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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반포 그 이면의 노력
게시물ID : history_112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6
조회수 : 54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8/21 09:53:47
드라마에서는 명나라와 훈민정음의 제정을 놓고 면전에서 말다툼을 하는 호쾌한 장면이 그려집니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습니다, 현실적으로 국력을 놓고 볼때 명나라에 대하여 조선은 목에 걸린 가시는 될수 있을지언정, 절대 심장을 찌를수 있는 비수는 될수 없습니다.

(사족이지만 많은 이고깽?  시간 이동 역사 소설? 들이 황당하고 무지한것이 바로 그러한 점이지요, 인프라적으로 조선은 분명한 한계가 있고 또 어떠한 경우를 가정한다 할지라도 중국을 정복하기는 커녕, 이기기가 힘들다는, 아니 설사 이긴다 할지라도 그 이후에 발생할 경제적 공황이나 인프라의 붕괴에 따른 수습의 문제와 같은사실은 절대 조명하지 않지요.)

새로운 글자 체계를 구축하여 기존의 한자를 대신한다는 것은 중화의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를 옹립하려는 것으로 볼수 있을만큼 위험한 행동이기에 특히나 조선으로서는 함부로 언성을 높일수도 없고, 드러내놓고 반감을 가질수도 없었지요,

그래서 필요한게 외교적인 술책입니다,


가령 세종은 즉위 6년째인 1424년 9월 2일에 명의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신하의 예를 다한다면서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7일이나 상복을 벗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지신사 곽존중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태조 황제의 유조(遺詔)에, ‘천하 신민은 상복을 입은 지 사흘 만에 벗으라.’ 하신 것은 그것이 주현(州縣)의 이민(吏民)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요, 조정에서는 반드시 그와 같지 아니하리라. 군신(君臣)의 의리가 지극히 무거운 것인지라, 대행 황제의 상복을 나는 차마 사흘 만에 벗지 못하겠고, 또 고례(古禮)에 외정(外庭)에서는 역월(易月)의 제도를 행하였지만, 궁중에서는 삼년상을 실행하였으니, 이제 여러 신하들은 3일 만에 벗지만, 나는 3일 후에 권도(權道)로 흰옷을 입고 정사를 보다가 27일에 이르러 길복(吉服)을 입을 것이니, 근신(近臣)도 역시 마땅히 27일에 벗게 하되, 영의정 유정현·성산 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좌의정 이원(李原)·우의정 유관(柳觀)·대제학 변계량·병조 판서 조말생·이조 판서 허조·예조 판서 신상(申商)·참판 이명덕과 함께 의논하게 하여 아뢰라.” 

하니, 허조·신상·명덕 등이 의논을 올려 말하기를, “주상의 교지가 모두 옳습니다.” 하고, 유정현·이직·이원·유관·변계량·조말생 등은 의논을 올려 말하기를, “27일에 벗는다는 것은 그것이 예전의 예문(禮文)이요, 또 전하께서 인군을 위하시는 정성이 매우 두터우시나, 그러나 태조 고황제의 유조(遺詔)에 ‘천하 신민이 3일 만에 복을 벗으라.’ 하였고 지금 대행 황제의 유조(遺詔)에서도 역시 말씀하기를, ‘중외의 신민이 상복을 입는 예의는 한결같이 고황제의 유제(遺制)에 따르라.’ 하였으니, 시왕(時王)의 제도는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정현 등의 의논을 옳게 여겼으나, 끝내 27일의 제도를 실행하였다.


또한 명나라의 다소 무리한 요구를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지요,


정사를 보았다. 여러 재상(宰相)들이 모두 나갔으나, 이조 판서 허조(許稠)·병조 판서 조말생은 그대로 남았다. 허조가 아뢰기를, “양목탑올(楊木塔兀)은 얼굴은 사람이나 마음은 짐승과 다름이 없으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으니, 한번 격노(激怒)하면 이를 제어하기가 심히 어려울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나라에서는 흉년이 겹쳐서 창고가 텅 비었으니, 혹시 뜻밖의 변이 있으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서는, 지금의 안전을 위해서는 잠정적으로 주보(奏報)를 정지하고 운반에 관한 일은 견제(牽制)하여 봄이 옳겠사오며, 비록 주문(奏聞)하지 않더라도 우리 편에는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지금 이 주문(奏聞)은 늦출 수 없는 것이다.”

(생략)

- 세종 5년 1423년 8월 2일


예조 판서(禮曹判書) 허후(許詡)가 아뢰기를, “중국에서 말 2, 3만 필을 요구하옵는데, 우리 나라에서 그 수량대로 바칠 수 없습니다. 먼저 말이 없다고 아뢰면 반드시 우리가 핑계하여 늦추려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오니, 신은 청하옵건대, 먼저 살찌고 건장한 말 1백 필을 가려 주문사(奏聞使)에게 압경(押領)하여 보내게 하고, 인하여 ‘말이 없어서 수효대로 바칠 수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로부터 운(運)을 나누어 계속하여 바치겠다. ’고 하오면, 명나라에서 우리 나라가 진력(盡力)하여 조판(措辦)하는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생각도 역시 그러하다. 어찌 1백 필 뿐이겠는가. 5백 필을 가져다 먼저 바치도록 하라.” 하였다.
 
- 세종 32년 1450년 1월 17일


이러한 외교적 술책은 지금의 시각으로 볼때는 사대교린이니 뭐니 비판받을수 있으나 당시 명나라 영내의 여진족을 추살하거나, 여진들이 차지했단 4군을 인정받거나, 훈민정음의 반포도 별 마찰 없이 넘어가는 등 당시의 상황으로 볼때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비단 어떠한 문제를 해결할때는 제 3자의 입장에서는 호쾌하고 남자다운? 방법이 멋있어 보일때가 많습니다, 그 것이 미디어 매체일경우에는 일종의 카타르시스까지 안겨주는게 사실이지요,

하지만 비단 그것이 능사가 아닌것은 사실입니다. 특히나 한 나라의 왕으로서 수많은 백성들의 생명줄을 담보로 할 경우에는 말이 필요가 없겠지요.

개인적으로 세종의 가장 뛰어난 능력은 학문적, 기술적, 인적인 측면들 보다는 이러한 외교적인 술책에서 찾고 싶습니다.

달라는 데로 무작정 주기 보다는, 그 우선 순위를 정하여, 때로는 줄여달라고 하거나 없애달라고 하거나 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조정 신료가 다 안된다고 나서도 끝까지 밀어붙이는 등, 주변의 상황 보다는 마치 바둑에서 몇 수 앞의 상황을 보듯 철저하게 당장을 생각한다기 보다는 그 너머를 생각했습니다, 속내야 알수 없었지만 세종은 어쨌거나 분명한 한계를 알고 있었고 그 이상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위험 천만하기 까지한 많은 일들이 무리없이 넘어갈수 있었고 또 그러한 이면의 노력들이 있기에 우리가 아는 이 많은 업적들이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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