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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의 극일 스토리 서평
게시물ID : sisa_11354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오옴
추천 : 0/3
조회수 : 1005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9/08/14 09:37:32
이것도 페이스북에서 보고 퍼왔습니다.
선동이나 일베 아니고 그냥 여기에 반하는 논리가 듣고 싶습니다.



   《안익태의 극일 스토리 서평》

   (2018년 8월7일 프레스센터 20층에서 열린 안익태선생의 극일스토리 출판기념회에서 행한 이 영 일 전 의원의 서평) 
(대한민국 헌정회 통일연구위원장) 

 역사학자 김형석 박사께서 “안익태의 극일 스토리-애국가로 일본을 덮다”라는 부제를 단 역작을 우리에게 내놓았다. 지금 한일관계는 1965년 수교 이래 최악의 상태로 전락하면서 국론마저 4분5열 되는 상황이다. 누구든지 친일 프레임에 걸리면 가차 없이 매국노로 매도하는 선동환경 속에서 김형석 박사는 그러한 프레임에 걸린 한 음악가를 역사 속에서 구출하는 좋은 글을 써서 책으로 출판했다. 

 나는 김 박사의 책을 읽으면서 한국의 이른바 지성인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우리 국민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울만한 세계적 음악가 안익태 선생을 그래야할만한 뚜렷한 이유도 없이 고의로 친일파의 프레임을 씌우고 그것도 모자라 나치패당이라는 반인류적 낙인까지 찍어 음악세계에서 완전히 매장하려는 모함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 박사는 안익태를 향한 모함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치면서 그것의 허구성을 입증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김박사는 관련되는 자료를 철저히 검증하여 현재 안익태 선생을 향한 모함의 실체가 허구임을 확실히 밝혀냈다. 

 김 박사의 연구에서 더 빛나는 것은 우리나라 애국가의 유래, 탄생과 배경을 자세히 분석하면서 안익태 선생이 작곡한 애국가를 통일이 될 때까지 우리의 국가(國歌)로 지켜야 한다는 우리 국민 다수의 여망을 역사자료를 통해 확실히 뒷받침해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는 그것이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가로 공인했다는 사실도 애국가의 정당성 평가에서 중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이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음악가 안익태의 음악인생이 나라사랑이라는 하나의 과녁을 향해 맞춰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서양음악을 공부하면서도, 서양음악을 연주하면서도 그 안에서 방어타령 같은 한국의 전통음률을 살려내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한시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 다음해에 대한제국의 국적으로 태어났지만 그가 초등교육을 마치고 일본유학길에 올랐을때는 이미 자기 국적은 대한제국에서 일본제국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에서 첼로 연주자로서 기량을 연마하고 작곡가로서 발돋움할 당시에는 일본여권을 소지하고 살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193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체제 중에 한인교회에서 처음으로 스코틀랜드의 민요 Auld lang Syne곡에 맞춘 애국가를 듣고 감격하였지만 그러나 우리 국가가 외국의 민요곡을 따라 부른다는 사실이 애국가로서의 품격에 맞지 않다고 판단하고 애국가의 가사는 그대로 둔다고 하더라도 애국가의 곡조만은 꼭 고쳐야겠다는 뜻을 세우고 5년여의 노력 끝에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를 작곡해냈던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첼로연주자로서의 안익태는 작곡가로의 변신을 도모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새롭게 작곡한 애국가를 샌프란시스코의 교민사회가 함께 부르도록 호소하였고 새 애국가의 악보를 20센트씩에 판매하면서 전 미주대륙으로 애국가가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작곡가로서 불후의 대작이 된 “코리아 환상곡”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의 마지막 악장인 합창곡의 애국가부분만은 서양인들에게는 외래어인 한국어로 반드시 부르도록 작곡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노력 때문에 1964년 10월 동경올림픽 폐막행사로 열린 신 동경교향악단의 코리아 환상곡 연주시에는 안익태 본인이 직접 지휘하면서 제4악장에서 일본인 합창단원들이 한목소리로 우리말로 애국가를 부르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큰 감동을 주는 사건이었다. 안익태는 나라를 빼앗긴 후 일본에서 서양음악의 기초를 다지고 미국과 유럽에서 기량을 연마, 세계적인 작곡가로, 지휘가로 성장한 후 다시 해방된 조국에서 한국국적을 되찾고 마침내 일본의 수도 동경 한복판에서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동경오케스트라를 직접 지휘, 일본합창단원들로 하여금 한글로 애국가를 합창하게 한 안익태 선생의 음악인생이야말로 한마디로 일본을 학습하여 일본을 이긴 극일(克日)을 성취한 인생이라고 나는 평가하고 싶은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리타향 유럽 땅에서 음악연주만으로 밥 먹고 살아가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안익태 선생은 인복이 많아 미국의 독지가로부터 생활비 지원을 받았고 또 독일 체류 중에는 1930년대 독일의 대음악가인 Richard Strauss를 만나 사사하면서 그의 후원을 받아 일본과 독일협회가 주최한 만주국 탄생기념 음악회에서 Richard Strauss가 작곡한 만주국 창립축하공연에서 지휘하였고 그 것이 인연이되어 당시 독일에서 음악인이 직장을 갖는 필수조건인 독일제국음악재단의 회원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는 이 때문에 국내일부학자들로부터 나치에 부역했다는 음해까지 받았지만 서독정부는 그가 취업을 위해 독일제국음악재단의 회원명단에 오른 것을 나치에 협력한 것으로 인정치 않았다.
 그는 이런 행사에 참여하면서도 항상 방아타령 같은 한국음률을 살린 자기 작품을 자기의 연주곡목에 꼭 포함시켜 연주했다. 일본국적을 가진 안익태가 독일에서 음악인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러한 참여가 불가피했지만 그는 자기 작품을 반드시 연주곡목에 포함시켜 연주함으로써 자기 혈관 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결코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오랜 세월 일본여권을 가지고 유럽에 체제하면서 여러 나라를 순회하면서 연주회를 가졌다. 그러나 그의 혈관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 독일, 프랑스, 아일랜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가진 그의 수많은 연주회를 통해 반드시 자기 작곡의 ‘코리아 환상곡’을 베토벤과 함께 연주하면서 조국해방과 독립에의 꿈을 그려왔다고 한다.  그는 작품과 연주활동을 통해 한국전통의 음률을 유럽에 널리 알리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한국음악의 세계화를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음악인으로서 작곡과 연주를 통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적극 표현하면서 살아왔다고 한다. 

 그의 생활무대는 해방 전까지는 미국과 유럽이었고 음악인으로서의 활동무대는 미국 보다는 유럽대륙이었다. 국내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친일로 낙인찍을 요소가 있을 수 없었지만 그를 음해하는 사람들은 연주활동가운데 친일본적 연주가 끼여 있었다고 트집을 잡아 친일프레임을 씌우기도 했고 나치협력자로 매도하기도 했다.

 나는 김형석 박사가 쓴 안익태의 생애를 읽으면서 우리 선대가운데 두 분의 말씀이 생각난다. 조선시대를 학문연구로 치열하게 살았던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말씀, 즉 곱게 보면 꽃 아닌 풀이 없듯이 허물 많은 인간사에서도 ‘못 덮을 허물’은 없다고 했다. 이국땅에서 일본여권을 가지고 생계를 이어가는 음악가 안익태가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음악인으로 발돋움하여 한국음악을 세계에 빛냈다면 어찌 이 공헌이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폭탄을 던진 항일(抗日)만 못하다고 할 것인가. 허물이 있더라도 덮을 수 있는 허물일 것이다.

 또 한분은 우리나라 초대대통령이셨던 이승만 박사다. 1945년 11월 서울 국일관에서 열린 상해임시정부요인 귀국환영연에서 국내파와 해외파 독립운동자들 간에 친일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어나자 이승만 박사는 그 자리에서 “조선국왕이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나라를 일본에 바쳤기 때문에 2000만 동포가 친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나라를 만들었다. 따라서 친일책임은 마땅히 조선국왕에게 물어야하는데 그에게는 묻지 않고 식민지 시대에 죽지 않고 어렵게 살아남은 우리 동포들끼리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책임을 놓고 쟁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타이르면서 “이제는 친일 , 반일을 넘어서서 새로운 민주 독립 국가를 세우는데 모두가 힘을 합치자”고 호소했다. 물론 친일악질분자는 본보기로 처단해야겠지만 일본국적을 가진 문화예술인들이 식민지시대에 생계수단으로 지녔던 직업이나 활동을 문제 삼아 해방된 조국에서 정당한 근거제시 없이 친일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결코 정당하다고 말 할 수 없다.

 오늘 역사학자이신 김형석 박사는 모함 때문에 우리역사 속에서 자칫 매장될 뻔 했던 안익태 선생을 우리의 자랑스러운 국보급 예술인으로 다시 살려내셨고 식민지시대를 살아온 예술인들을 평가하는 우리들의 시각을 바로잡는데 크게 기여하셨다. 이 책이 많이 읽혀서 문화예술인이나 경제인들을 상대로 함부로 친일 프레임을 씌우는 나쁜 풍조를 바로잡게 되기를 바라면서 서평에 가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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