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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군사 체계
게시물ID : history_1123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12
조회수 : 1685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3/08/20 16:00:21
 
조선 초기의 조선군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확연하게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중앙군은 고려의 군사제도를 바탕으로 십위체제를 유지하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거치며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1457년 세종 3년에 오위도총부 지휘하의 오위제도를 정착시켰습니다, 오위는 중앙을 맡는 의홍위와 좌측을 호위하는 용양위 우측을 맡는 호분위, 앞에서 호위하는 충좌위, 그리고 뒤를 맡는 충무위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 위는 다시 5부로 편성되었으며 각 부마다 서울의 5부와 각 도의 진관군사가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이 오위는 5졸이 모여 1오를 갖추고, 5오가 모여 1대를 다시 5대가 모여 1여를 편성하는 5진법에 의해 편성되었습니다.
 
또다른 중앙군인 금군은 국왕을 호위하는 군대로 오위와는 별개의 조직이며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등으로 비록 그 인원은 적었으나 왕권강화와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결코 소홀히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방군은 평안도와 함경도의 경우는 고려말 이후 이어져 내려온 익군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익군체제란 공민왕 당시 서북면의 국경이나 요충지에 만호부를 두고 그 아래에 몇개의 익을 두는 것으로, 일정한 지역에 이러한 군익을 하나의 군사 단위로 삼은 것으로 1378년 우왕4년에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직은 열 명을 통솔하는 통주, 1백명을 통솔하는 백호, 1천명을 다루는 천호가 획일적인 지휘계통을 유지하였으며 몇개의 천호부가 모여 만호부를 이루었습니다.
 
이 외의 지방에서는 대체로 육수군과, 기선군의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하였습니다, 육수군은 상경하여 수도를 지키는 시위패와 지방의 여러 영과 진에 배비되는 영진군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러한 영진군은 각 도의 병마도절제사와 그 밑의 절제사, 첨절제사가 지휘하였습니다.
 
다른 지방군의 하나인 잡색군은 이 영과 진이라는 것이 주로 해안가의 요충지를 중심으로 설치되는 까닭에 내륙이 텅텅비는데다, 병력 소집이 매우 어려운 까닭에 이를 방비하고 대체하기 위해 향리와 관노 역을 지지 않는 백성등 계층에 상관없이 모든 적정한 나잇대의 백성을 끌어모아 편성한 군사제도입니다.
 
잡색군은 마병과 보병으로 나누어지며 25인이 1대로 편성되어 수령의 지휘하에 참전하도록 되어있으나, But 당연히 평상시에 군사훈련이라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한 까닭에 전투력을 있느니만도 못하여 유사시에 전국적으로 병력을 모을수 있다는 것에만 의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군사제도는 1455년 세조 1년에 진관 체제로 정비되어 전국적으로 내륙 지방에 거진을 설치하고 주위의 여러 읍을 좌 우 중의 3익으로 분속시켜 군익도를 편성하는 한편 군익도체제가 불편한 곳에는 별도로 독진 그러니까 독립진지를 갖추어 합리적인 이원체제로 운영하도록 하였는데, 경국대전을 토대로 사례를 들어본다면 경기도의 주진은 한성이고 광주, 수원, 양주, 장단, 월곶 등이 거진이며 여주는 제진에 속하는 식입니다.
 
아무튼 다시 3년뒤인 1458년 세조 4년에는 행정구역상 도와 혼동하기 쉬운 까닭에 군익도의 조직을 주진과 거진, 진으로 재편하여 행정 편의를 살리면서도 군사 기지로서의 성격을 뚜렷하게 갖추도록 하였습니다.
 
진관체제는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의 주진 아래 첨절제사가 여러 진을 통합 관리하는 몇 개의 거진을 두고, 이 여러 진들의 절제도위와 만호등이 진을 중심으로 스스로 적을 방어하는 책임을 지는 이른바 자전자수 체제를 가지게 되었는데 1464년에는 번잡하게 나누어진 번상군, 영진군, 익군등의 용어들을 정병으로 통합하여 국방체제를 완비할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진관에 속한 정병이 군역과 요역을 함께 지게되면서 온갖 폐단이 속출하자, 포를 내고 군역을 지지 않는 방군 수포로 진관 체제가 변질되면서 병력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왜구나 북방 야인들의 친입을 각 진관의 병력으로는 도저히 커버할수 없게 되어 조정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도내의 모든 병력이 모여 중앙의 장수의 지휘를 받아 적을 몰아낸다는 제승방략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는데 이 제승방략체제는 전쟁이 일어날시에는 많은 군사력을 한번에 동원하여 적을 압도하는 총력방어태세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반대로 후방지역에는 병력이 전무하게 되어 한번 돌파 당하면 끝이라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이일의 상주, 신립의 충주와 같은 사례가 벌어지는 바람에 왜군의 한성 레이스를 막을 길이 없었지요,
 
쉽게 말하자면 진관체제는 본진과 여러개의 작은 멀티가 모여 방어체제를 이루는 것으로 적이 1차 방어선을 돌파하더라도 각 진에서 2차 3차 방어선을 구축하거나 요격이 가능했습니다,
 
반대로 제승방략체제는 멀티 없이 본진으로 승부를 본다고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적이 밀고들어오는 지점에 모든 병력을 끌어모아 배비하는 것으로 지휘관이 무능하거나, 지휘관이 늦게 도착하거나, 적이 우회하거나, 적이 돌파할경우에는 말 그대로 그 지역을 포기해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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