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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전후한 일본의 대외 무역 관계를 짦게 적어보겠습니다.
게시물ID : history_111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5
조회수 : 113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8/17 19:35:36
글은 휴대폰으로 작성했었던 원 글의 사정상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경어를 생략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양해 부탁드립니다.


당시 일본에 있어 가장 큰 무역 관계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명나라이다, 그러나 그 것은 통상적인 조공 무역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띄고 있다.

일본과 명나라의 공적무역은 대명회전에 따르자면 일본은 10년에 한번 명나라와 조공의 형태를 갖춘 무역을 할수있었는데 감합부라는 일종의 장부를 통해 상품과 그 양을 정하여 거래를 하는 이른바 감합무역이다.

당연히 이런 양상은 큰 문제를 안고 있다, 

내수 경제 체제가 될수 없는 환경속에서 1560년 경부터 이미 왜구들의 후유증과 더불어 급성장한 일본의 은을 소화할 시장을 가지지 못한 조선은 보호주의 무역체제에 가까운 형태로 공적 무역의 창구를 닫기 시작하였기에 중국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높을수 밖에 없었지만 감합무역을 지속하자니 너무나 횟수가 적을뿐더러 그 들의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외교관을 볼때 책봉을 받거나 중화질서에 편입되는 것은 거북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불편한것은 명나라도 마찬가지로 정해진 수량을 어기는 것은 애교이고 툭하면 기간을 앞당겨 불쑥찾아오기 일쑤이며 특히나 왜구의 문제는 아무리 사탕을 물리고 겁박을 줘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왜구가 왜의 해적만을 일컫는 말이 아닌것은 그 들도 알고는 있었으나 자국의 여론적인 문제와 더불어 무역 및 국가간 외교 관계까지 이용하는 행위는 간과할수없었다.

다만 공적인 상황은 이렇지만 일단은 사람 사는 동네인 만큼 무역은 존재하였다.

언제나 높은 위험에는 높은 이득이 따르는 법이고 이는 옛날이라고 다를건 없다.

그랬기에 많은 복건성과 절강성 출신 상인들은 류쿠와 히라도를 중심으로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전국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규슈 지역의 다이묘들은 밀무역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이 와중에 왜구의 난립을 사유로 결국 내려진 조치가 감합무역 중단 및 공식적 관계 단절이다.

이는 이후에 임진왜란의 요구조건이 되었을 정도로 당시 일본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말 그대로 국가의 가장 중요하고 큰 무역로가 단절된 것으로 국가 경제를 뿌리까지 뒤흔드는 사태인것이다.

공식적 무역인 감합무역의 단절은 물론이고 해안가의 모든 일본인을 왜구로 간주하여 그 자리에서 이유 불문하고 참수한다는 정책은 비공식적으로 행하여지던 민간 무역까지 완벽하게 두절 시켜버리는 조치이니 더 말할것도 없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국가 부도 사태에 준하는 상황에 봉착한 셈인데 이 때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준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포르투칼이다.

동남아시아를 비릇하여 남중국해에서 익히 좋은 모습으로도 그렇지 못한 모습으로도 여러 차례 마주친바 있는 이 들의 관계는 명나라의 관계 단절로 급속하게 가까워지는데 마카오에서 시의회를 구성할정도로 뿌리깊게 자리잡았던 이 들에게 일본은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 들의 일본, 중국 그리고 말라카와 고아를 잇는 무역로는 네덜란드의 대두와 일본의 기독교 금지령이 내려진 때까지 이어지는데 이는 먼 훗날의 일일따름이고 작금의 현실에서는 양국 모두에 여러모로 큰 이득을 안겨주었다.

특히나 포르투칼은 고아와 말라카에서 커미션과 입항세 정도밖에 거두지 않았기에 이 무역로는 많은 민간 상인들에게 큰 이득을 안겨줄수 있었다, 

이 들의 무역루트를 따라 그 과정을 보면 고아에서 인도산 면직물과 와인, 유리제품, 크리스탈, 유럽산 탁상 시계등을 말라카에서 인도네시아산 향료와 캄포르, 침향목등과 거래를 한뒤에 마카오에서 중국산 실크, 도자기, 금, 사향등으로 거래하고 다시 일본에서 은과 금, 구리, 칠기, 스크린, 칼, 무구류, 그리고 노예와 교환하고 이를 다시 마카오에서 은을 재료로 금, 동, 상아, 진주, 실크 등을 구입하고 고아로 돌아가 인도에 매각하거나 유럽에 판매하여 막대한 이득을 올리는것인데, 우리에게는 마냥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일본에서 노예란 무엇인가 본다면 그 것은 하나를 이야기 한다, 바로 조선인이다.

물론 중국인이나, 다른 국가의 사람들도 있는것은 사실이고 그 것을 부정할수는 없으나, 임진왜란을 말할 것도 없이 왜구의 주요한 수탈지가 어디일까를 생각해본다면 상당수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과 포르투칼의 관계는 이렇듯 사상적이거나 우호적인 관계에서 비릇된 것은 절대 아니다.

포르투칼은 일본의 경제적 위기를 이용하여 시장을 개척한것 뿐이고, 일본은 명나라를 대신할 새로운 무역로와 상대를 얻은것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일본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외교관을 조금이나마 현실로 이끌어낼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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