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
|
지난 2010년 하버드 교수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 출간돼 ‘정의’열풍을 물고 왔었다. 정의가 무엇인지 정의해주는 책은 아니었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처럼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국민적인 기회를 제공해준 책이었다.
최근 충무로에서 범죄·스릴러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다시 화두로 떠오른 느낌이다. 작품의 주인공과 성격에 상관없이, 대부분 영화의 엔딩은 주인공이 정의를 달성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지난 10월에 개봉했던 <성난 변호사>의 변호성(이선균)은 돈도 많고 대형 로펌이라는 빽도 있는 잘나가는 변호사이다. 이런 그가 더 큰 성공을 위해 참여한 대기업과의 일이 틀어지자, ‘성이나’서 판을 뒤엎고 정의를 실현한다는 내용이다. 그가 변호를 맡은 제약회사는 불법적인 실험과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지르던 곳이었다. 때문에 변호성의 동기가 ‘정의실현’보다는 ‘복수’와 ‘성공 욕구’에 가까웠음에도 변호성은 ‘정의를 실현한 사람’으로 비춰지며 끝이 난다.
- <성난 변호사>의 안티 히어로 변호사 변호성(이선균)
최근 개봉해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로써는 이례적인 흥행을 보여주고 있는 <내부자들>역시 비슷하다. 정계를 쥐락펴락하는 이강희 논설주간(백윤식)에게서 버려진 정치깡패 안상구(이병헌)은 돈 없고 빽 없는 경찰출신 검사 우장훈(조승우)와 함께 한다. 안상구는 복수를 위해, 우장훈은 출세를 위해 뭉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정치 비리를 일삼던 이강희와 장필우(이경영),오 회장(김홍파)등을 일망타진 하는데 성공한다. 그들은 언론과 인터넷에서 ‘정의로운 내부고발자’로 인정받는다. 허나 안상구와 우장훈 역시 진짜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안상구와 우장훈, 변호성은 정의로운 히어로가 아닌 ‘안티 히어로’라고 볼 수 있다. 정의실현이 목적도 아니었고, 정의로운 태도를 지녔다고 말하지 애매하지만, 결과물은 정의롭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정의로운 한국 영화 속 인물은 어디 있을까? 정답은 올해 최고 흥행작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베테랑>의 서도철(황정민)이다. 서도철이 조태오(유아인)을 기를 쓰고 잡으려는 이유는 위의 안티 히어로들과 비슷한 듯 보인다. 실제로 <성난 변호사>와 <내부자들>에서 <베테랑>과 비슷한 쾌감을 받았다는 평이 많다. 허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변호성과 안상구, 우장훈가 정의로운 결과물을 낳은 행동을 시작한 계기는 자신의 신변 보호 혹은 욕망 실현이 첫 번째 목적이었다. 변호성과 우장훈은 모든 것을 잃고 이도 저도 아니게 될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러니까 사회적 성공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 뛰었다. 안상구는 복수라는 틀 안에서 계속 움직였다. 극중에서도 ‘정의’를 여러 번 입에 담긴 하지만 그들에게 ‘정의 실현’은 우선순위가 뒤로 가있다.
서도철이 조태오를 잡으려는 이유는 ‘안티 히어로’들과 확실한 차이점을 보인다. 자신의 신변이나 출세가 전혀 위협받지 않은 상황, 오히려 출세를 더욱 보장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이를 뿌리친다. 돈 대신 경찰로써의 ‘가오’를 선택한 것이다. 그를 움직인 동기는 자신에게 온 위협이 아닌 돈과 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배 기사(정웅인)이었다. 자신을 위해 타인, 사회적 약자를 위해 희생하는 정신이야말로 정의 아니겠는가. 류승완 감독에 의하면 <베테랑>의 서도철 형사는 주진우 기자를 모티브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약자를 위해 희생하는 정신.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확실한 답이자 이 시대에 필요한 시대정신이 아닐까.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서도철과 그의 아내(진경)의 대사는 관객들에게 확실한 카타르시스를 전달한다. 그들이 말하는 ‘가오’가 민주주의 속에서 살아있는 사법체계에서 나오는 ‘정의’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베테랑>이 1300만에 달하는 흥행을 기록한 이유는 서도철의 단순무식한 정의로움 뿐만이 아니다. <성난 변호사>와 <내부자들>은 정의라고 불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 ‘내부자’가 되길 자처한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가 아닌 법을 벗어나 움직인다. 게다가 사실상 기득권인 그들의 모습은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묘한 기시감을 준다. ‘검사, 변호사 등의 세력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정의를 실현한다.’라는 설정은 관객들에게 그들의 행동을 완벽하게 납득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전세 걱정을 하면서도 재벌 3세 조태오가 하사한(?) 선물을 뿌리치는 서도철의 아내의 모습은 날카롭다. 동시에 색다르게 다가온다. 그 동안 불의에 타협 없이 맞선 캐릭터가 한국 영화에 얼마나 있었나. 영화의 마지막 서도철과 조태오의 대결에서 “이제부터 정당방위야!”라는 서도철의 대사가 통쾌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어쩌다 보니 정의를 실현하게 된 안티 히어로가 아닌, 문자 그대로 ‘히어로’인 캐릭터의 등장이다.
- <베테랑>의 서도철(황정민)
이 글에서 안티 히어로가 옳은지, 서도철 같은 히어로가 옳은지 판단을 내릴 순 없다. 어느 방향이던 정의를 실현했고, 그로 인해 대중들이 위로받고 분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변호성과 우장훈 보단 서도철을 응원하고 싶다. ‘정의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가장 적극적으로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서도철이기 때문이다. 안티 히어로이던 그냥 히어로이던 많이 등장해주길 바라는 것이 맞긴 하다. 허나 서도철이 더 끌리는 이유가 있다.
<성난 변호사>, <내부자들>의 긍정적인 엔딩과는 달리 조태오가 구속되는 것만을 보여주고 끝난 <베테랑>의 에필로그는 이미 관객들이 다 알고 있다. “신진물산 재벌 3세 조태오는 얼마 안 있어 출소할 테고 서도철은 곤란에 빠진다.” 여기 헬조선에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유추할 수 있고 접해온 이야기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한 가지 더 알고 있다. 서도철은 그들에게 머리 숙이지 않을 것이란 것. 그리고 한 가지는 잘 모른다. 현실에도 서도철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 마지막 대결에서 서도철을 둘러싼 시민들의 스마트폰들처럼, 히어로가 ‘정당방위’를 얻기 위한 방법은 대중의 관심이다. 몇 안 되지만 존재하는 현실의 서도철들을 위해 응원을 보낸다.
출처 | http://blog.naver.com/dsp9596/2205512607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