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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해석중인데 혹시 틀린부분이 있는지 좀 부탁드립니다.
게시물ID : english_1136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존쉬하트
추천 : 0
조회수 : 418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11/10 10:2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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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him, the Koryo unification meant a northward expansion of the values of civilization (that of T`ang-Silla) from the Taedong River (the approximate northern boundary of Silla) to the Yalu; those values assert a higher claim upon him than anything the "barbaric" Manchurian wastelands offered.
 

그에게 고려 통일은 신라의 대략적인 북쪽경계인 대동강부터 압록강까지 당과 신라의 문명의 가치에 대한 북쪽팽창을 의미한다. ; 그러한 가치들은 만주 황무지 야만인이 제안한 어떠한 것보다도 그의 주장이 더 높다는 것을 주장한다.
 

This orientation accorded well with a reluctance, widespread among men of Sung, Liao, and Chin, to acknowledge that Silla had really been replaced, especially by a state whose name invoked the auspices of Koguryo.
 

이러한 성향은 송, , 금의 사람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고, 신라가 특히 고구려의 원조라고 이름이 불리는 국가에 의하여 실제로 대체되었다고 인정하는 주저함과 잘 부합했다.
 

Koryo's own elite, by their stress on an ongoing Silla tradition when dealing with representatives of continental powers, fostered the myth of a Silla still alive and well in the peninsula.
 

신라전통에 대한 대륙 권력의 대표를 다룰 때, 진행 중인 그들의 강조에 의하여 고려의 자체 귀족은 반도에서 신라의 신화는 여전히 살아있고 잘 있다고 조성했다
 

Po-hai was the obvious link between Koguryo and Koryo, and by ignoring Po-hai Kim eliminated any duality or ambiguity regarding Koryo's spiritual origins and the source of its legitimacy.
 

발해는 고구려와 고려 사이에 분명한 관계였다. 그리고 발해를 무시함으로써 김은 고려의 정신적 기원과 그것의 적통의 사료에 관한 어떠한 이중성 또는 모호성을 제거했다.
 

Silla was, in his view, the sole fountainhead.
 

그의 관점에서 신라는 유일한 근원이었다.
 

This attitude is surely reflected in Kim's choice of documents for inclusion in his "Historical Records."
 

그의 역사적 기록에서, 이러한 태도는 포함을 위한 문서의 김의 선택 안에 분명히 반영 되어있다.
 

        

In his biography of Ch'oe Ch'iwon(857-?), a paragon among sinified Silla scholars, he reproduced only one writing from Ch'oe's voluminous literary collection, one in which Ch'oe describes Po-hai as "a gang of bastards left over from Koguryo."
 

최치원에 대한 그의 전기에서, 한화 신라 학자들 사이에 모범인 그는 고구려로부터 남겨진 사생의의 집단으로서 발해를 묘사하는 오직 하나의 글을 최씨가문의 방대한 문학 모음집으로부터 다시 만들었다.
 

       

In Kim's consigning of Manchuria to oblivion one can also see a gesture of comtempt for the Jurchens and the rude empire they had put together on foundations laid by the hated Khitans.
 

김씨의 망각한 만주에 대한 넘김에서 한 사람은 또한 여진족을 위한 그리고 그들이 미움 받은 거란에 의하여 함께 기반을 놓았던 무례한 제국을 위한 경멸의 제스처를 볼 수 있다.
 

Given his background, Kim's attitudes are understandable enough; one can, however, sympathize with later generations of Koreans as they seether with frustration at the spectacle of Injong's court, by its sponsorship of Kim's work, divesting Koryo of even a theoretical claim to Koguryo's continental domains.
 

주어진 그의 배경에서, 김의 태도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인종의 법원 광경에서 좌절과 함께 그들이 분노했다는 것으로서 한국의 후의 시대를 가지고 하나는 강조할 수 있다. 김의 작품에 대한 그의 후원에 의하여 고구려의 대륙 영역에 대한 이론적 주장의 고려를 벗겼다.
 

 

Korea was thus relegated to peninsular status. On the other hand, the verdict of posterity tends to ignore the fact that Kim's ideological sword was double-edged: if Silla was a mirror for Koryo, then T`ang served that function for Sung and Chin.
 

그러므로 한국은 반도의 지위를 격하시켰다. 반면에, 후손의 의견은 만약 신라가 고려를 위한 거울이었다면, 그때 송, 금을 위하여 당이 제공했다는 김의 이념적인 칼이 양날이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The lesson that emerged from Kim's history was that the glory of T`ang was a thing of the past.
 

김의 역사로부터 나타난 그 교훈은 당의 영광은 과거의 것이었다는 것이다.
 

 

It behooved Koryo to look to its survival in a post universalistic world by using its considerable diplomatic skills, with a keen awareness of the distinction between rhetoric and reality.
 

과거의 보편적 세계에서 그것의 생존에 대한 모습을 보는 것은 고려에게 필요하다. 실제와 미사여구 사이에 날카로운 구별에 대한 인식을 갖고 상당한 외교적 기술들을 사용함으로써
 

Chong Chungbu's coup of 1170, which inaugurated the military dictatorship, may perhaps be viewed as a delayed reaction to the fall of the Northern Sung.
 

군부 독재를 취임한 1170년의 정중부의 쿠데타는 북송의 추락에 대한 지체된 행동으로써 아마 보여 졌을지도 모른다.
 

As a role-model for Koryo, Silla had never been very convincing; indeed, as we have seen, it had always given place to the Koguryo persona when important issues were at stake in foreign affairs.
 

고려에 대한 롤 모델로서, 신라는 절대 설득력이 있지 않다; 실제로 우리가 보아왔던 것처럼, 그것은 항상 외국의 사건에서 중요한 쟁점들이 말뚝이 되었을 때 고구려의 모습에 대하여 주어진 장소였다.
 

The dramatic collapse of the old order in 1126 made it plain to all but the die-hard Silla-ists that the T`ang-Silla Gestalt, however idealized in conception(as by Kim Pusik), was simply irrelevant to the twelfth century.
 

1126년에 오랜 질서의 극적 붕괴는 완고한 신라주의외에 모두 그것을 숨김없이 만들었다.
그러나 (김부식에 의한) 이해에서 최적화했던 당-신라 형태는 단순히 12세기에 무관했다.
 

In the ideological dialectic of that century on might regard the nativist movement associated with Myoch`ong (itself a reaction to the "Catastrophe of Ching-k`ang'') as a thesis which elicited a two-pronged anti-thesis: the Samguk Sagi with its sinified (sadae-ist) orientation designed for elite consumption, and the P`yonnyon T`ongnok, which exploited for the benefit of a de-sinified Silla-successionism the same sort of popular cult and lore that had served Myoch`ong so well.
묘청과 관련된 이민 배척주의 운동을 2개의 갈라진 반대 논지를 이끌어낸 논지로서 여길지도 모르는 그 시대의 이상적인 변증법에서 : 엘리트 소비를 위하여 디자인된 한화(사대주의) 기원을 가진 삼국사기, 묘청에게 잘 제공된 그 같은 정류의 대중적 숭배와 전통 비한화적 신라 연쇄주의에 대한 이익을 위하여 이용된 편년통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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