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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암살자들 <BGM>
게시물ID : history_1128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ementist
추천 : 26
조회수 : 3252회
댓글수 : 47개
등록시간 : 2013/08/22 15: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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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과 제목에서 사용된 암살(暗殺)이라는 단어에는 사살(射殺)과
   의거(義擧)의 의미 또한 내포되어있음을 알려드립니다.
 
 
 
1.JPG
 
"오적(五賊)을 살해하려는 사람이 어찌 나 혼자이겠느냐"
 
 
소속: 오적암살단(五賊暗殺團), 자신회(自新會), 사진은 자신회로 좌측부터 이기, 나철, 홍일주, 오기호
성격: 일본이 군대를 대동한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보내 황제가 아닌 대신들에게
         직접 찬반을 묻는 방식으로 억지 체결한 을사늑약에 대해 당시 우리의 주권을 넘기는 데
         찬성했던 을사5적(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이근택)을 처단하고자 결성
 
암살시도: 을사늑약이 있던 1905년 11월 17일 이후 동지들과 을사5적 처단을 계획하던
                37살의 무관학교 생도 기산도는 1차 거사기도가 경무고문 마루야마의 부하에게
                탐지되며 경무청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석방 후 박제순과 권중현을 길거리에서 습격하나 처단에는 실패한 기산도와
                그 동지들은 1906년 2월 16일 밤, 당시 삼엄한 경호가 이루어지고 있던 친일고관
                이근택의 가택 침실에 침입해 10여 군데를 칼로 찌른 뒤 재빨리 현장에서 빠져나오나
                이후 또 다른 의열투쟁에 연루되어 기산도가 체포되며 사건의 전말이 알려지게 된다.
 
                체포된 기산도는 "오적(五賊)을 살해하려는 사람이 어찌 나 혼자이겠느냐?
                탄로 난 것이 그저 한스러울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고
                그렇게 김석항 등 11명과 재판에 회부되어 2년형을 선고받은 뒤 모진 고문을 당한다.
 
                한편 이근택은 1개월여의 치료 끝에 목숨을 건졌으며 기산도는 석방된 후 부상당한 다리를 하고서
                한말의병에 투신하는가 하면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으는 등 일생을 유랑하며 민족운동에 헌신한다.
 
 
                45살의 나철과 오기호를 중심으로 한 자신회(自新會)는 1907년 3월 25일 아침,
                궁궐 앞 길목에서 을사5적을 처단하려 시도하나 행동대원들의 부주의와
                을사5적의 늦은 출타 등으로 인해 권중현만을 권총으로 저격하는 데에 성공.
 
                그러나 여기서 권중현은 운 좋게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이후 일부 가담자들이 검속되자
                나철과 그 동지들은 직접 자수한 뒤 "난신적자(亂臣賊子,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불충한 무리)는 사람마다 베인다."라는 변론을 하며 의거 동기를 밝힌다.
 
                한편 해당 사건과 관련된 30여 명은 최고 10년에서 5년의 유배형을 받았으며
                고종의 특사로 그 해 풀려난 나철은 이후 오기호와 함께 민족독립운동에 헌신.
 
 
 
2.JPG
 
"그를 죽이고 나도 죽는다면 조국 대한의 영광이 될 것이다"
 
 
소속: 장인환(사진 우측), 전명운(사진 좌측)
성격: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데에 도움을 주었던 통감부 외교고문이자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가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라며 친일성명을 발표하자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
 
암살시도: 당시 캘리포니아 이주민으로 막노동자였던 33살의 장인환과 역시 샌프란시스코 이주민으로
                막노동자였던 35살의 전명운은 같은 하와이 이민 1세대로 미주에서 결성된
                항일단체인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에서 활동하던 중 1908년 3월 21일
                스티븐스가 친일성명을 발표하자 둘은 각각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30분, 서로 약속도 없이 같은 마음을 품은 둘은 오클랜드 선창에서
                스티븐스를 기다리던 중 그가 하차하는 순간 먼저 전명운이 권총을 발사하나 불발로 끝나고 만다.
 
                그러자 곧바로 전명운은 스티븐스에게 달려들어 권총 자루로 그의 얼굴을 강타하며 격투를 벌였고
                장인환은 유탄에 어깨 부분을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은 끝에 스티븐스를 저격하는 데에 성공하고는
                "스티븐스는 일본의 보호정치를 도와주었다. 이런 매국노를 죽이지 아니하면 우리나라의 운명은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를 죽이고 나도 죽는다면 조국 대한의 영광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
 
                한편 현장에서 체포된 전명운은 그의 애국심에 감복한 재판관 덕에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사형이 구형되었던 장인환은 교포의 재판후원회와
                변호인들의 도움으로 25년 금고형 판결을 받고는 복역 10년 만에 가석방된다.
 
                이후 평양에서 결혼식을 올린 장인환은 일제의 감시를 못 이겨 홀로 미국으로
                돌아간 뒤 실의와 병고 끝에 55살의 나이에 자살하였으며 로스앤젤레스에서
                결혼식을 올린 전명운은 처를 잃고 생계가 곤란해지자 자식들을 고아원에 맡긴 뒤
                비참한 생활고 끝에 64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3.JPG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소속: 단지회(斷指會)
성격: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처단할 것을 단지(斷指)로
         맹세하여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할 경우 자결을 통해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결심
 
암살시도: 교회 총대(總代), 채표회사(彩票會社) 사장, 석탄상회 경영, 학교경영을 하며
                수완을 발휘하던 안중근은 29살이 되던 해부터 본격적으로 반일운동에 뛰어들어
                대한의군참모중장 및 특바독립대장직을 수행하면서 일본군들과 전투를 벌인다.
 
                이후 31살이 되던 해 3월 2일 러시아령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 엄인섭, 황병길 등
                11명의 동지들과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며 이토히로부미와 이완용의 처단을 계획한다.
 
                그리고 그 해 10월 26일, 회견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 열차가 도착하는
                하얼빈 역에 몰래 잠입 중이던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 회담을 마치고 내리던 순간
                사열을 하던 러시아 장교단과 환영 인파 사이를 뛰어나와 권총을 발사하며 3발을 명중시킨다.
 
                그렇게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데에 성공한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되는 순간까지 "코레아 우라!(러시아 말로 '대한 만세')"를 연호했으며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대한의 독립주권 침탈과 동양 평화의 교란을 자행한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라고 밝힘.
 
                한편 관동도독부지방법원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에게 그의 모친인 조마리아는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항소를 하여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나라를 위해 죽으라."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안중근은 자신의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 죽은 이의 시신을 고향이나
                살던 곳으로 이장하여 장사지내는 것)하지 말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순국한다.
 
 
 
4.JPG
 
"왜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있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소속: 공립협회(共立協會)
성격: 애국 운동 전개, 동족 간의 상부상조, 환난상구(患難相救)
 
암살시도: 15살이던 무렵 미국노동이민사 모집을 통해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학문을 쌓던 이재명은 그즈음 을사늑약 강제 체결이 있자 당시 안창호를 중심으로
                창립되었던 공립협회에 가입하면서 항일 민족운동에 뛰어든다.
 
                그러던 중 매국적 숙청을 결의한 공립협회로부터 그 실행자로 선발된 이재명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을 계획하지만, 그가 당시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는
                융희황제의 곁에 머물자 황제의 안전을 연유로 안창호가 이재명을 만류한다.
 
                이후 계속해서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계획하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있던 이재명은 안중근의 의거 소식을 전해 듣고는 귀국한 뒤
                타겟을 자신이 본래 처단하고자 생각했었던 을사5적의 이완용으로 변경한다.
 
                그렇게 당시 총리대신으로 매국단체인 일진회와 한일합방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 중이던 이완용을 처단하기로 마음먹은 이재명은 21살 무렵 그해 12월 22일
                오전 11시경 군밤장수로 변장하여 종현 천주교당(지금의 명동성당) 문밖에 잠입한다.
 
                여기서 이재명은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했던 이완용이 성당 밖으로 나와
                인력거를 타고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순간 미리 준비한 비수를 들고서 달려들었고
                이에 그를 제지하던 차부를 한칼에 찔러 쓰러뜨린 뒤 이어 이완용의 허리를 찌르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려는 이완용의 어깨 등 3곳을 추가로 찌른 후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던 중 일본경찰에 왼쪽 넓적다리를 찔리며 중상을
                입음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때 이재명은 모여든 구경꾼들에게 담배를 빌린 뒤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유유자적하게 담배를 태웠다고 한다.
 
                한편 서울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던 중 방청석을 향해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라!"라며
                열변을 토해내는가 하면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라고 묻는 일본인 재판장을 향해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 "2000만 민족이다!"라고 고함을 친 이재명은
                후에 사형이 확정되자 "왜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있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서 21살 약관의 나이에 순국한다.

 

 
5.JPG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소속: 대한국노인동맹단(大韓國老人同盟團)
성격: 40세 이상 70세 미만의 노인들로 결성된 단체로 실전에 참여하는 청년 독립투사들 지원이 주요 활동
 
암살시도: 전국적인 3·1운동에도 불구하고 세계열강으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승인받지 못하고
                설상가상으로 그해 5월을 넘기며 점차 소강상태에 빠져들자 위기감을 느낀
                강우규는 당시 일제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식민정책을 변경하고자
                조선총독을 교체하는 것을 보고 새로 임명될 조선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65살이던 강우규는 그해 9월 2일 오후 5시, 부임식을 마치고 막 관저로 떠나는
                사이토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지만, 정무총감인 미즈노와 그밖에 호위 군경,
                취재기자, 총독부 관리 등 37명에 중경상을 입히는 데에 그치고 만다.
 
                여기서 혼비백산하는 군중들 사이로 빠져나온 강우규는 다시금 거사를 계획하나 9월 17일
                자신의 하숙집에서 순사에 의해 붙잡히면서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사형을 언도 받는다.
 
                이후 자신의 폭탄에 휩쓸린 취재기자들에 대해 폭탄의 위력을 몰랐다고 항변한 강우규는
                자신의 아들에게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라는
                말을 남기고서 그해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다.
 
                한편 강우규는 사형집행 당시 감상이 어떠하냐는 일제 검사의 물음에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라는 시를 남긴다.
 
 
 
6.JPG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 한이 없다"
 
 
소속: 의열단(義烈團)
성격: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한다'라는 뜻 아래 조직된 항일비밀결사로
          종래의 미온적이고 온건한 독립운동에서 탈피하여 과격하고 급진적인 폭력투쟁을 목적으로 한다
 
암살시도: 무역에 종사하며 중국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하던 박재혁은 26살 무렵
                의열단에 입단한 뒤 그해 9월 13일 고서(古書)가 담긴 짐 속에 폭탄을 숨겨 부산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튿날 중국인 고서상(古書商) 행세를 하며 평소 중국 고서에 관심이 많던
                부산경찰서 서장 하시모토를 면회한 박재혁은 진기한 고서를 보여주겠다고 말한 뒤
                봇짐을 풀어 폭탄을 꺼내 들고는 일본어로 그를 꾸짖은 후 그대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이에 하시모토는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으로 이송 도중 사망하였으며
                박재혁 역시 당시 두 사람 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지라 폭탄의 파편으로 인해
                오른쪽 무릎뼈에 중상을 입으면서 아수라장이 된 경찰서 현장에서 붙잡히고 만다.
 
                한편 그렇게 체포되어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옥중에서 혹독한 고문과 폭탄으로 인한 상처로 고통을 겪던 박재혁은 면회온 동지 최천택에게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 한이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서
                왜놈 손에 사형당하기 싫다며 단식을 하여 결국 그해 5월 11일 옥사로 인해 순국한다. 
 
 
 
7.JPG
 
"지금 온 겨레가 모두 일어나서 독립을 부르짖는데 어찌 평온하다고 할 수 있는가?
당신은 조선사람이 아닌가?"
 
 
소속: 개인
성격: 협기(俠氣)
암살시도: 20살에 경성공업전습소(京城工業傳習所)를 졸업한 뒤 조선보병대를 거쳐
                 23살이 되던 해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정치과에 입학한 양근환은 어려서부터
                 운동(運動)과 정치에 관심이 많은, 성격이 급해 조금은 다혈질이지만 의협심이 강한 청년이었다.
 
                 그렇게 일본에서 부족한 학자금으로 인해 우유 배달이나 신문 배달,
                 인력거 끄는 일들을 하며 고학하면서도 노동으로 번 돈으로 다른 고학생들을
                 종종 도와주는가 하면 일제의 조선강점을 지지하거나 또는 대한독립을 주장하지 않는
                 이들에겐 격분을 하는 이 협기(俠氣) 넘치던 사내는 28살이 되던 1921년
                 국민협회 회장이자 조선총독부중추원 부참의인 민원식을 처단하고자 결심한다.
 
                 당시 일제는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대한의 독립운동 열기를
                 무마시키고자 여러 시도들을 하였는데 바로 그 중 하나가 친일세력으로의
                 회유 및 육성이었고 그러한 공작을 최전선에서 지원하던 단체가 이 국민협회였다.
 
                 더 나아가 대한독립을 반대하던 민원식은 이즈음 조선에서의 중의원 의원선거법 시행을
                 주장하며 친일매국활동의 하나로 새로운 정당 조직을 꾀하는 등 친일파의 창궐에 앞장섰다.
 
                 결국, 이러한 민족적 치욕에 격분한 양근환은 1921년 2월 16일 낮,
                 자신을 친일세력에 회유 된 유학생으로 꾸며 품에 비수를 품은 채
                 당시 동경역전호텔에 머물던 민원식과 면담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면담에서 최근 국내 사정이 어떠하냐고 묻는 양근환에게
                 민원식은 아주 평온하다는 답을 하였고 이러한 그의 대답에 양근환은 목소리를 높여
                 "지금 온 겨레가 모두 일어나서 독립을 부르짖는데 어찌 평온하다고 할 수 있는가?
                 당신은 조선사람이 아닌가? 당신은 정말 우리나라를 배반하는 자이다!"라고 꾸짖는다.
 
                 그러자 민원식 역시 흥분하여 "독립운동이라고? 상해에 있는 놈들은 모두 폭도이다.
                 이자들이 어떻게 독립을 한다는 거야"라는 망언을 내뱉었고 이에 양근환은
                 품에서 비수를 꺼내 주저 없이 그를 처단한다.
 
                 이후 호텔을 무사히 빠져나와 다음 날 아침 귀가하여 어린 두 딸에게 꽃을 나눠준
                 양근환은 곧장 집을 나와 상해로 떠나는 일본 여객선에 몸을 싣고자 한다.
 
                 하지만 그렇게 상해로 향하는 여객선에 몸을 싣기 2시간 전,
                 당시 검문 중이던 수상경찰서 순사에게 붙잡힌 양근환은 결국 도쿄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은 뒤 그해 음력 5월 2일 도쿄지방법원에 서게 된다.
 
                 이 공판에서 양근환은 조국 독립을 절규하며 시종 의기로운 태도로 일관했고
                 이에 방청석의 한 젊은 일본 여성은 양근환같이 의로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일본의 수치라고 항의하다 퇴정 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첫 공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가 이후 최종 공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아
                 12년이라는 옥살이를 한 후 고향에 돌아온 양근환은 해방을 맞이한 뒤
                 혁신탐정사라는 조직을 만들어 반공투쟁에 앞장서나 그 후 벌어진 한국전쟁 와중
                 자신의 종로 자택에서 북한군에 납치되어 처형당하며 57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8.JPG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해로 온 것입니다"
 
 
소속: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성격: 한인애국단은 한중우의(韓中友誼)와 일본 수뇌암살을 목적으로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이었던
         김구가 1931년 조직한 단체로 한 사람을 죽여 만 사람을 살리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암살시도: 초등교육기관을 졸업한 뒤 일본인 과자점의 점원, 일본인 경영의 화전(和田) 상점
                점원으로 일해오던 이봉창은 21살 당시 용산역 만선철도의 기차운전견습소 역부일을
                하던 중 ·일 간의 임금 격차 문제를 겪으며 항일의식을 갖게 된다.
 
                25살에는 해고당한 뒤 항일 단체인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한 이봉창은
                그러나 다음 해엔 조카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형과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철공소직원 일을 하며 일본인의 양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후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한민족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다고 느낀 이봉창은
                그때까지의 방랑을 접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며 32살 무렵에는
                독립운동 단체에 들어가고자 하나 그의 거동이 수상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받고 만다.
 
                그러나 이후 면담에서 "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聖業)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이봉창으로부터 그의 진의를 알게 된 김구가 자신이 조직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시키며 이봉창은 그렇게 의거의 기회를 잡아 일본천황폭살계획을 준비한다.
 
                이후 거사를 위한 송별회에서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찍읍시다."라며 오히려 김구를 위로한 이봉창은
                33살이던 1932년 1월 8일, 당시 동경 요요키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던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진다.
 
                여기서 비록 수류탄이 일왕에게 명중하지 못해 이봉창은 일왕 처단에 실패한 채 토요다마 형무소에
                수감된 뒤 그해 10월 열린 비공개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0일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순국한다.
 
                한편 생전 문란한 사생활과 체포 후 다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던 이봉창이지만
                당시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몸 던졌던 그의 거사는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큰 감명과 파급을 끼친다.
 
 
 
9.JPG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소속: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성격: 한인애국단은 한중우의(韓中友誼)와 일본 수뇌암살을 목적으로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이었던
         김구가 1931년 조직한 단체로 한 사람을 죽여 만 사람을 살리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암살시도: 12살 당시 보통학교에 입학한 윤봉길은 다음 해에 일어난 3·1운동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거부하며 학교를 자퇴한다.
 
                그 뒤 한학과 중국 고전을 익히던 윤봉길은 19살 무렵
                그때까지의 서숙생활을 마치고 농촌부흥운동에 전력한다.
 
                그렇게 농민독본(農民讀本) 저술, 야학회 조직, 부흥원(復興院) 설립, 월진회(月進會) 조직,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 등을 통해 농촌부흥운동과 독립정신 고취에 매진하던 윤봉길은
                23살이 되던 무렵엔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남기고서 그해 3월 6일 만주로 망명한다.
 
                여기서 일본경찰에 발각되며 옥고를 치루기도 한 윤봉길은 만주로 탈출해
                김태식, 한일진 등의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준비하며 독립운동 근거지를 모색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겨야 보다 큰일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품고서 1931년 8월 상해로 향한다.
 
                이즈음 상해에서 활동을 모색하던 윤봉길은 그해 겨울 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치겠다고 호소하며 의거의 기회를 잡는다.
 
                그리고 그가 25살이던 1932년 봄, 야채상으로 가장해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하던
                윤봉길은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며 4월 29일 일제의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 날 폭탄을 투척하기로 계획한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거사를 앞둔 윤봉길은 김구와의 마지막 조반을 든 뒤
                "제 시계는 6원짜리인데 선생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시계를 바꾸도록 합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 더 쓸 일이 없잖습니까."라는 말을 남기고는
 
                의연히 기념식장으로 향한다.
                의연히 기념식장으로 향한다.
 
                기념식장에서 윤봉길이 던진 수통 폭탄은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상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를 폭살시켰고 3함대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와
                시게미츠 마모루 공사는 불구가, 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무라이 쿠라마츠 총영사 또한 중상을 입는다.
 
                한편 저격용 폭탄인 수통 폭탄을 터뜨린 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윤봉길은
                자결용으로 준비했던 도시락 폭탄을 끝내 터뜨리지 못한 채 현장에서 붙잡히고 만다.
 
                이후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윤봉길은 두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는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진 채 총살형 당하며 25살의 나이로 순국하고 만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10.JPG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가 오직 군함과 총포의 수가 적은 이유 하나 때문에
남의 유린을 받아 역사가 단절됨에 이르렀으니 누가 이를 참으며 누가 이를 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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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가기록원
 
 
출처 : 네이버블로그 - 이상한 옴니버스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edeiason&logNo=120190144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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