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러하다.
게시물ID : bestofbest_112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차녕이~^^*
추천 : 208
조회수 : 9946회
댓글수 : 34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06/05/01 22:37:57
원본글 작성시간 : 2006/04/30 23:20:35

안중근 (安重根 1879∼1910)
여순형무소에서 순국직전에 찍은 사진 내가 한국의 독립을 되찾고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3년동안 해외에서 모진 고행을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 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노력하여 학문에 힘쓰고 농업, 공업, 상업 등 실업을 일으켜, 나의뜻을 이어 우리나라의 자유 독립을 되찾으면 죽는자 남은 한이 없겠노라.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러하다.
 


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4.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15.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이다.

 

 

안중근 의사 재판 모습 안중근 의사 유언 당시 모습 안중근 의사 손도장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출처 http://cafe.daum.net/oigeykimhoon 의거전 하얼삔에서 지은 안중근 의사의 친필 한말의 교육가·의병장·의사.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1906년 3월에 이사한 평안 남도 진남포에서 석탄 상회를 경영하다가 이를 정리하고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운동을 시작했다. 곧이어 천주교 계열인 남포 돈의학교를 인수했다. 1907년에는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 보상 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 보상 기성회 관서 지부장으로 활동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 신협약의 체결, 군대 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에서 함께 의병 활동을 하던 김기룡, 황병길, 강기순, 유치현, 박봉석, 백낙규, 강두찬, 김백춘, 김춘화, 정원식 등 12명이 모여 단지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 그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하고, 3년 이내에 성사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한다고 맹세했다.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가는 순간 권총을 쏘아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이어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만철 이사 다나카 등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대한 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된 뒤에도‘나는 의병의 참모 중장으로 독립 전쟁을 했고 참모 중장으로서 이토를 죽였으니 이 법정에서 취조받을 의무가 없다’라고 재판을 부정하고 자신을 전쟁 포로로 취급하여 줄 것을 요구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안중근은 한말 계몽 운동 계열의 근대화론에 영향을 받아 계몽 운동에 참여하면서도 일제에 대한 폭력 투쟁, 즉 의병 활동으로 활동의 영역을 넓혀갔다. 그의 사상을 일면이나마 보여 주는 것이 감옥에 있을 때 집필한 <동양평화론>이다. 일제의 침략이 가시화된 1905년 이후 대부분의 계몽 운동자들이 일제에 대해 투항의 모습을 보인 것과 달리 폭력 투쟁으로 나아간 것은 안중근 사상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한 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http://www.yedeok.es.kr/~imjung/data/안중근.htm 안중근 의사의 젊은 시절 안중근 필적 안중근의사 사형 안중근 유족 안중근 동상 안중근 기념관 안중근 가족들 출처 http://kdaq.empas.com/koreandb/history/kpeople/image_list.html?n=4670 BGM S.E.N.S / Like Wind(바람 속에서)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