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오니 불이 다 꺼져있다. 거실 식탁에서 물 한 잔 마시니 아내가 방문을 열고 나온다. 아들이 두어시간가량 잠투정 끝에 이제 막 잠들었단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말없이 아내를 안아주고, 같이 손발을 씻으며 되지도 않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방에 들어와 아내의 저린 팔목을 주물러주면서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똑바로 자는 자세가 잠이 잘 오질 않는다니, 임신했을 때 습관이 들어서 그렇다니, 아들이 오늘은 어떤 사고를 쳤느니.... 문득 아내의 팔목을 잡고 조악하게나마 안마를 한다. 아내가 마침 팔이 아팠는데 어떻게 알아서 그러느냔 말에, 남편은 원래 아내를 잘 아는거라고 실없이 답한다.
잠이 오질 않는다, 커피를 마신 것도 아닌데 요새 부쩍 그렇다는 말도 덧붙인다. 아내는 졸린 음성으로 응, 응하고 답해준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나와달리 유독 추위에 약한 아내이기에 두 겹의 이불을 고이 덮어주고 눈을 감았다. 시간의 기나긴 흐름이 어지럽게 마음 속을 흔들고 지나간다. 잠시 그 시간들 헤아리다 이내 지쳐 다시 거실로 나왔다.
냉장고에는 며칠 되어 김이 다 빠진 맥주피처가 있었다. 윗찬장을 열어보니 라면 반봉지가 맥아리없이 구석에 앉아있었다. 유통기한 2015. 07. 25까지. 꺼내다말고 다시 구석 어딘가에 던져준 채, 아내가 만들었다는 아들 반찬을 꺼냈다. 닭고기와 고구마를 아기용 시럽과 간장에 버무려 내어 퍽 내 입맛에 맞았다. 나날이 늘어가는 음식솜씨를 스스로 뽐내던 아내의 얼굴과, 그 작은 입을 앙-하고 벌렸다가 오물오물하는 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컵에 맥주를 따랐다. 거품없이 잔을 위태롭게 채웠고, 나는 굳이 입을 갖다 대 후루룩-소리를 내었다. 시원한 청량감이 목구멍을 타고 위장까지 훅 내려온다. 반쪽짜리 맛에 작은 기쁨을 느꼈다. 먹기 좋게 썰은 아내의 사랑과 정성을 한조각씩 씹는다. 맛있다.
그리고 미안하고 무섭다. 미안함은 해를 살라먹는 어둠처럼 밀려오고, 두려움은 숙련된 도둑같이 엄습한다. 오롯이 아들을 위한 마음을 내가 이 한 잔의 술안주로 전락시킨 것에 대한 약간의 자괴감과, 가장으로서 한 가정을 굳건히 책임져야 하는 무게감.
폭력적인 아비와 배우지 못 한 어미에게 길러진, 아니 방임된 탓에 가정의 깊은 의미를 모른 채 덜컥 결혼하게 되어 본의 아니게 아내에게 많은 짐을 지웠다. 아들에게는 보다 나은 아버지가 되려고 부단히 애를 쓴 탓에 다정한 아빠, 잘 놀아주는 아빠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밤이 오면 나는 세상앞에 던져진 한 인간으로 돌아오게 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실로 무거운 일이다. 아무에게도 울 수 없던 한 아이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안절부절하는 것을 확인한다. 나는 그렇게 나를 안아준다.
김이 빠진 맥주가 담긴 컵을 비웠다. 반쪽짜리여도 쌉쌀한 끝맛은 여전하다. 밤은 아직도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