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무슨 강연회에선가 현정부에 대고 쌍욕을 하더만 꼴에 신부라고.. 이번에 사립학교 개정안에 대해 아예 서강대 문 닫게다고 지랄하네요 ㅋㅋ
우선 기사중 일부 ------------------------------------------------------------------------------------- 서강대는 16일 정기 재단이사회를 열어 여당이 추진중인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헌법소원을 내고, 불가피할 경우 학교 폐쇄까지 추진하기로 결의했다고 이 대학 고위관계자가 말했다.
이날 회의에서 박홍 이사장은 ‘사학법 개정안 국회 통과 반대’ ‘사학법 개정안 국회 통과할 경우 헌법소원 및 학교 폐쇄’ 등 대응방안을 의제로 올렸고, 이사 11명과 감사 2명은 이에 이견 없이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 고딩 다닐때 90년대초에는 박홍때문에 나라가 장난 아니였죠 그때 대학생들이 시위 하다가 한명이 맞아 죽었고 그거 때문에 전국에서 데모가 들불처럼 일어나고 진상을 요구하면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그런데 이 박홍이가 주사파 발언을 했는데 이게 뭐냐면 시위를 주사파가 주도 하고 뒤에는 김정일이가 있다는 요지였어요 그 다음은 뻔하듯이 좃선일본은 신났고 그렇게 학생 시위에 치명타를 만들더니 그 다음엔 우리 사회 요지요지에 주사파가 있다고 헷소리를 하고 여기도 주사파 저기도 주사파해서 주사파라는게 유행어가 됐었죠 결국엔 전혀 근거 없는일로 혼자 쌩쑈한거지만 당시 위태했던 수구들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존재였죠 한국의 매카시 박홍 그냥 이 정권이 밉다고해라..쌩쇼하지 말고
박홍은 가톨릭대와 대건 신학대를 거쳐 69년 사제 서품을 받는다. 사제 활동 가운데서도 활발한 사회 활동을 계속 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하자 서강대 학생들과 함께 전태일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다가 연행되기도 했다.
신임 총장 선출을 위한 교수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박홍 신부는 89년 1월 8일 서강대 7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박홍 신부의 별명은 막걸리 총장. 총학생회가 출범할 때는 관례를 깨고 그 자리에 참석해 축사를 한 후 총학생회장과 함께 어깨동무를 한 채 ‘아침이슬’을 부르고 학생들과 술잔을 나누어 ‘막걸리 총장’이란 애칭이 붙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이 할 수 있는 운동권 총장이었으며 적어도 대화가 통하는 민주적인 사제였다.
운명의 91년 5월 8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시위중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비명해 간 이후 이어지던 분신 정국. 이날 오전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당시 재야 단체에서 일하던 한 젊은이가 분신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로부터 네시간 후 박홍 신부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죽음의 블랙리스트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 후 당국은 곧바로 자살 방조 및 배후 조종 세력에 대한 수사에 착수, 김기설 씨의 동료를 구속 수감한다. 피의자 강기훈 씨에게는 "목적을 위해서 동료의 생명까지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좌경혁명 분자로서 비인간적, 반인륜적 성향을 여지없이 드러낸 천인공노할 범죄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 사건 이후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민주를 갈망하던 목소리들은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고 사그라든다. 단순한 사립 대학의 총장이 아니라 사제였던, 더욱이 그 자신이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한 지식인의 말은 그만큼 무게있게 다루어졌다.
결국 그는 사건을 터뜨린다. 94년 7월19일 청와대. 김영삼 대통령과 전국 대학 총장들과의 오찬 자리였다. 박홍은 그 자리에서 “학생 운동권 배후에 사노맹(사회주의노동자동맹)과 사노청(사회주의노동자청년동맹) 김정일이 있다. 그들은 북한 로동신문이나 팩시밀리를 통해 지령을 받는다”고 말했다.
언론은 박홍 신부의 발언 이후 연일 학생운동에 대해 대서특필했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박홍 신부도 날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북한에 초청돼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한국에 돌아와 대학교수가 되었다." "1987년 이후 주사파가 1만5000여 명 이상 배출되었다." "종교계와 언론계 정치권에까지 주사파가 침투했고 일부 야당에 750명 정도가 암약 중이다."
당시 박홍 신부는 마치 안기부를 언론을 통해 배후 조종하는 권력 실세같았다. 언론과 공안 기관들은 당황하며(혹은 열광하며) 뒷수습에 들어갔지만 캐면 캘수록 나오는 것이 없었다. 무엇 하나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말하는 것은 없었다. 구체적인 근거를 묻는 사람 앞에서 그는 곧잘 인권이나 사제의 양심 때문에 밝힐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언론들은 기록하고 있다.
"나는 북한의 돈을 받아 공부한 후 교수가 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지만 당사자의 인권을 위해 이름을 밝힐 수는 없으며 본인이 스스로 밝히기를 바란다." 이런 식이었던 것이다. 어느 어느 분야에 몇명의 주사파가 암약하는지 자신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입으로 밝힐 수는 없다. 그래도 그는 계속 양심적 지식인, 용기있는 지식인의 상징으로 추앙받았다.
그리고 그의 영광 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분루를 삼킨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북한 장학금으로 공부한 교수 발언으로 대학 사회는 냉랭해지고 한국통신 노조 뒤에는 공산당이 있다는 발언으로 적법한 쟁의 행위를 하던 노동자들은 치명타를 입었다. 남한 사회에서 가장 치명적인 '빨갱이'라는 오명을 쓰고.
그리고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들에게 막걸리 총장은 일갈한다.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를 그만두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듬해인 95년 서강대에 입학한 새내기들은 희안한 내용의 문서에 서명했다. "좌경 폭력혁명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였다. 새내기들은 멋모르고 혹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서명을 하고 학교에 제출했지만 이는 두고두고 95학번들 사이에 이야기거리가 됐다.
그 후로도 박홍 신부는 당시의 자신의 행위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수차례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근거도 분명히 제시하지 못하는 주장을 남발하는 사제. 그리고 이를 여과없이, 확인 작업도 없이 대서특필한 언론. 91년 이후 변함없이 남한 내에서 강력한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한 월간지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는 "병자는 사랑해도 병균은 퇴치해야 한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병균은 없애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잡듯이 뒤졌어도 존재했다는 증거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은 그 '병균' 때문에 그는 숱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 셈이다.(신동아 2001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