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단편소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1939)
보르헤스는 이 소설의 화자로서, 20세기 프랑스 소설가인 가상의 인물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을 정리한다.
그는 피에르 메나르의 유작 중에 '돈키호테'라는 작품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의 “1권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 일부”로 구성되어 있다.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현대적으로 각색 또는 재구성'하려던 것이 아니라, 돈키호테라는 작품 자체를 새로 쓰려는 시도를 했다.
메나르의 생각에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쓴 것은 ‘우연’이다. 세르반테스는 익숙한 언어와 타성적인 상상에 이끌려 약간 마구잡이로 그 불멸의 작품을 써 내려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메나르 자신은 이 우발적인 작품을 문자 그대로 다시 쓰는 ‘신비로운 의무’를 수행했다.
가령 『돈키호테』 9장에서 세르반테스는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이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라고 썼다. 보르헤스의 화자에 따르면 이것은 17세기 작가가 쓴,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이것을 메나르는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이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라고 다시 쓴다. 똑같은 거 아니냐고? 맞다, 똑같다. 그런데 다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구두점 하나까지 똑 같은 텍스트이지만, 17세기의 스페인과 20세기의 프랑스라는 시공간의 차이가 텍스트에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새롭게 쓰인 『돈키호테』에 대해 ‘명민하지 못한’ 독자들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글자 그대로 옮겨졌다’라고 우길 테지만, 화자의 생각은 다르다.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작품보다 거의 무한할 정도로 풍요롭다.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더 ‘모호’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모호성은 풍요로움이다.”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를 세르반테스의 것보다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저자’라기보다는 차라리 ‘독자’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피에르 메나르’의 이야기는 남의 것을 완벽하게 베끼더라도 더할 나위 없이 독창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예는 현실이 아니라 허구에나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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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문과는 복붙해도 세계적 명작이 됨.
심지어 복붙했는데 원본보다 카피가 더 풍요로운 텍스트가 됨.
복붙 얘기가 흥하길래 문득 생각나서 올려봅니다.
물론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검색해서 나온 글 두어 개를 복사해서 짜집기했습니다.
ps' 돈키호테는 정상적인 환경보다 2세기쯤 앞서 나온 오버테크놀러지같은 문학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