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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이 내리던 그 날, [희철]은 [지영]에게 격렬하게 사정했다.
게시물ID : readers_229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amienLEllu
추천 : 4
조회수 : 672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5/11/30 11: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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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첫 눈이 내리던 그날, 희철은 지영에게 사정₁했다.
 
 
 
희철은 지영의 오랜 연인이다.
 
3천일 이상이 지나가자 더 이상 숫자를 하나하나 나열해가는게 무의미할 지경이었고 
 
연애를 막 시작했을 무렵의 소소한 기념일 하나하나를 챙겨나가던 풋풋한 내음은 오래 전에 종말을 고한 뒤였다.
 
 
 
물론 그네들에게도 하루가 멀다하고 껌딱지같던 진득한 사랑놀음과 운우지정을 나누던 시절도 있었다.
 
오래전 언젠가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 없는 돈을 끌어모아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서
 
자욱한 아침 안개처럼 한 가득 피어있던 난지도 억새풀밭에서 속삭이며 고백하던 때도 있었다.
 
"벌써 그대와 함께 한 지도 1년이 되어갑니다. 작년 이맘때 처음 만나 수줍게 얼굴을 붉히던 그 때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워요.
 
지난 1년여간 하루에 한 개씩, 사랑과 인연이라는 벽돌을 쌓아왔지요. 이제 몇 일 뒤면 365개의 벽돌을 쌓을테구요.
 
그 벽돌 하나하나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추억만이 담겨져 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심하게 싸우거나 화를 내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서로에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500개, 1000개, 수천개, 수만개의 벽돌을 함께 쌓아올려나가면서
 
처음 당신에게 고백했던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않고 되새기고 되새기며 벽돌로 지은 우리들의 집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노력하고 노력할께요."
 
그렇게 희철은 자신의 마음을 담아 바람에 흩날리던 억새풀밭 한 가운데서 지영에게 고백했다. 가난했지만 풋풋하기만 했던 과거 어느 날의 일이었다.
 
 
 
이제 희철과 지영은 더 이상 돈 몇 푼 때문에 고민하거나 크게 마음먹고서 8천원 짜리 경양식 세트를 먹지 않아도 될 만큼 반듯한 직장인이 되어있다.
 
매주 금요일 퇴근길에 만나 전망 좋은 호텔 레스토랑의 창가 자리나 오마카세₂로만 받는 고급 스시야₃에서 초밥을 먹는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희철이 사는 아파트에 가서 지극히 의무적이고 이성적인 공방을 치루는 것이 그들만의 의례적인 데이트 방식이 되어버렸다.
 
3년 가까이 변변한 직장도 없던 취업 준비생 시절 아침에 일어나면 부모님의 눈칫밥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했고
 
서로가 만나 데이트를 하게 되면 오래 전에 거미줄을 친 서로의 지갑을 탈탈 털어내 분식집에서 가벼운 식사를 하거나
 
서로의 집이 비어있을때 들어가서 한 없이 부끄러워하며 격렬하게 운우지정을 나누던 시절도 있었기에
 
지금의 모습은 격세지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렇게 10년을 넘게 연인관계로 이어온 그네들에게 연애 초반의 풋풋함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희철과 지영이 10년이 넘게 사귀는 것을 보면서 양가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대단하게 여기면서도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품었고 수없이 그들에게 결혼 의사를 묻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희철과 지영은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돌리면서 대답을 회피하곤 하였다.
 
서로가 결혼에 대해서 단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서로를 사랑하게 된지 7년쯤 되었을 무렵, 오랜 취업 준비끝에 희철과 지영은 높은 경쟁률을 뚫고서 누구나 알고있는 대기업에 보란듯이 입사하였다.
 
그러고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들은 결혼을 생각하였고 양가 부모님의 상견례 후 일사천리로 약혼식까지 치루어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엄청나게 쏟아져 내려오는 일거리와 월화수목금금일을 아우르는 야근의 연속성은 결혼을 쉽사리 준비하지 못하게 했고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고 미루다 지금에 이르렀다.
 
 
첫 눈이 내리던 11월의 마지막 금요일, 미국에서는 온가족이 함께 모여 추수감사절 식사시간을 보내고 연휴를 즐기고 있을 날이었다.
 
여느때와 같이 희철과 지영은 퇴근길에 만나 함께 단골 호텔 레스토랑으로 올라가 여유롭게 주문을 마치고서
 
보관해둔 와인을 꺼내받아 글라스에 신의 물방울을 채웠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같았으리라.
 
하지만 오늘은 여느날의 금요일과는 많이 다른 양상을 띄고 있는 듯 하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던 그들은 갑자기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고, 어느새 울상이 된 희철은 지영이 앉아있는 의자 앞으로 다가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격렬하게 두 손을 지문이 닳도록 빌어대며 지영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₁사정[事情] : 어떤 일의 형편이나 까닭을 남에게 말하고 무엇을 간청함.
₂오마카세[お任(まか)せ] : 주방장특선, 보통 고급 일식집이나 초밥전문점에서 쉐프의 임의대로 요리를 만들어 고객에게 내놓는 주문방식.
                                      일반적으로 전채, 장국, 초밥, 튀김, 조림, 사시미, 후식 순으로 순서를 짜서 내어줌.
₃스시야[すしや] : 초밥 전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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