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 한글창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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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으로 들어가서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미리 알고 있던 것이라면 이에 대한 언급이 실록에 나와야 하는데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발표 하자 집현전 책임자였던 최만리를 중심으로 신숙주, 김문,
정창손 등 집현전을 대표하는 일곱명의 학자들이 여섯가지 이유를 들어 한글 반대상소를 올립니다.
먼저 알아두셔야 할 것이
세종대왕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으며 언제나 논리적이었고 대의명분을 중시 하는 분이었습니다.
"경연"이라는게 있는데 간단히 말해 왕의 수업시간 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상적인 유교국가를 만들기위하여 대제학 부제학 뭐 이런 신하들이 왕을 교육시키는 자리인지라
역대 왕들이 가장 싫어했던 시간입니다만, 예외적으로 세종대왕때는 오히려 왕이 신하들을 교육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선생이 학생에게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신하들은 필사적으로 공부했던거죠.
신하들과 이견이 생기면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따지며 옛 성현의 사례를 거울삼아 모든일을 처리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분이..
상소문이 올라오자 논리적 토론 이런거 없이, "내가 너보다 더 아는거 많으니까 넌 닥쳐."
(진짜 이런 내용의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상소문 올린 집현전 학자들을 싸그리 감옥에
쳐 넣어버리고 공갈협박, 지난일 가지고 트집잡기 등등.. 막말로 치사한 짓을 동원합니다;;
이 일은 세종재위기간중 아주 이례적인 일입니다.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에서는 집현전 학자들이 들고나온 6가지의 조문에 대의명분이 있었습니다.
이미 언급 했지만 세종대왕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습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가면 불리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권력남용으로 밀어붙여 버린거죠.
일반적으로 신숙주 성삼문등이 한글창제에 관련되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도 학교 다닐때만해도 그렇게 배웠고요.
그 근거가 되는것이 용재총화에 기록된
"세종께서 언문청을 설치하여 신고령(신숙주), 성삼문에게 명하여 언문을 지었다."
라는 구절과
"요동에 한림학사 황찬이 유배 와 있어 을축년 봄에 그를 찾아가 음운을 물었다. 그 후 13번이었다."
라는 구절입니다.
성삼문은 한글 반포 직전에 집현전에 들어왔기에 직접적 관련이 없고 신숙주는 세종 23년에 집현전에
들어왔지만 그 다음해 통신사로 일본으로 파견되어 한글창제에 참여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신숙주의 보한제집에 보면 집현전 학자들이 한 일은 훈민정음 혜례본과 같은 한글관련 서적을 만드는
일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학자 황찬에게 가서 음운을 물었다는 내용은 한글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한자음에 대한 것이었고
결정적으로 이미 한글이 나온지 1년이 넘은 시점이었습니다.
세종재위기간중 왕의 명을 받아 역사, 정치, 경제, 천문, 지리, 음악, 농업, 군사 등 수많은 분야에 걸쳐
연구가 이루어 졌으며 모든 일에 그 책임자에 대한 기록이 명확히 남아 있습니다.
결정적인게 유일하게 한글에 대해서만 [왕이 직접 만들었다] 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한글 창제는 집현전은 별 관계가 없고 세종대왕 본인의 업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