맞았나봐. 그래서 그래...”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제서야 울음을 그치고, 일주일 만에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4.
나는 그런 그녀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녀가 늘 내 옆에 있어주었으면 한다. 사실 그녀는 내게 일상이라서, 그리고 나는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는 가족 중의 누군가를 떠나보낸 적이 없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할아버지 없이 스물 네 해를 버텨온 그녀는 강하니까. 욕도 찰지게 잘하고, 보험금 계산도 빠르고, 한 번 가르쳐준 건 잘 잊어버리지 않으니까. 그렇게 오래오래 정정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의 그녀가 아프기 시작했다. 엄마는 내게 이건 단순히 치과치료나 그녀의 고질병인 팔 다리의 물리치료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할머니가 아프다고.
엄마는 울었고, 나는 멍했다. 결국 삼촌은 알아? 아빠한텐 얘기했어? 외숙모가 뭐래?’라는 사무적인 질문만 되풀이 한 채 엄마와의 전화를 끊고 비로소 크게 울었다. 여름날 소나기가 쏟아지기 직전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뚝뚝.
 
 

5.
라일락을 태우던 그녀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다가 그녀가 할아버지한테 영영 가 버릴까봐 너무 무섭다. 아픈 사람에게 좋은 음식이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담배부터 끊게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에 건망고와 해바라기 씨 아몬드 등을 잔뜩 사서 그녀의 머리맡에 가져다 두었다.
 

할머니 앞으로 담배피우고 싶을 땐 이거 먹어. 그리고 이제 담배 피우지 마.”
그녀는 쿨 하게 이야기한다.
냅 둬, 죽으면 못 피워. 너 내일 생일이지? 점심에 고기나 먹자
아 됐어, 지금 고기가 문제야?”
내가 먹고 싶어서 그래.”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한참 다른 곳을 쳐다보다가, 괜히 틱틱거리며 이야기했다.
아 몰라,.. 그리고 할머니 걱정하지마. 그런 병은 요즘 아무것도 아니래. 괜찮아.
눈도 쳐다보지 못한 채. 그녀의 배를 토닥토닥 거리며.
 
할머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그래.라고 대답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보살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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