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상과 철학의 밑바탕은 인간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내가 행동하는 이유와 세상의 시간이 흘러가며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이유를 찾고자 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사람이 끊임 없이 외적세계와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 개체의 가치관이라는 것이 성립됩니다.
완벽하게 성립된 가치관이라 과연 있을지 의문입니다만, 사회 구성원으로써의 기본적인, 원활하다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관을 성립하고, 스스로를 외부 세계와 융통할 수 있다고 잠정적으로 판단한 기준이 현대의 성인입니다.
그러나 최근 오유 내외부의 일들을 보면서 과연 성인으로써 스스로의 가치관을 지니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의문이 듭니다.
여론의 휩쓸림과 관심표적의 잦은 이동은 갖가지 가치관의 혼합과 충돌과 융화와 반목의 과정에서 당연히 생길 수 있는 일입니다만, 그 안에서 판단의 기준을 항상 외부에 둘 때에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할 가능성이 증가합니다.
여시만 봐도 폐쇄된 집단 내부에서 극히 제한적인 정보만을 갖고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치더라도, 그네들이 정말 잘못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주어진 감각을 이용하지 않고, 눈과 귀를 틀어막고, 떠먹여 주는 달콤한 말들로 외부세계를 판단하기에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넓혀진 외연을 조금 좁혀봅시다.
특별하고 극히 세세한 경우가 아니고는 기본적으로 서로 비슷한,
혹은 최소한 비슷한 것 같은 감정과 성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커뮤니티는 굴러갑니다.
그래서인지 단시간에 폭발적인 정보가 범람할 때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집니다.
그리고 그 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옳은 '것 같은' 목소리에 같이 탑승하고 싶어집니다.
수많은 정보를 분석하는 것은 이미 그 정보의 제공자가 끝냈을 거라고 안도하고, 과정 없이 결론에 대해 판단을 내려버립니다.
그리고 종종 루머가 양산됩니다.
사실, 모든 정보를 정확하고 빠짐 없이 분석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써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사고의 과정을 믿을만한 개체에 양도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수용하는 보다 편한 방법을 택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꼭 기억했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했다시피 지난한 사고의 과정을 외부에 양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만,
그 양도하는 과정에서 본인 스스로 양보할 수 없는 가치관이 투영되었는가 물어봐야 합니다.
아무리 흘러가는 시류에 걸맞는다고 해도, 정확히 판단할 수 없지만 나보다 나은 것 같은 사람이 얘기하니까 믿을만 하다고 해도,
스스로의 가치관을 투영하지 않고 외부의 판단에 자신의 사고를 맡기는 것은 정말 좋지 않은 습관입니다.
여시가 아몰랑 하는 과정이 바로 그렇습니다.
다 아는 얘기를 왜 이렇게 뻔한 얘기를 지루하게 하는가 하면,
요즘 뿐만 아니라 종종 오유를 보면 저는 같은 생각이 듭니다.
오유 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에서 어디든 벌어질 수 있는 흔한 광경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생각의 주체는 스스로.
스스로의 생각을 정제하는 것은 나 자신.
나의 생각을 정제하고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가 판단할 때의 기준을 단발적인 사건에서가 아닌,
인간에 대한 궁금증, 나에 대한 궁금증에서 찾기 시작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