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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선진당의 이진삼 의원님에 대해 아십니까?
게시물ID : sisa_1119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마시게다
추천 : 1
조회수 : 48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1/08/15 21:02:56
북한군 33명 사살한 이진삼(당시 방첩부대 609특공대장)의 응징보복작전. 1967년 3월 조선노동당 제4기 전원회의.

김일성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는데 총역량을 집중, 무장공비를 전후방으로 침투시켜 민심을 교란하라"는 지령을 전군에 하달."

 

지령 하달 후, 공비의 도발횟수는  

1966년 57건

1967년 118건으로 늘어났으며

 

그 피해 결과로,

21사단 부연대장이 살해당하는 등, 휴전선 인근 아군과 미군의 GP(경계초소)가 수시로 공비의 습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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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9월 초,

군내 최고 실세로 알려진 방첩부대장 윤필용 준장은 서종철 1군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북한 도발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때 방첩대 산하 '609특공대장' 이진삼(당시 31세) 대위가 윤필용 준장과 서종철 1군사령관의 논의가 끝난후 보고했다.

 

이진삼 :  대원들을 이끌고 북한으로 가겠다. 우리만 당하고만 있을 순 없다.

 

윤필용 :  가면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

 

이진삼 :  그래도 응징하겠다.

 

609특공대 본부로 돌아온 이 대위는 곧바로 작전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당시 609특공대는 방첩부대장의 직할부대로 '방첩대의 방첩대'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다.

부대원은 30명 소수 정예. 

특공대장에겐 육군 전 부대에서 대원을 우선 선발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무술 유단자로 구성된 공수부대에서 주로 대원들을 충원했다.

 

 대위는 '응징보복작전'에 투입할 대원들을 고르다가

마침내 북한 지리와 말에 익숙하고 고난도 훈련이 몸에 밴 북한 무장공비 출신들을 활용하기로 했다.

그해 4월부터 7월까지 생포된 공비 가운데 전향의사를 밝힌 15명 중 면밀한 심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6명을 추려냈다.

20대 초중반으로 강원도 정선이나 충북 괴산 등에서 잡힌 공비들이었다.

이 대위는 '남한 전사'로 신분이 바뀐 이들에게 단검 투척 등 특수훈련을 시켰다.

자신의 집에 데려가 밥을 먹이는 등 따뜻하게 대해줬고 훈련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들이 결코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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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y 9월 27일 일몰 직후. 

작전명 : 금성천 작전
어둠이 짙게 깔리자 최전선 육군 모 사단 작전지역에 이 대위 등 북한군 복장을 한 4명의 요원이 나타났다.

각자 북한제 기관총, 수류탄, 탄창 4개(탄알 200발)로 무장했고 비상식량을 챙긴 상태였다.

 

황해도 개풍군 금성천을 따라 북한 지역 내 4㎞까지 잠입.

다음날 오후 4시 지뢰매설을 하러 나온 북한군과 교전 13명 사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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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작전은 10월 14일.

전체 요원 6명 중 3명을 재선발했고 인솔자는 이번에도 이 대위였다.

당초 육군 모 사단에 인접한 북한군 GP를 습격하고 사단장의 동선(動線)을 확인해 사살하려 했으나,

매복 중이던 적군과 조우하면서 주변 지역에 대한 정찰에 만족하고 귀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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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8일 밤 세 번째 작전에 나섰다.

첫 번째 작전에서 큰 공을 세운 대원을 보강하는 등 다시 4명으로 팀을 짰다.

하지만 두 차례의 침투로 북한군의 경계는 대폭 강화돼 있었다.

이임진강을 헤엄쳐 건넜고 낮은 포복으로 휴전선 너머 북한군 GP(경계초소)에 바짝 접근했다.

경계가 소홀해진 새벽 GP를 덮쳤고 기관총을 난사하고 수류탄 8발을 투척.

북한군 20명이 사살됐다.

그러나 작전 직후 모이기로 했던 집결지에 요원 한명이 나타나지 않았다. 치열했던 GP 교전 과정에서 희생됐다.

남은 3명은 더 이상 적지에서 머물지 못하고 부대로 귀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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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작전을 준비하던 이 대위는 더 이상 북한 지역에 침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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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과(戰果)를 보고받은 윤 준장과 육사 선배였던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 중령은

 "더 이상은 안 된다. 진짜 죽는다"고 이 대위를 제지했다.

방첩대 대공처장인 김교련 대령은 일선 전방부대에 '609특공대'가 오면 북한에 못 들어가게 하라고 지시했다.

 

육본 군사연구실  자료

 "'응징보복작전'으로 북괴 무장공비의 도발이 주춤해졌다"

 

이후에도 국내로 침투한 공비사살,  땅굴탐색 작전등 특수전 임무를 수행.

 

"대위 31세 이진삼, (死生觀·사생관): 내 짧은 인생, 숨쉬는 그날까지 영원한 조국을 위해 바칠 것은 오직 목숨뿐!

                        (軍人觀·군인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 군인은 죽을 자격도 없다. 첫째도 임무! 둘째도 임무! 셋째도 임무!"

현재는 자유선진당 의원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위 자료들은 수년 전 기밀문서 보존 연한이 지나면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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