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난 것은 순전히 군대에 끌려가기 전 고등학교 때와는 다르게 충실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나만 해도 각종 소설을 읽느라 도서관에 틀어 박혀있었기 때문에 그 흔한 여자 친구 한 번 사귀지 못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말았다. 인섭은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에 지나치게 빠져 있어서 여자 친구는 고사하고 동성 친구조차 변변히 만들지 못하고 졸업 했다며 언젠가 술자리에서 눈물을 쏟으며 이야기 했다. 물론 종훈도 나을게 없었다.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했으나 자신의 신체적 결함 때문에 입학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좌절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고등학교 생활을 마쳤다. 그리고 결국 남들 다가는 군대까지 면제받기에 이르자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모형 총이나 각종 군사 서적들을 구입하다 보니 자연스레 밀리터리 매니아의 길로 빠지고 말았다는, 인기 없는 라디오 프로에나 채택될만한 사연이었다.
우리들은 한국 사회에서 1광년쯤은 도태되고만 찌꺼기들이었다. 유전자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산화해 버리는 비참한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들은 곧 동지가 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찌꺼기들 간에 끈끈한 유대가 생긴 것이었다. 누구의 의견이었는지 지금에 와서는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내친김에 비공식 동아리를 결성했다. 이름 하여 ‘문화 연구 동아리’ 줄여서 문연동. 문연동의 활동 목표는 간단했다. 모여서 각자가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만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는 인터넷 카페를 만들었고 이미 사라진 동아리의 부실을 점거해서 우리들의 아지트로 삼았다.
막상 일을 벌이고 나니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우선 종훈은 군 면제 주제에 항상 군복 비스 무리한 것을 입고 다닌다고 선배들에게 만날 때마다 욕을 들어야 했다. 종훈 본인은 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나나 인섭 까지 남자 선배들과의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인섭은 여자들이 혐오하는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는 남자-지저분하게 얼굴을 뒤덮은 여드름이나 감지 않아 찐 밥처럼 떡이 진 머리등-였기 때문에 역시 나나 종훈 까지 여자 동기나 선배들에게 혐오를 받았다. 충실한 대학 생활 따위는 꿈속의 일이 되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 우리를 ‘덕후들’ 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덕후. 인터넷 사전에서는 ‘21세기 들어 대한민국에 인터넷이 보급되고 난 이후 오타쿠는 오덕후, 오덕, 덕후, 씹덕 등으로도 불리기 시작했으며, 현실에서 스스로 오타쿠라고 하면 인간쓰레기 취급을 당하다 못해 심할 경우에는 과격파들로부터 박멸해야 할 존재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고 정의한다. 사실상 욕이나 다름없는 꼬리표가 붙기에 이르자 아무리 뻔뻔한 우리라도 의기소침해 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욕을 먹어도 싸다고 생각해”
인섭의 말에 나는 발끈했다.
“별달리 범법행위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잖아. 정치나 경제는 고사하고 취직조차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까.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지. 우린 사람들에겐 괴물이나 다름없는 거야”
그날 동아리 방에선 종훈이 스마트 폰으로 게임하는 소리만 하루 종일 울려 퍼졌다.
기말 고사를 앞둔 6월 중순 종훈이 들뜬 얼굴로 동아리 방에 들어왔다. 자신이 미팅을 잡과 친해졌든 데 이번 주 주말에 만나기로 했고 나와 인섭도 같이 았노라, 개선장군처럼 선언했다. 인터넷으로 알게 된 근처 여대생들과 친해졌는 데 같이 가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귀가 솔깃했다. 아무튼 우리는 여름방학이 다되어가는 데도 여자와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숫총각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밀리터리 룩을 즐기는 것 외엔 멀쩡하게 생긴 종훈이나 옷차림은 촌스럽지만 평범하게 생겨먹은 나와는 달리 외양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인섭과 함께 가는 건 그에게도 나와 종훈이에게도 그리고 상대편 여성들에게도 적잖은 고통을 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고 빼놓고 갈 수도 없어 눈치를 보고 있는 데 인섭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안 갈래. 가봤자 재미없을 것 같고 봐야할 애니메이션도 있거든.”
속으로는 안도했지만 그래도 바로 내색을 할 수는 없어 짐짓 화난 얼굴을 했다.
“네가 가지 않으면 나도 안 가지. 어떻게 너만 놔두고 가겠어?”
그저 의례적인 말이었지만 인섭은 내 말을 듣자 새색시처럼 배시시 웃더니 그날은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된다면서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종훈이 온몸을 부들거리면서 째려보자 나는 고개를 창문으로 돌리고 휘파람을 불었다.
약속 장소는 학교 근처의 흔한 프렌차이즈 카페였다. 카페를 들어온 건 20년 인생에 처음이었다. 아직 여자애들은 오지도 않았지만 메뉴를 보자마자 긴장부터 하게 되었다. 카라멜 마끼아또가 도대체 어떤 커피일까 감조차 잡히질 않았다. 우리 셋은 나란히 만만한 아메리카노를 받아 놓곤 경직된 얼굴과 포즈로 여자애들을 기다렸다.
10분 정도 흘렀을까. 드디어 여자애들이 우리 앞에 앉았다. 실제로 여자애들이 나왔다는 사실에 적잖은 감동을 받았다. 인섭과 종훈의 상기된 얼굴을 보니 혹시 저러나 눈물을 흘리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물론 나 역시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능 시험 문제지를 앞에 두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듯이 막상 여자애들을 눈앞에 두고 나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형편없는 결과를 가져온 미팅이 되고 말았다. 아무도 우리의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고 무언가를 질문하는 여자도 없었다. 우리에게 떠도는 평범하지 않은 분위기(덕내)가 그녀들에겐 지나치게 강렬한 탓이었으리라.
미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인섭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연애는 게임하고 비슷한 거 같아.”
“지금 네 놈 미연시 게임 얘기에 장단 맞추고 싶은 마음 없다.”
종훈의 핀잔에도 인섭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 게 아니야. 스코어를 쌓기 위해서는 그 나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야. 물론 과거에는 달랐을 지도 모르지.자연스런 대화로 자신이 누구인지만 보여주면 만사가 잘 풀리는 시절도 분명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좋은 인상으로 남기 위해선, 그리고 연애까지 이어지긴 위해선 숙달된 실력이 필요해. 지금 우리처럼 아무런 대책 없이 저런 자리에 갔다가는 스테이지 1도 클리어 못한는 거지.”
“게다가 우리는 여자에게는 커녕 남자들한테도 좋은 인상을 주진 못하니까”
나까지 거들자. 종훈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래서 뭐야? 결국 우리가 전부 잘못했다는 거야? 내가 볼 때는 너희들의 열등감이 문제야. 단순히 덕질을 한다고 외면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그렇게 자기혐오에 빠져 사니까 너희들이 외톨이인거야.”
그리고 헤어질 때까지 우리는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너절하고 지긋지긋한, 병신같은 하루였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개소리다. 우리는 아마 늙어 죽을 때까지 아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