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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사정으로 중학생 1학년 때 할머니 댁에서 몇 달간 지냈던 적이 있다.
할머니 댁은 마을 분들 모두 밭을 매러 나가면 강아지들이 집집마다 모여 나와 소풍을 가고,
밤이면 달과 별에서 개구리 소리가 쏟아지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에 또래라곤 내 여동생 밖에 없었고
해가 지면 마을버스가 다니는 2차선 도로에 다문다문 늙은 가로등 몇 개가 서 있을 뿐이라
밤낮으로 놀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 나와 내 동생의 친구가 되어 준 것은
비슷한 시기에 저 멀리 이모네 집에서 온 어린 말라뮤트 장군이와 요크셔테리어 복순이었다.
복순이는 예쁜 털을 시골에 오면서 짧게 밀어서 누가 봐도 영락없는 시골 똥개였고,
장군이는 덩치는 컸지만 아직 어린 나이라 마을의 말썽꾸러기였다.
두 견공이 할머니 집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둘 모두 사람을 좋아하고 잘 따르는 편이었는데
그래도 복순이는 쪼끄만게 낯선 사람이 오면 앙앙 짖는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아무리 짖어봐야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문제는 넉살좋은 장군이인데 누굴 보던 간에 꼬리를 치면서 일단 안기려고 겅중겅중 달려오고
얼굴에 침을 묻히는 것으로 안부 인사를 했다.
적의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는 행동이지만
녀석의 다부진 몸과 풍성한 털, 날카로운 얼굴이 할머니 댁에 놀러온 주민분들을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오...오매, 저게 뭐당가..? 늑대여? 늑대??”
“시방 이게 무슨일이여??”
“오매 오매!!! 잡아묵것다고 달배온다!! 퍼뜩 나가소, 퍼뜩!!”
“보소!!! 보소!!! 늑대가 나타났시요!! 늑대!!!”
그렇게 동네분들이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져 도망간 이후
장군이는 말뚝에 매여 마당한쪽을 지키게 되었다.
하지만 장군이의 풀죽은 모습과 며칠 새 말뚝 주변으로 왕릉처럼 높아져가는 똥 무더기를 더는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에
말뚝에 매는 것은 반성의 시간을 갖는 용도로만 사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며칠 만에 자유의 몸이 된 장군이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을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말려 놓는다고 돗자리 위로 펼쳐놓은 고추며, 콩이며, 들깨를 모두 헤집어 놓았다.
그렇게 신나게 놀고 조용히 집에 들어오기라도 하면 심증만 있지 물증은 없었을 텐데
돗자리를 물고 집집마다 ‘제가 한 일 좀 보세요!! 어때요 재밌죠?’ 라고 얼굴도장을 찍고 다니니 이내 말뚝에 다시 매이는 몸이 되었다.
할머니는
“썩을놈의 개새끼가 뭣을 잘못 쳐 먹었는가 천방으로 지랄을 해!!”
하셨지만 그래도 장군이를 예뻐 하셔서 금방 풀어주시곤 했다.
복순이는 같이 산책을 다니면 먼저 어디론가 뽈뽈 뛰어가서는 앙앙 짖고는 다시 돌아와서 ‘저기에 뭐가 있는 것 같은데 같이 가주면 안돼??’ 하는 표정을 짓곤 했다.
그 귀여움을 거절하지 못하고 짖었던 곳으로 같이 가주면 등에 하늘이라도 업은 듯 더 기가 차서 앙앙앙 하고 앙칼지게 군다.
그럼 어김없이 그곳에는 얼룩이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다가 이내 도망가곤 하였다.
복순이와 장군이는 술래잡기를 자주 했는데 시작은 언제나 장군이었다.
둘은 복순이의 몸 전체를 합쳐도 장군이의 얼굴정도 밖에 안될 만큼 몸집 차이가 많이 났다.
그런 장군이가 먼저 복순이의 얼굴을 입으로 앙 하고 문다.
제 딴에는 살짝 입만 가져다 대는 것이겠지만 복순이는 놀란것인지 아픈것인지 모를 소리를 낑낑 낸다.
그러고 나면 장군이놈은 엄청나게 신난 표정으로 특유의 멍청돋는 겅중겅중 뜀박질이 있는데 그렇게 논둑을 천천히 뛰어 도망간다.
열이 있는대로 받은 복순이는 앙앙 하면서 죽어라 그 꽁지를 쫒아 뛰어가는데,
장군이는 도망가고 몸집이 스무배나 작은 복순이가 맹렬히 추격하면서 술래잡기는 시작된다.
그렇지만 장군이는 무릎까지 빠지는 설원 속에서도 몇십 몇백키로씩 달릴 수 있는 말라뮤트다.
애초에 요크셔테리어인 복순이에게는 결과가 정해져 있는 술래잡기일 뿐이었다.
한번은 장군이가 어김없이 복순이 대가리에 침을 바르고 논둑을 뛰어 도망갔다.
복순이가 또 악에 받쳐 시끄럽게 그 뒤를 쫒는데 오늘은 왠지 특히나 더 열이 난 듯 싶다.
장군이도 여유를 부리다가 뭔가 심상치가 않자 꼬리가 빠져라 뛰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 걸음 안가서 장군이가 발을 헛디뎌 그만 논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 비탈을 궁구르는 모습과 논에 빠져 진흙과 물에 흠뻑 젖은 녀석의 바보같은 꼬락서니에
저 녀석이 정말 파란 눈과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가진 그 말라뮤트가 맞을까? 하는 의심을 가진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복순이는 불의의 사고로 일찍 하늘나라에 갔고, 장군이도 성견이 되어가면서 시골 마을에서는 감당하기 힘들어서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
지금은 다시 만날 수 없지만 한참 예민하고 혼란스럽던 그 때에 항상 웃게 해주고 힘이 되어준 두 친구가 문득 생각이 난다.
출처 | 재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