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지금 나라 걱정할 때가 아니다. (그런데 나라 걱정하고 있다.)
공기도 나빠지고, 남극 얼음은 다 녹아 가고, 바다는 방사능 오염되었으며, 동물은 멸종되어 간다. 지구가 망해가고 있는데 여전히 일개 한 나라의 안위 따위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매우 아쉽다. 수학과 나와서 산수를 가르치는 모양새랄까.
이래서 국가 이기주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 역시 요즘 환경 문제보다 더 걱정되는 게 국가 안위다. 가장 낮은 수준의 고민, 그러니까 전쟁 따위를 걱정하고 있는 거다.
일본의 경우, 좀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물론, 가짜 뉴스겠지만, 알게 모르게 일본 탈출이 이어지고 있단다. 돈 많은 사람이라면 외국으로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거다. 요즘 돌고 있는 위성사진을 보면 도쿄가 방사능 오염 권역 안에 들어 있다. 외폭보다 내폭이 더 위험하다고, 후쿠시마산 음식을 먹으면 굉장히 심각한 형질 변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전문가의 지적도 보았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선 떠돌아다니는 모든 뉴스를 다 믿을 수 없다. 정확한 정보는 일본의 경우, 공개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런 국면에선, 최악의 상황을 두고 사태 추이를 판단하는 게 정공법이다. 음모론은 언제나 존재하나, 음모론자들의 활개 범위는 보통 작은 원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그 원을 벗어날 때가 있는데, 바로 불안할 때다. 언제 불안한가? 그것은 세상이 투명하지 않을 때, 정보를 감추거나, 거짓 정보가 판을 칠 때 보통 그렇다.
신기하게도, 나라가 위기 국면이면 분위기가 전체주의적 속성을 띠게 된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런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기업형 국가를 지향하게 된다. 전체주의, 그러니까, 독재체제의 유일한 장점은 일사불란하게 일 처리할 수 있다는 거다.
예컨대, 뻔히 보이는 문제 하나가 있다. 그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 거기에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 따위로 시간 낭비할 수 없다. 뭐, 이런 군중심리가 반영되는 듯하다.
일단 생존 문제가 해결돼야, 기부도 하고, 정의도 얘기하고, 도덕도 좀 지킬 아량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래야, 왜 사는지, 인생을 좀 돌이켜보지 않겠는가?
현재로선 환경 얘기하는 것 자체가 좀 사치스러워진 느낌이다. 예컨대 환경오염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한 독자적인 소재 기술을 가지고 사업할 생각이라면, 지금이 적기라는 말이다.
주 52시간 문제 역시 기업의 입장을 수용할 태세다. 그동안 기업은 문재인 정부를 설득할 수 없었다. 문재인 정부는 기업의 고충을 좀 탐욕스럽게 바라본 측면이 없지 않았다. 예컨대 과거 보수 정권이 노동자 투쟁을 집단 이기주의로 바라봤듯이 말이다.
정부로선 기업 면면 모두 다 알 수는 없다. 환경 규범을 준수해도 큰 문제가 없는 기업이 있는 반면에, 규범을 어기지 않고서는 도저히 먹고살 수 없는 기업도 있을 테니까. 예컨대 샥스핀 전문점이라면 상어 지느러미를 자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생계를 꾸려갈 수 없을 테다. 또, 52시간을 준수해도 괜찮은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도 있을 테고.
모두 다 징징댄다. 먹고살기 힘들다고. 일종의 협상 전략. 게임에 강한 대한민국이라서 그런지 다들 훌륭한 협상가다. 그러다 보니 정부 역시 판단이 쉽지 않다. 저게 엄살인지, 사실인지 판단하기 힘들다는 소리다. 그래서 내놓은 정책, 욕은 바가지로 먹는다.
어쨌든, 그간 문재인 정책을 보면 대부분 중하위층에 방점을 두어 왔다. 그런데 이번 ‘화이트 리스트’ 배제 사건으로 인해 잠시 멈춰 선 느낌이다. 이 제재 아닌 제재가 얼마나 오래갈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는 하나, 얼마나 시간이 들지 아무도 모른다. 3개월, 1년, 2년, 3년 심지어 50년이란 소리도 나왔다.
그래서 많이 아쉽다. 환경 얘기를 하고 싶다. 겨울이 두렵고 바다가 두렵다. 거대한 바다에 떠다니는 플라스틱 대륙이 무섭고, 남극 빙하가 녹고 있다는 사실이 무섭다.
세상이 좀 살기 좋아야 동물 권리도 좀 얘기할 수 있지 않겠는가. 소수의 사람이 비건 채식주의를 지향하지만, 대부분 정신적 사치로 여기거나 편집증 환자로 치부하곤 한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주변 사람을 괴롭힐 이유가 줄어든다. 동물 학대자에 우리는 경악하지만 그 역시 사회적 피해자 아닐까? 사회적으로 받아온 모든 상처를 더 약한 동물에게 투사한 것은 아니었을까? 주변 사람을 괴롭히면서 사회 정의를 주장하는 모순. 세상은 문제투성이라서 정의롭게 바뀌어야 할 텐데, 짜증나게 하는 옆사람. 위선이라고 보고 싶진 않다. 매우 모순적이지만, 그 역시 한 사람의 내면이 투영된 현실의 한 단면일 테니까.
뭐, 그냥 두서없이 써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