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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기념공원 조성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게시물ID : bestofbest_1132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김잭규
추천 : 519
조회수 : 23736회
댓글수 : 0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3/06/05 22:35:09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6/05 20:36:03

조국 근대화를 이뤄낸 박정희 각하 존경합니다


그의 업적을 기리며 기념공원 조성을 시행하는 중구청에 맞춰 그의 업적을 적어볼까 합니다

























1960년대 당시 중앙정보부는 증궈거래소에 개입하여 작전을 주도하였다.


5000명 가까운 사람들의 군소 투자자는 이들에 의해 재산상의 피해를 보게되었다.

자그마치 138억환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1966년 당시 삼성 계열사인 한국 비료공업이 사카린을 밀수하다 적발되었다.

당시 이병철 삼성회장의 장남 이맹희는 이 사건을 지휘했다고 고백하며 박정희와 이병철의 조직적인 밀수라며 폭로하였다.













당시 박정희는 월남전에 자국민을 파병하였다.

죽어가던 자국민에게 배상할 돈이 아까워 그는 국민연금법으로 당시 사망직전의 월급 36개월 분밖에 지급하지 못하게 하였다.


목숨값이 3년치 월급이였다.


이 조항은 2차 연평해전까지 이어져 당시 피해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박정희 판자촌 정리를 명령하였다.

무면업자에게 하청을 줘 건설한 와우아파트는 막대한 국고와 70명 가량의 사상자를 냈다.




















당시 엄청난 돈을 들여 건설을 한 고속도로

세계은행에서 차관을 도입하며 빚을 내 건설을 하였으나 세계은행은

경부고속도로를 최후에 지을것을 말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경부선을 최우선 건설하였다.

당시 물자는 기차로 주로 운송하였고 차량이 물자를 대체하게 되게 된것은 박정희 사후인 1980년부터 였다.

박정희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여 경부선을 지었을까?










판자촌의 정리를 명령하던 박정희는 현재 성남시 부근에 서울의 철거민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곳에는 인간이 생활할만한 인프라가 조성되지 않았고 시민들은 분노하였다.

돈을 주고 이주를 하였으나 주위에는 가게도 병원도 아무것도 없었다.

집밖에 없었다.


십만명이 정부의 말을 믿고 돈을 주고 이주했지만 아무런 대책 없는 졸속행정으로 주민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이라는 한국에 전향한 공산주의자들의 단체를 만들었다.

이는 공무원들의 실적 쌓기로 무수히 많은 무고한 사람들까지 가입을 시켰고


후에 이승만은 이들의 처리를 명령하였다.

이후 명예회복과 진상조사가 이뤄지려 했으나

박정희는 관계자를 빨갱이로 몰아 체포하고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 당시 이뤄진 또하나의 학살사건인 거창 양민 학살 또한 보도연맹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

이들의 명예는 박정희에 의에 묵살되었다.















박정희는 자신의 반대세력을 포용하기보다는 처리하길 좋아했다.
















1973년 당시 야당 인사였던 김대중은 일본 호텔에서 납치를 당하는 사건이 벌여졌다.


일본 정부는 한국 대사관 직원을 용의자로 지목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극구 부인하며 모르쇠로 일관하였다.
















중앙정보부는 독일과 프랑스로 간 한국인이 북한과

내통,간첩 행위를 벌이는 짓을 벌였다며 200명 가까운 예술인을 지목하였다.

타지에서 납치당한 예술인 30명 가량은 재판을 받았지만 최종심에서 간첩행위로 유죄를 받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당시 인민혁명당 혐의로 사형집행을 당하고 그들의 유골이

화장장으로 단 하루만에 이송되자 장의차 앞에서 시노트 신부는

극렬히 저항했다.

시노트 신부는 박정희 정권이 인민혁명당 피해자들에게 고문을 가했다는것을 폭로하였고


시노트 신부는 강제추방 되었다.













당시 국가의 부채는 상당히 높았으며 국가부도위기에 봉착하였다.

이때 부산대학교에서 민주선언문을 낭독하며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로 이뤄진 시위는 주민들까지 동참하였고 박정희는 이들에게 총기발포도 불사한다는 생각으로 일관했다.













그의 측근이였던 김재규는 이러한 생각을 가진 박정희에 대해 분노하였고 

궁정동에서 벌인 연회도중 그의 총탄에 사망하였다.












박정희가 사망한뒤 청와대 집무실에서 발견된 사금고




그는 처음부터 죽음에 이르렀을때까지 존경받을 대통령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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