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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문화 5탄 - 전쟁 속의 식문화 (1부)
게시물ID : history_242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다나토스
추천 : 14
조회수 : 2868회
댓글수 : 18개
등록시간 : 2015/11/26 01:43:45
매우매우 오랜만입니다! 
4탄인 일본편을 쓴지 무려 10개월만이네요. 이래저래 바쁨과 귀차니즘이 합쳐져서[....]
사실 5탄은 동남아시아 쪽 식문화를 써볼까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좀 찾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래서 5탄은 전쟁, 혹은 난리통(?)속에서 발전한 식문화에 대해 써볼까 합니다.

이전 글 링크입니다.

식문화 1탄 - 중세시대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191624&s_no=191624&kind=member&page=1&member_kind=bestofbest&mn=363706

식문화 2탄 -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191747&s_no=191747&kind=member&page=1&member_kind=bestofbest&mn=363706

식문화 3탄 - 그리스 로마 문명 (1부)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193126&s_no=193126&kind=member&page=1&member_kind=bestofbest&mn=363706

식문화 3탄 - 그리스 로마 문명 (2부)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193201&s_no=193201&kind=member&page=1&member_kind=bestofbest&mn=363706

식문화 4탄 - 고대 일본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best&no=1002233&s_no=1002233&kind=member&page=1&member_kind=humorbest&mn=363706


1. 대항해시대의 생명줄, 럼주
대항해시대의 선원과 해적, 하면 떠오르는 음료가 뭘까요? 바로 럼주입니다. 보통 대항해시대의 선원이라 하면 얼큰하게 취해서 우락부락한 근육으로 밧줄과 짐을 나르는,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지요.
하지만 이 럼주는 단순히 술이좋아서 선원들이 가지고다녔던 건 아니었습니다. 바로 식수의 문제 때문이였지요. 당시 대형 범선이 발달하고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면서 유럽인들은 점점 더 바다 깊숙히 나아가게 되었고, 항해 한번 할때마다 몇달씩 걸리는건 다반사였습니다. 항해가 끝날때쯤이 되면 쥐가 파먹은 건육과 곰팡이가 슬어버린 딱딱한 건빵을 먹어야한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물이었습니다. 상온에 그릇을 놓고 물을 담아놓으면, 오래 지나지않아 물에서 냄새가 나고 그릇 안쪽은 미끈미끈해지는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미생물이 번식하여 물이 상하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그때는 플라스틱 물통이나 금속 물통 같은 밀봉성이 좋은 그릇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빨리 상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냉장고도 없었을테니 온도도 미생물이 번식하기 딱 좋았겠지요.
  그렇다면 당시의 기술로 물을 오래 보존할 방법이 뭐가 있었을까요? 바로 첨가물을 넣어 미생물의 번식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술이었죠. 술에 들어있는 알콜에 의해 미생물이 억제되었고, 따라서 맥주는 꽤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음료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여행갈때 맥주는 필수품이었죠. 그래서 뱃사람들도 물대신 맥주와 포도주를 싣고다녔고, 특히 힘든 뱃노동에 지친 몸에 알콜은 정말 좋은 약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대항해시대 이후 광활한 대서양을 항해하게 되면서, 이 맥주와 포도주마저 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도 오래걸렸을뿐더러, 지중해보다 덥고 습한 대서양과 카리브해 지역은 맥주와 포도주마저 상하게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당시 수도원에서 발명했던 증류주는 그야말로 신의 선물이었습니다. 알콜 도수가 매우 높아서 상하지 않았거든요. 초기에는 수도원 내에서만 조금씩 제조하던 증류주는 항해사들에 의해 널리 사용되게 되었고, 곧 큰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증류주도 단점이 있었습니다. 매우매우매우 비쌌거든요. 그래서 선장 정도나 되어야 마실 수 있었고, 가난한 선원들은 엄두도 못내는 실정이었습니다. 
  한편 선원들에게는 또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비타민의 부족으로 발생하는 괴혈병이었지요. 괴혈병에 걸리면 잇몸에서 피가 나기 시작하다가, 나중엔 온몸이 굳어 죽게되었습니다. 당시엔 딱히 원인을 알 수도 없었기때문에 18세기 말에 영국 해군의 군의관이었던 길버트 브레인이 레몬즙과 양배추를 선원들에게 먹이기 전까지 괴혈병은 그야말로 공포의 저주였습니다. 특히 당시의 선원 생활은 낭만적으로 표현되는 소설이나 영화에서와는 달리 매우 열악한 조건이었고, 매일 중노동으로 몸을 혹사시켜야 했기에 선원들의 몸은 썩은내 풀풀에 툭하면 병에 걸리는 실정이었지요. 특히 배 안에서 쥐와 벌레들도 득실거렸기 때문에 전염병은 그냥 일상 정도로 여겨졌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는 배 안의 쥐를 죽이기 위해 배를 아예 물속에 가라앉혔다가 들어올리는 방법까지 사용하였지만, 쥐는 물에 빠져도 3일동안 살아남을 정도로 생존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17th 배.jpg
( 17세기 당시의 범선의 구조. 대부분의 공간에는 물과 식량, 무역물품 등을 실어야했기 때문에 늘 공간이 부족했고, 보통 선원들은 대포 옆에 널판지로 임시 벽을 만든다음 간이 침대(해먹)에서 자는 방식으로 생활하였습니다. )

  이런 실정이었다보니 당시 선원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이거나 죄수들이었습니다. 혹은 바다에서 한몫 챙기려는 사람들, 해적이었지요. 너무 뱃일이 힘들다보니 심지어는 이미 배에 탄 선원이 도망가려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선장들은 나름대로의 대비책을 세웠는데, 가급적 항구에 덜 정박한다던가 섬의 원주민들을 식인종이라고 거짓말을 퍼트려서 선원들이 도망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지요. 실제로 이러한 방법에 의해 태평양의 많은 섬 원주민들이 식인종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런 괴혈병과 막노동과 썩은물에 시달리던 생활속에서, 선원들에게 한줄기 빛이 내려왔으니 바로 럼주였습니다. 바로 사탕수수즙을 증류한 증류주였지요. 사실 럼주는 대항해시대보다도 훨씬 이전에 만들어졌습니다. 최초의 럼주는 고대 인도에서 시작되었는데, 인도는 사탕수수를 재배하여 세계 최초로 설탕을 만든 지역이었기 때문이지요. 대항해시대 중 외국의 식재료들을 대량으로 들여오게 되면서 많은 사탕수수를 얻을 수 있었고, 럼주는 이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당밀로 제조했기 때문에 단가도 매우 쌌습니다. 드디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증류주가 탄생한 셈이지요. 도수가 높아 잘 상하지 않으면서 값이 싼 럼주는 곧 항해의 필수품이 되었고, 선원들은 해적이든 해군이든 누구나 럼주를 들이켰습니다. 당시 선원들을 처벌하는 방법 중 가장 심한 벌이 "금주령"이었다고 하니, 선원들이 얼마나 럼주를 중요하게 여겼는 지를 알 수 있는 셈이지요. 심지어 선원들은 "금주를 하느니 차라리 채찍을 맞게 해 주십시오!" 라고 애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럼주.jpg
( 대항해시대의 상징, 럼주. 왼쪽부터 다크 럼 / 골드 럼 / 화이트 럼 )

  그러나 아무리 뭐라해도 결국은 술인데다 특히 증류주는 독한 술이었다보니, 그런 술을 물처럼 들이키던 선원들은 한마디로 알코올 중독자나 다름없었습니다. 선장이 명령을 내려도 술에 취해 개무시하기 일쑤였고, 느려 터진 몸놀림때문에 노동 효율도 완전 바닥이었죠. 이것이 불만이었던 영국의 '그로기'라는 해군 제독이 럼주에 물을 타기까지 해보았지만, 선원들은 물탄 럼주를 더 많이 마셔서 도수를 맞추는(...) 것으로 대응했다고 합니다. 보통 술에 취해 비틀대는 사람을 보고 '그로기 상태' 라고 하는 건 바로 이 해군 제독의 이름에서 비롯된 거였지요. 아무튼 이 럼주에는 비타민C도 풍부했기 때문에, 선원들은 드디어 과일을 먹지 않고도 괴혈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아일랜드 사람들의 눈물이 새겨진 콘비프
  오늘날 콘비프는 '캔에 담겨진 다진쇠고기 소금절임' 정도의 느낌이지만, 원래 콘비프는 말그대로 '염장 소고기'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베이컨 같은거죠. 최초의 콘비프는 아일랜드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사순절 기간동안 큰 항아리에 네모나게 썬 쇠고기를 넣고 그 위에 약간의 질산칼륨이 들어간 소금물을 부어서 푹 절여두었다가, 사순절이 끝난 후에 이를 꺼내 요리해 먹거나 가을동안 보관하여 겨울동안 먹기도 하였습니다. 아일랜드의 보존식이었던 셈이지요. 콘비프의 콘(corn)은 '작은 씨앗'을 뜻하는 게르만족 언어 'Kurnam' 에서 비롯되었는데, 콘비프를 만들때 쓰는 굵은소금 알갱이가 마치 작은 씨앗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이 단어에서 소금에 절인다는 뜻을 가진 corned 라는 단어가 파생되었지요.

콘비프.jpg
( 원조 콘비프, 쇠고기 염장절임 )

  그러던 중 1600년을 전후해서 아일랜드는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당시 한창 먼바다 항해가 유행이던 영국에게 있어서 맛도 있고 보존력도 좋은 콘비프는 매우 좋은 식품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해군들은 밀가루를 구워 만든 과자인 하드택(hardtack)이란 건빵비스무리한 것을 주식으로 삼았는데, 이 하드택은 이스트나 계란, 버터 등은 하나도 들어가지않고 100% 밀가루로 만든 과자였기 때문에 더럽게 맛이없었을 뿐더러, 만든지 3~4일이 지나면 그야말로 돌처럼 딱딱해졌습니다. 선원들은 이 하드택을 물이나 수프에 부숴넣어 죽처럼 끓여먹었죠. 게다가 이 하드택을 한달쯤 보존하면 바구미같은 벌레들이 들끓기도 했습니다. 선원들은 하드택을 먹기전에 식탁에 탁탁 두드려 벌레를 털어낸 다음 먹어야했을 정도였지요.

Army_and_Navy_hard_tack.jpg
( 당시의 하드택. 너무 딱딱해 먹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

이런 맛대가리없는 하드택(역시 영국음식)에 비하면 아일랜드의 콘비프는 그야말로 천상의 음식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콘비프도 소금에 절여진지 오래되어 매우 짠데다 오래된 고기 특유의 지독한 냄새까지 났지만(장조림을 상온에 한달간 묵혀둔다고 생각해보세요), 적어도 돌덩어리 건빵보다는 나았지요. 선원들은 이 콘비프를 물에 넣어 소금기를 빼낸 뒤 굽거나 끓여먹었고, 신분이 높은 장교나 함장은 이 콘비프에 육두구 등의 비싼 향신료를 뿌려 먹었다고 합니다. 
  한편 한동안 해군에게만 지급되던 콘비프는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된 1797년부터 영국 육군들에게도 지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싸우기 위해 장기전이 벌어지면서 오랜 보존이 가능한 보존식량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전쟁 때문에 보존식 개발에 상금을 걸어 병조림이 발명되기도 했을 정도지요. 육군은 해군보다는 식량을 구하기가 원활하기는 하지만 장거리 행군 등에는 음식을 구하기가 어려웠고, 그에 대한 비상식량으로 병사들에게 콘비프가 제공되었습니다. 당시 영국 육군은 해버색이라는 거친 직물로 만든 식량자루를 허리에 걸치고 다녔는데, 여기에는 물과 귀리로만 반죽한 딱딱한 빵과 짜게 절인 콘비프가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영국병사들은 이 두가지만 먹으며 전쟁을 치뤘다고 하네요. 이 콘비프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가 있는데, 나폴레옹 전쟁 중 영국인들은 프랑스인들이 "개구리까지 포함하여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먹는다" 라고 하여 프랑스인들을 "개구리"라고 조롱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프랑스인들은 영국인들을 보고 "너희 영국인들은 다른 맛있는 음식을 놔두고 소금에 절인 짜디짠 쇠고기만 미친 듯이 먹어대니, 음식맛도 모르는 멍청이들이다!" 라고 맞받아쳤다고 하네요.(여기서 영국음식의 전설이 시작된걸지도)
  그러던 중 1810년, 영국에서 통조림이 개발되면서 영국인들의 휴대식량인 콘비프도 통조림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그런데 캔에 의해 밀봉되었던 콘비프는 더더욱 고약한 냄새를 풍겨대서 영국인들 사이에서도 꽤 불만이 많았다고 합니다. 박하나 로즈메리, 후추 등을 마구 뿌려대보았지만 별 도움은 안되었다는 것 같네요.
  지금까지는 영국의 얘기였지만, 앞서 말했듯이 콘비프의 시작은 아일랜드였습니다. 그리고 정작 개발자인 아일랜드인들은 많은 양의 쇠고기와 버터를 생산하면서도 콘비프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영국이 죄다 뺏어가고있었거든요. 그래서 아일랜드는 감자를 주식으로 삼아 연명하고 있었는데, 1847년 감자마름병이 돌자 감자 생산량의 90% 이상이 작살이 나버렸습니다. 이른바 아일랜드의 대기근이라 불리는 사건이지요. 이 사건으로 인해 2백만명이 굶어죽었고, 2백만명이 아일랜드를 떠나 미국 등 다른 나라로 이주했습니다. 이로인해 아일랜드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미국에 정착한 아일랜드 사람들은 고향을 떠올리며 콘비프를 만들어 먹었는데, 이 콘비프가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만드는법이 간단한데다 단백질이 풍부하고 열량이 높은 음식이었거든요. 유대인들은 주식인 베이글이나 샌드위치에 콘비프를 넣어 먹었고, 콘비프에 사우어크라우트(양배추 절임), 삶은순무, 당근을 곁들여 함께 먹는 이른바 '콘비프 정식' 도 이 무렵에 생겨난 식사법이었습니다. 링컨도 취임식 때 손님들과 함께 콘비프와 사우어크라우트를 먹었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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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비프와 양배추절임을 끼운 샌드위치, 코울슬로, 당근 등을 함께 먹는 미국의 콤보 메뉴 )

아일랜드인이 영국으로 인해 나라를 떠나야 했던 슬픔과 함께 전파했던 콘비프이지만, 현재 콘비프의 최대 생산국이자 소비국은 미국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 콘비프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성 패트릭데이(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패트릭을 기념하는 날)에 주로 많이 소비하며, 베이컨이나 햄 대용으로 일상적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한국은 아무래도 아직까지 콘비프가 낯선 음식이긴하지만 말이지요.


3. 나치 치하에서 탄생한 환타
  현재 환타는 코카콜라와 함께 최고수준의 인기를 누리는 음료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환타의 탄생배경은 꽤 어두컴컴하고 칙칙하지요. 바로 2차세계대전이었습니다.
  당시 독일 뿐만 아니라 유럽에 있어서 코카콜라는 매우 인기있는 음료였습니다. 특히 물의 질이 안좋은 유럽에서는 노동 중에 물대신 술을 마시는게 일상이었기 때문에, 취하지 않으면서 청량감도 좋은 코카콜라는 기업가들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노동자들의 대표 음료로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진출해 있던 코카콜라사는 큰 고민에 빠지게됩니다. 미국과 영국이 독일로 향하는 모든 물자를 끊어버렸거든요. 그리고 그 물자에는 코카콜라의 원액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비밀주의였던 코카콜라는 무조건 본사에서 보내주는 원액이 있어야만 제조할 수 있었고, 그 원액의 공급이 끊기자 코카콜라의 생산도 중단될 위기에 놓였던 것입니다. 특히 독일은 전쟁 전까지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코카콜라 소비국이었기 때문에, 코카콜라를 못팔게 되면 공장은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독일 코카콜라 지사장 막스 카이트는 스위스의 코카콜라 지사를 거쳐 원액을 들어오는 방안도 알아보았지만, 미국이 아예 유럽으로의 원액 공급을 막아버렸기 때문에 그쪽 역시 비슷한 상황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막스 카이트는 코카콜라를 대체할 새 음료를 개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음료수개발을 맡고있던 셰텔리히 박사가 치즈 찌꺼기와 사과술을 빚고 남은 섬유소, 과일주스와 탄산가스 등을 몽땅 섞은(...) 끝에 새로운 음료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아무리 봐도 벌칙주같지만) 막스 카이트는 직원들로부터 이 음료에 붙일 이름을 공모했고, 공상, 환상 등을 뜻하는 'fantasie'가 채택되어 이를 줄여서 Fanta 라는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독일 환타.jpg
( 당시 독일에서의 환타 광고 )

  이후로 독일에서는 코카콜라 대신 환타를 팔게 됩니다. 전쟁 때문에 코카콜라를 마실 수 없던 독일인들은 환타의 맛에 반해버렸고, 특히 식수 공급이 영 안좋았던 군인들에게 환타는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아무래도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초창기 환타 포장지에는 학대당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그려져있었다고 합니다. 유대인 탄압을 정당화하려는 히틀러의 정책이 반영된 것이었지요. 이 때문에 훗날 유대인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인 탄압의 상징이다 하여 환타 마시기를 꺼렸다고 합니다. 환타는 히틀러의 후원에 힘입어 막대한 양을 팔아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이후로도 환타는 인기리에 계속 팔렸고, 결국 1960년 코카콜라 본사가 독일이 개발한 환타를 정식으로 인수하게 되면서 환타가 세계시장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현재 환타는 세계 180개국에 소개되었으며, 각 나라에서는 각종 변형상품을 잇달아 출시하고 있지요. 특히 일본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맛의 환타를 파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4. 역사를 바꾼 생선 한마리의 힘
  이번엔 중세 유럽에서 가장 대중적인 생선이자 냄새1위 수르스트뢰밍의 재료로 유명한 생선, 바로 청어입니다.

수르스트뢰밍__청어절임.jpg
( 수르스트뢰밍. 전 세계 냄새랭킹 1위를 한 화생방 병기 수준의 음식으로 유명합니다. )

  고대 갈리아 지방 사람들은 영국 해협에서 청어를 잡으며 살았습니다. 이 갈리아 지방을 점령한 로마인들은 갈리아인들이 먹던 햄이나 돼지고기는 금방 받아들였지만, 청어만은 그다지 반기지 않았습니다. 청어는 고등어처럼 몸에 기름기가 많은 생선이기 때문에 빨리 상해버렸고, 역한 냄새를 풍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기독교가 유럽을 지배하면서 청어요리가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수난을 기념하는 사순절동안에는 고기를 먹을 수 없었는데, 이를 대신할 수 있는 단백질 섭취원으로 생선을 주로 먹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왕족이나 귀족들은 고급생선인 농어를 주로 먹었고, 청어는 너무 많이 잡혔기 때문에 서민들이 주로 애용했습니다. 사실 청어가 농어에 비해 딱히 맛이 떨어지는건 아니었지만, 너무 많이 잡혀서 희소성이 없었기 때문에 귀족은 취급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당시 발트해에서는 진짜 엄청난 양의 청어가 잡혔는데, 6월말마다 바다가 청어로 가득차서 항해를 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중세유럽에서의 청어는 그야말로 "바다의 밀" 이라고 불릴 정도로, 제 2의 주식이었던 셈이지요.
  그러던 중 1350년경 네덜란드에서 획기적인 청어 보관법이 발명되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청어는 내장에 지방이 많아 쉽게 상해서 오랜 보존이 불가능했는데, 내장을 빼고 간수에 절이면 오래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이후 네덜란드는 절인 청어를 유럽 각지에 팔아 막대한 이익을 보았고, 이로인해 청어 무역의 주도권이 발트해에서 네덜란드로 넘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부를 기반으로 1648년, 유럽 최강대국이자 자신들을 지배하던 스페인을 물리치고 세계 최고의 해상무역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지요. 이후로 영국에게 당해 해상의 최강자 자리를 내놓기까지 인도네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등 눈부신 황금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청어에서 시작한 네덜란드의 황금기였던 셈이지요.

청어알.jpg
( 일본에서도 청어알은 꽤 대중적이고 인기있는 식재료입니다. )

5.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전리품, 커피와 크루아상
  오늘날 크루아상과 커피 라고하면 프랑스의 카페나 빵집(빠리바게트)이 떠오르지만, 이 크루아상과 커피는 둘 다 아랍 국가로부터 비롯된 음식들입니다. 특히 커피는 아예 아랍권에서 전해진 음식이지요. 커피의 원산지는 아프리카 동부의 에티오피아입니다. 고원 지대에서 염소를 키우던 목동이 한 염소가 커피콩을 먹은 후 힘차게 뛰어다니는 걸 보고 자신도 먹어보았는데, 피로가 말끔히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카페인 중독) 이것이 커피에 관한 최초의 일화이지요. 이후로 9세기 무렵 커피는 동부 아프리카와 교역을 하던 아랍 상인들에 의해 이슬람 지역으로 급속히 전파됩니다. 특히 이슬람 수도승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는데, 오랜 명상으로 오는 졸음을 커피가 쫓아주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교리에 따라 술을 금했던 이슬람권에서 커피는 술 대신 이웃과 수다를 떨며 마실 수 있는 최고의 음료수였습니다. 
  이 커피를 유럽인들이 맛보았던 것은 16세기 말경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자국을 방문한 유럽 사절들에게 커피를 대접했던거지요. 하지만 처음에 유럽인들은 "아무런 맛도 없고 지독히 쓰기만 한 음료" 라며 커피를 깠고, 와인이나 맥주 대신 '시꺼먼 구정물'이나 마셔대는 터키인들을 "미개하다" 며 깔보았다고 합니다.(그런 서양권이 이젠 대부분의 커피브랜드를 차지하고 있지요.) 
  그렇게 헤프닝으로 끝날뻔 했던 유럽인들의 커피가 제대로 전해졌던 것은 바로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의 터키는 그닥 내세울 것 없는 나라지만 불과 300년 전에만 해도 세계 최강의 강대국이었습니다.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은 600여년동안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에 걸친 대 제국을 건설했지요.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은 특히 유럽쪽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는데, 오스만과 멀리 떨어진 영국에서조차 "오스만 제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다" 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 오스만 제국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영어식 발음으로는 빈)'를 두번에 걸쳐 공격했는데, 바로 동유럽 역사에서 유명한 1차 빈 포위(1529)와 2차 빈 포위(1683) 입니다. 1차 빈 포위 때에는 폭우와 보급 문제로 결국 오스만 제국이 철수했지만, 2차 빈 포위 때에는 1차때보다 더 많은 15만명의 대군을 이용해 비엔나를 제대로 포위하게 됩니다. 포위된 비엔나 시민들은 식량이 다 떨어져 개나 고양이, 비둘기까지 잡아먹을 정도였고 항복하자는 여론까지 일 정도였지만, 결국 유럽 각지에서 비엔나를 돕기위한 동맹군이 결성 되어 4만7천여명의 신성로마제국군과 3만 7천여명의 폴란드 군대가 도와주러 오게 됩니다. 특히 폴란드 군대는 당시에 세계 최강의 기마부대 '윙드 후사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윙드후사르.jpg
( 무적의 기사단 윙드후사르. 5m가 넘는 장창과 독수리 날개가 달린 갑옷이 그들의 상징입니다. )

  후에 폴란드는 이 최강 기마병의 환상을 버리지 못해 2차대전 당시 탱크를 상대로 기마돌격을 하는 추태를 부리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 동맹군과 오스만 사이에서 일대 결전이 벌어지게 되고, 오스만 제국은 크게 패해 도망치게 됩니다. 이 전투에 의해 유럽인들은 마침내 오스만 제국을 무릎꿇렸다며 기뻐하게 되지요. 한편 전쟁이 끝난 후 피터 밴더 라는 제빵사가 이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이슬람의 상징인 초승달을 본떠 빵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크루아상입니다. 이후 크루아상은 오스트리아인들이 즐겨먹는 음식이 되었으며, 그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을 가게 되면서 프랑스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지요.
크루아상.jpg
( 이슬람의 상징인 초승달을 본 떠 만든 크루아상 )

  한편 오스만 제국이 워낙 허겁지겁 돌아가다보니 보급품이었던 커피콩도 대량으로 놓고가게 되는데, 이로인해 유럽쪽에 커피콩이 전파되게 됩니다. 일설로는 오스만 군대에 포로로 잡혀있던 쿨스지스키 라는 사람이 포로생활 동안 커피콩을 볶아 커피만드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오스만 군대가 패주할 때 탈출하여 비엔나로 돌아와서 커피 끓이는 방법을 전파했다고도 합니다. 


이상으로 일단 1부를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2부때 뵈요~

출처 <전쟁이 요리한 음식의 역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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