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저는 요즘 이 문장을 참 자주 생각합니다. 이 문장은 여러가지로 해석됩니다. 통상 이 말은 인간에 대한 관용을 기억하자라는 뜻으로 여겨지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문장을 부패한 정치인들이나 파렴치한 범죄자들이 자기 변명을 할 때 쓰는 것으로 여겨서 증오하기도 합니다.
제가 요즘 이 문장을 자주 생각하는 것은 세상이 참 팍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꼼꼼하게 따지는 것은 중요한 것이지만 거기에 매몰되면 문제도 많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세상을 흑백론으로 봅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는 식이죠. 어떤 나쁜 말, 나쁜 행동을 한게 사실이냐 아니냐만 따집니다.
그런데 자기일을 자기가 제일 잘 아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자기가 했던 말들과 행동을 다 떠올려 봅시다. 그리고 나서 스스로를 자기 자신에 대한 악플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과거에서 적당히 사실들을 골라 뽑고 약간씩 왜곡도 좀 해봅시다. 그렇게 했을 때 그 악플러의 눈에 스스로가 정말 인간이하의 죽일 놈이 아닌 사람이 세상에 있습니까? 세상의 착한 사람들, 훌룡한 정치가들 빼고는 그런 사람 없을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과대평가한 겁니다. 제가 보기엔 착한 사람들일 수록 자책감이 더 큽니다. 본래 효자가 부모에게 더 잘하지 못한 것을 더 미안해 하는 법입니다. 김대중도 노무현도 문재인도 아마 그렇게 하면 본인들을 포함해서 인간이하의 죽일놈이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하실 겁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 비판하는데 정말 목숨을 걸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게 좀 신기합니다. 본인들은 정말 그렇게 완벽한가 싶어서 그렇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증오에 가득찹니까? 그건 혹시 그냥 분노조절장애같은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지적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증오와 투쟁도 있기 때문입니다. 일제때 독립운동했던 분들이나 20세기에 민주화 운동했던 분들 그리고 박근혜와 이명박에 대한 증오와 반대투쟁을 했던 분들에게도 우리는 같은 말을 던질 수 있을 것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라는 문장에서 시작해서 일제가 저지른 전쟁범죄나 독재정권의 죄악, 박근혜나 이명박같은 대통령의 문제까지 다 관용의 대상이 되는 것같기 때문에 단순하게 관용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다른 사람 비판하는데 정말 목숨거는 거처럼 열심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고 있거나 생명을 위협하는 독재에 항거하고 있는 것같은 태도를 너무 쉽게 취합니다. 자유한국당 사람들처럼 자신들이 정치적 핍박을 받고 있다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그리고 문재인 정권같은 민주적 정권이 서면 갑자기 극한 투쟁에 나서면서 비장한 분위기 풍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얼마전에는 과격 페미니스트 시위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시위는 국민의 권리입니다만 문제는 이 사람들이 권위주의정부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와서 경찰이나 대통령을 쉽사리 모욕하는 말들을 하거나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를 마구 한다는 것이었죠. 지금의 경찰이나 대통령에 그렇게 분노할 것같으면 권위주의 정부때 숨을 어떻게 쉬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비장미에는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결국 제가 했던 말은 관용은 꼭 필요하지만 관용에는 또한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지극히 당연해 보이고 간단한 말인데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관용의 기준이 간단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언제 분노해야 할지에 대해서 언제 관용적이어야할지에 대해서 명확한 기준을 가질 수 있을텐데요.
관용의 한가지 문제는 그것이 관점과 문맥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겁니다. 흙벽돌을 쌓아서 낮은 담장을 만들고자 한다면 몇센치의 오차도 큰 문제가 안됩니다. 하지만 항공기 부품을 만들 때는 1밀리 오차도 생사가 오고가는 일이 되겠죠.
예전에 버스운전사가 불과 몇천원을 돈통에서 훔쳤다고 해고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그건 당연하고 법은 법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런 일에 엄격해야 사회가 올바로 돌아간다라고 주장하는 쪽이었습니다. 그건 너무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3천억 해먹은 사람들은 무죄로 돌아다니고 3천원 횡령한 사람은 해고당하는 것은 무전유죄냐는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문제의 버스운전사는 노조지도자로 회사측이 일부러 자세히 사찰하여 뭐든지 이유를 찾아 해고하고 싶었던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런 쪽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조직이 개인을 괴롭히는 방식이란게 너무 뻔했던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규칙은 규칙이고 성추행은 성추행이고 폭언은 폭언이다라는 식으로 시비를 따져서 기계적으로 처벌을 하자고 하지만 사실 그런 식으로 해서 피해입는건 거의 거의 대부분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그렇죠. 우리나라는 법은 엄격합니다. 그리고 그 법은 사회적 약자들에게만 엄격합니다. 이거 모르는 사람있습니까? 그러니 법은 법이다같은 논리에 매몰되면 결국 약한 사람들 옭아매는 일에만 매진하면서 사회정의를 추진한다는 식이 되는 겁니다. 법은 법이다 논리를 펴면 펼수록 깨끗한 사람들이 잡혀가고 부패한 재벌이나 정치인들은 더 잘사는 일을 보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법을 무시하고 절차를 무시하면 사회가 망하겠죠. 그래서 현실에서 고민이 많은 겁니다.
또 한 사람을 죽여서 천사람을 살린 사람은 천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였다고 주장하면 옳은 일을 한게 될까요? 그 사람이 내 부모님이나 자식이라도 그렇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정의는 어떤 사회적 테두리를 염두에 두고 말하냐에 따라 자꾸 뒤집어 집니다. 정의의 개념이 바뀌는데 관용의 범위가 안바뀔리가 없지요. 이래서 FTA를 찬성하면 나쁜 사람이다라던가 북한과 협력하면 나쁜 사람이다같은 상황판단에는 문제가 많은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설거지 잘하고 아내에게 다정한 남자는 정치가로서도 좋은 사람으로 판단합니다. 만나보니 좋은 사람이더라는 식이죠. 김기춘이나 우병우도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상황이 있습니다. 박근혜나 전두환도 그렇습니다. 관용의 범위를 생각할 때 공적인 범위인지 사적인 범위인지를 혼동하면 엉망이 됩니다. 밥한번 먹고 호형호제하면 갑자기 독재의 수호자가 될 수도 있는거죠.
일관성의 문제도 있습니다. 제가 20년전에 나쁜 짓을 했다고 해봅시다. 지금의 저는 20년 전의 나와 같은 사람이니까 그 책임을 지는 것이 옳을까요? 물론 짧은 답은 그렇다입니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20년만에 잡히면 벌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치판을 보고 있으면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말이 절대적 법칙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대개 옳다는 말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은 누구나 박지원이 민주당 사람은 아니지만 친문재인 인사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노무현을 탄핵할 때 박지원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지난 대선때 문재인 욕을 제일 많이 하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지금의 민주당에도 노무현을 탄핵하던 때의 민주당 인사들도 있지요. 저같은 노무현 지지자는 그런 생각하면 그래도 민주당이 이기기를 바란다같은 말 하기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 심상정은 노무현정권을 실패한 정권으로 말합니다. 저는 그때의 진보정당이 보였던 행태에 화가 나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들으면 정의당도 미워집니다. 하지만 요즘 상황에서 정의당을 버리는 것이 문재인과 민주주의에 도움이 될까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유시민도 개혁당 문닫을 때의 일로 깊은 원한을 샀던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유시민 계속 미워해야 할까요?
문재인은 노무현 장례식에서도 이명박에게 예를 갖췄고 김대중은 김종필과 연합해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노무현이 연정 이야기할 때 흥분한 사람 많지만 개인적으로 괴로움을 당했던 것으로 생각하면 노무현 만큼 그런 거 안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박원순도 재벌을 비판하던 처지면서 아름다운 재단할 때는 재벌에게 기부받아서 그 돈으로 사업한다고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박원순은 재벌문제도 그렇게 흑백론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라고 했지요. 삼성이나 이씨 가문은 악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좋은 목표를 위해 나쁜 사람하고도 손잡자 이런 말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선악이 없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쉽게 쉽게 세상에 줄을 죽죽 그어서 착한 사람, 나쁜 사람 구분해서 되는 일이 없다는 겁니다. 사춘기 학생이 뭔가에 삐져서 부모를 미워할 때 보면 본인의 관점에서는 부모를 원망할 충분한 이유가 있지만 적어도 나이든 사람이 보면 배은망덕이기 쉽습니다. 미친 것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도 유한한 존재지만 불완전한 사람들과 불완전한 조직들과 같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으로 대화를 합니다. 같은 사회적 범주를 바라보면서 줄 것을 주고 받을 것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이런 고민이나 노력을 부패나 변명으로만 여기면 우리는 노무현 죽이기를 또한번 반복하게 됩니다. 실제로 얼마전에 노회찬의원도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관용의 범주가 모두에게 같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걸 관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참 팍팍한 것같은 것도 참 싫습니다. 그래서 고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처음의 문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