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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체트 사건으로 본 인권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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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릴케
추천 : 4
조회수 : 52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8/20 21:52:55
군 장성이던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을 고위직에 임명했던 바로 그 정부를 배신하고 무너뜨렸다. 권력을 장악한 뒤엔 무지막지한 인권 탄압을 저질렀다. 말도 안 되는 구실로 학살을 저지르고 반대파를 빨갱이로 몰아 사상 유례없는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 언론과 미디어를 완전히 통제해 자기 이야기로 뉴스를 도배했다. 대다수 국민은 그의 잔인함과 철면피성에 치를 떨었지만, 그래도 그가 경제를 살리고 좌파로부터 나라를 구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있을 정도로 그의 공과를 둘러싼 인식의 격차는 크다. 과거 군부의 수하들은 여태까지 강철과 같은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조폭과 같은 단결력을 자랑한다.

독재만 한 게 아니다. 공금횡령과 수뢰에 직접 연루된 파렴치범이기도 했다. 아내와 자식들, 친인척과 부하들까지 동원해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조성했다. 법망이 좁혀 들자 돈이 한 푼도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고 심지어 치매기가 있어 조사를 받기 어렵다는 이유까지 내세웠다.

정치적으로 독재만 한 게 아니다. 국가원수로서 공금횡령과 수뢰에 직접 연루된 파렴치범이기도 했다. 아내와 자식들, 친인척과 부하들까지 동원해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조성했다. 법망이 좁혀 들자 돈이 한 푼도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고 심지어 치매기가 있어 조사를 받기 어렵다는 이유까지 내세웠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하지 않은가. 칠레의 피노체트 이야기다.(물론 전두환을 상상해도 무방하다!) 다음달 9월11일이면 피노체트가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렸던 쿠데타 발발 40주년이 된다.

바로 며칠 전 칠레에서 주목할 만한 소식이 들려왔다. 피노체트의 비자금 수사를 종결한다는 발표였다. 피노체트는 1973년부터 1990년 사이에 공금유용과 무기 밀수출을 통해 2600만달러나 되는 거액을 착복했다. 그 돈을 레드 폭스라는 코드명으로 125개나 되는 차명 계좌에 분산해 미국 워싱턴시에 본점이 있던 릭스은행에 예치해 두었다. 그런데 2001년 뉴욕에서 9·11 사태가 발생한 뒤 미국 안 은행들에 은닉되어 있던 외국 테러단체들의 자금을 미국 상원이 조사하던 과정에서 피노체트의 비자금이 불거져 나왔다. 이 중 800만달러가 5만달러짜리 수표 다발 형태로 칠레로 재반입된 정황까지 포착되었다.

피노체트는 2006년 말 사망하기 전까지 과거 인권탄압뿐만 아니라 은닉 재산 문제로도 계속 조사를 받고 기소를 당했지만 결국 단 한번도 유죄판결을 받지 않았다. 그의 아내 루시아 이리아르트는 탈세로 두번이나 구속되었고 다섯 자녀들도 공금횡령 등으로 조사를 받았다. 피노체트가 죽은 뒤에도 비자금 문제를 계속 캤지만 돈의 출처를 입증하기 어려워 결국 이번에 사건을 종결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가족과 부하들에 대한 수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 한다. 피노체트는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정치 도살자였다. 그의 유혈통치하에서 고문이나 즉결처형, 강제실종으로 사망했다고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람들만 3197명이나 된다.

피노체트는 인권의 원칙으로 보면 깊이 논의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다. 법적 정의에 따라 처벌해 버리면 간단히 정리될 사건의 책임자였다. 그러나 이렇게 확실한 인권유린과 부정부패의 당사자를 제대로 처벌하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던가. 인권을 둘러싼 정치 때문이었다. 아무리 절대적인 규범으로 인권 원칙이 정해져 있다 해도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결국 정치적 차원의 문제다. 피노체트 사건 역시 정치적 역학 속에서 전개되었고 그 속에서 우여곡절의 경로를 밟아야 했다.

영국 경찰은 피노체트를 즉각 체포하여 가택연금하에 두었다. 전직 국가원수가 외국 땅에서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구속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또한 반인도적 범죄가 어디에서 일어났든, 모든 나라에서 형벌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는 ‘보편적 관할권’ 원칙이 최초로 적용된 사례이기도 했다.

1998년에 일어났던 일보다 이런 점을 더 잘 보여준 사례도 없었다. 그해 10월 피노체트는 종신 상원의원 자격으로 허리 치료를 위해 런던을 방문한다. 피노체트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던 유럽의 인권단체들이 피노체트의 도착 사실을 스페인의 한 판사에게 알렸다. 발타사르 가르손 판사는 피노체트 집권 때 칠레에 거주하던 스페인 시민들에게 가해진 인권유린을 놓고 피노체트를 스페인 법정에 세우기 위해 노력해 왔었다. 스페인 법원은 영국 정부에 피노체트를 스페인으로 보내 달라는 범죄인 인도요청 영장을 보냈다. 그 요청에 따라 영국 경찰은 피노체트를 즉각 체포하여 가택연금하에 두었다. 전직 국가원수가 외국 땅에서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구속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또한 반인도적 범죄가 어디에서 일어났든, 그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이, 모든 나라에서 범죄자에 대해 형벌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는 ‘보편적 관할권’ 원칙이 최초로 적용된 사례이기도 했다.

피노체트 쪽은 이 조처에 대해 영국 정부에 즉각 항의하고 범죄인 인도를 막기 위해 길고 긴 법적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모든 소식은 전세계적인 헤드라인 뉴스가 되었다. 이 사건이 몇 번의 반전을 거치는 동안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우선 인권에 소극적이면서 사건을 정치적으로 접근했던 극우 보수세력의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주도 아래 이들은 피노체트를 즉각 본국으로 보내주라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피노체트의 아들을 영국까지 불러 대중집회를 여는가 하면, 인권단체를 좌파로 몰고 흑색선전을 벌이면서 사건을 음모론으로 몰아갔다. 부자들이 돈을 모아 피노체트의 법적 투쟁을 지원하고 호화로운 거처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세력이 경제적 영역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시민적·정치적 영역에서도 얼마나 반인권적이고 반동적인 존재인지를 여실히 입증한 것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친인권 진영 내에서도 의견이 양분되었다는 사실이다. 인권단체들은 당연히 피노체트가 스페인으로 인도되어 재판받고 처벌되기를 원했다. 법의 지배와 국제인권규범에 따라 처리하면 된다는 원칙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민주세력 중에도 피노체트를 본국으로 보내자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특히 칠레의 진보파에서는 피노체트의 스페인 인도를 우려하는 시각이 많았다. 이제 겨우 민주주의로 이행 중인 칠레의 내정에 결정타가 될 수 있다는 걱정에서였다. 칠레의 대통령 선거운동이 당시 진행 중이던 점도 큰 고려사항이 되었다.

2000년 초 중도좌파 연합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민주인사 리카르도 라고스가 1999년 <포린 폴리시>에 기고한 ‘피노체트 딜레마’라는 글이 특히 주목을 받았다. 그는 칠레 민주정치가 아직 피노체트의 해외 사법처리라는 사태를 견딜 수 있을 만큼 견고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이 사건을 계기로 우파 정치인들과 군부가 다시 궐기할 조짐을 보이는 것을 우려했다. 라고스는 인권의 보편적 가치에 찬성하지만 그것의 실천을 위해서 정치적 상황과 비용을 고려해야 하므로 피노체트가 칠레로 돌아와 국내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햇수로 3년을 끌었던 이 사건은 결국 2000년 3월 피노체트의 칠레 귀국으로 막을 내렸다. 건강이 나빠 법정에 설 수 없다고 했던 피노체트는 산티아고의 공군비행장에 도착하여 군 지도자들의 환영을 받자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 양손을 치켜들기도 했다. 그 뒤 피노체트는 과거 인권유린 혐의로 기소, 불기소, 불기소 번복을 거치며 시들어 갔고 부정축재 혐의로도 기소되었다. 악명 높았던 중앙정보국의 운영에 궁극적 책임을 인정하느냐는 질문에 “사실이 아니라서 기억에 없다. 사실이라 해도 기억에 없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여기서 인권운동의 관점으로 한가지 질문을 할 수 있겠다.

피노체트가 스페인의 법정에서 단죄받지 않고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이 인권운동의 패배를 의미하는가. 단기적으로 피노체트 개인의 처벌이라는 점으로만 보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보편적 관할권 원칙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고, 각국 독재자들 그리고 미국의 키신저나 럼스펠드 같은 전범 혐의자들이 체포 우려 때문에 외국여행을 극도로 조심하게 되었다. 칠레 국내에서도 과거사 문제가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고 많은 군인들을 법정에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칠레군 당국은 피노체트 집권 시의 인권유린 사태에 군 전체가 책임이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자인하기에 이르렀다. 피노체트가 사망한 후 무덤 훼손을 우려해 매장 대신 화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유골을 칠레 내의 어떤 군 시설에도 안치할 수 없다는 결정이 내려지기도 했다. 결국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인권을 향한 진전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인권은 정치적 과정 속에서 비틀거리며 힘겹게 조금씩 전진한다. 간혹 인권운동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 같아도 길게 보면 결코 헛수고한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인권운동가는 현시대의 비관론, 역사적으론 낙관론을 가슴에 품고 산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002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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