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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이별하기 02: 이사
게시물ID : humorstory_4419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고.
추천 : 5
조회수 : 60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11/07 19: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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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셋. 기숙사에서 임의로 맺어진 인연들이 싫어서, 나는 이사를 결심했다. 


강제로 맺어진 인연 주제에 그들은 너무나도 밸이 없었다. 첫 날부터 내 책상에 있던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쓰는가 하면, 내 책상 위로 물을 엎지른 채 닦지도 않고 있다가 내가 눈을 흘기면 그제서야 “미안하다” 건성으로 말을 하는 그들을 용서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이사를 결심하게 된 건 그들이 삼삼오오 편을 먹고 나를 미워했기 때문이었다. 중은 더러워서 절을 떠났다.


새로 구한 집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3층 집이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던 우리 집은 나에게 흔쾌히 전세를 구해 주었다. 8평 남짓한 방이 무려 6천 5백 만원. 내가 살던 곳에서는 18평 짜리 집을 살 수 있는 가격이었지만, 신촌은 어림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금전적으로는 여전히 부모님께 얹혀 살기에 마음은 무거웠지만, 생애 처음 홀몸 누일 장소를 찾았으니까. 그리고 더 이상 그들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4층 집 중 3층. 301호는 내가 새로 살게 될 공간의 이름이었다. 원래는 사무실로 쓰던 자리라 했다. 4층에 사는 주인집이 살고 있었고, 주인 내외는 신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어쩌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주인집 내외를 마주할 때면, 점잖은 미소로 나를 맞아 주셨다. 나는 그런 주인집이 좋았다.


"301호 살던 학생들은 모두 다 잘됐어.” 어쩌다 주인 어른과 대화를 나눌 때면, 주인 아저씨께서는 흐뭇한 미소로 301호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 주시곤 했다.


내가 봐도 301호에 몸을 누였던 사람들은 모두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맨 처음 이 방을 사용했던 청년은 1년간의 공부 끝에 유명 국내 은행의 행원으로 입사했고, 그로부터 1년 뒤에 신혼 집을 구해 이사를 했다고 했다.


두 번째 301호의 주인은 한 여학생이었는데, 약 1년 반 동안 열심히 공부를 하더니 캐나다로 유학을 갔다. 이 이야기는 두 번에 나눠서 들었는데, 두 번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에서야 이 학생이 제과/제빵, 그러니까 파티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유학을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영어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셔서 영문학으로 유학을 떠난 줄 알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열심히 하더니 끝내 이루더라고.” 사장님은 흐뭇한 표정으로  학생을 회상하셨다.


나는 이런 행운의 집에서 3년을 살았다. 


2년차 계약 연장을 할 시기였다. 주인 아저씨는 나를 조용히 부르시더니 “학생이 참 잘지내주어 고맙고, 살고 싶은 만큼 더 살아요.”라고 말씀하셨다. 추가금 없이 계속 지내라는 뜻 이었다.


이것이 주인 아저씨의 스타일이었다. 생각해보니 첫 계약 때에도 금액적인 부분은 부동산 김 중개인만 떠들었었다. 주인 아저씨는 자신의 집에 ‘세입자’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한번도 손 아래라고 여기신 적이 없으셨다. 때로는 ‘자신의 건물’ 아래 사는 사람들이라 생각하여 한 번쯤 쓴 소리를 하실 법도 한데, 주인집 내외 분들은 한결같이 웃는 얼굴로 나를 이웃 사촌 대하듯 평등하게 대접해 주셨다.


나는 이 집을 사는 3년 동안 행복했는가? 행운이 가득 하였는가? 를 되물었다.

그랬더니 나는 참 행복한 집에서 살았다-고 집이 말해 주었다.


공동체 생활을 벗어나 살게 된 첫 집에서, 나는 참 많은 행복을 누렸다. 생애 처음으로 소개팅을 했던 이대생과의 추억이 먼저 떠올랐다. 그 친구는 연예인 김민정을 똑 닮았고, 나는 김민정을 굉장히 좋아했었다. 그 친구에게 어찌어찌 애프터를 성공하여 한강으로 불꽃놀이를 보러 가던 날. 주인집 아주머니께 보온병을 빌려 그녀와 함께 따뜻한 물을 나눠 마셨던 기억이 났다. 비록 그 친구와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지만, 생애 처음으로 ‘이웃’에게 무언가를 빌려 본 기억을 선사해준 집이 301호였다.


이 집은 과제 때문에 친구들을 불러 함께 밤을 새던 집 이기도 했다. 목동, 분당에서 통학을 하는 친구들에게 우리 집은 '과제의 원탁’ 이었다. 함께 멀티탭 주변에 둘러 앉아 노트북을 끼고 밤을 새다가 엎어저 새우 잠을 자고,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에 장정 세 명이 몸을 낑기며 이를 닦고 부랴부랴 학교로 나서던 추억. 치킨도 먹고, 함께 유투브를 보며 낄낄거리고, 삶에 대하여, 철학, 종교, 정치에 대하여 달라지지도 않을 토론으로 밤을 새기도 했던 곳이다. 두 친구 녀석들은 취직을 해서 더 이상 내 곁에 없지만. 내게 남은 것은 친구들과의 우정, 그리고 301호였다.


집과 내가 쌓은 추억은 이루 말할 것도 없이 많다. 길거리에 나온 ‘가져가세요’ 가구들을 낑낑대며 들고 가져와 리폼을 하기도 했고, (공간이 부족해서 결국 가구는 친구에게 선물했다) 그 해 자취방이 적적하다 느껴 식물을 몇 개 사다가 기르기도 했었다. 어떤 날에는 벌레가 올라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하수구를 막았던 것을 미처 기억하지 못해서 세탁기 주변이 물바다가 되어 진땀을 빼던 기억도 있고, 구두를 손질하기 위해 열심히 닦았는데 구두약 냄새가 빠지지 않아 한겨울에 창문을 열고 30분 동안 발을 동동 구르던 때도 있었다. 처음 혼자 사느라 실수도, 시행착오도 많아 몸은 고단했지만 고단했던 그 순간 마저도 미소짓던 나였다.


이렇듯 301호는 나의 지음들이 시도때도 없이 나를 찾을 수 있었던 장소이기도 했고, 치킨 모임이 벌어지는 야식집이기도 했다. 이 공간은 옛 여자친구와 세상의 눈을 피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던 도피처이기도 했고, 세상에 하나 뿐인 나만의 자유 공간이었다.


물론 이 집을 살면서 항상 즐거웠던 것 만은 아니다. 옛 사랑과 뜻하지 않은 이별을 맞이했을 때. 301호는 그 어느때보다 사무치게 커보였던 공간이었다. 20대 후반, 생애 처음으로 고독과의 독대를 이기지 못한 채, 방 한 구석에 쭈구려 눈물을 훔치던 회피의 공간이던 때도 있었다. 어느 날에는 급작스레 찾아온 불면증에 머리를 싸매며 자리를 빙빙 맴돌던 공간이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누구와도 말을 붙일 수 없는 시간에 깨는 바람에 어둠에게 말을 건네던 공허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3년 간, 301호는 눈을 감을 때에도, 눈을 떴을 때도 내 곁에 있어주었다. 새로운 사랑이 자신의 마음을 수줍게 고백하며 문 틈 사이에 편지를 꽂아 넣고 갔던 공간이 저 문틈이었고, 그 사랑이 떠났음에 가슴을 쥐어짜며 눈물로 얼룩진 몸을 일으켰던 공간도 이 바닥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 301호에 살면서 마음의 뿌리를 내렸었구나. 그리고 이제는 그 마음을 모두 여기 두고 훌쩍 떠나야만 하는 구나. 생각했다.


이제 301호는 나를 마지막 주인으로 허물어 없어질 예정이다. 집과 내가 함께 했던 기억, 추억들. 그리고 301호를 떠난 사람들의 행복 스토리는 올 해가 지나면 재개발이라는 잔해가 되어 건설 폐기물로 저 멀리 옮겨질 것이다. 그때쯤 나는 또 보란 듯이 새로운 공간에 마음의 뿌리를 내리겠지.


집을 계약하기 위해 은행에서 수표를 떼던 날. 행원 누나가 내게 말했다.

"집 계약금이에요?"

나는 "네." 하며 말했다.

"좋으시겠어요." 행원 누나는 말했다.


그 말이 나는 왜 질문처럼 들렸던 것일까.

나는 나도 모르게 "글쎄요. 좋은... 건가요?" 하며 접대용 미소를 띄어 버렸다.


오늘은 새로운 집으로 가려는 설렘보다, 집을 떠난다는 마음이 많이 무겁다.


안녕 나의 첫 집. 301호야.

너를 지난 사람들이 행복했던 것 처럼, 나도 너를 통해 많이 행복할게.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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