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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윤관장군의 9성이 두만강 넘어 만주였다.라는 발표자료...
게시물ID : history_244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잠룡815
추천 : 3
조회수 : 2133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5/12/11 11:26:04

111.JPG


왜넘들이나 일본식민사학들이 그냥 주장하는 1학설보단

3학설이 더 근거가 많은거같긴 하네요...



그림이 잘 안나오는 경우가있으니 밑의 경로 눌러서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http://blog.naver.com/OpenMagazineViewer.nhn?blogId=jawkoh&logNo=220473238460&categoryNo=0&parentCategoryNo=0&viewDate=

지난 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고려 윤관장군이 개척한 9성에 대한 강연이 있어 참가했다. 고지도 전문가인 이상태 한국영토학회 부회장은 두만강 북쪽에  9성중 하나인 공험진이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표했다. 

고려의 최대 영토는 두만강에 못미친다고 배웠는데 그동안 일본의 식민사관으로 조선시대의 기록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는지 묻는다. 누가 뭐래도 역사를 제대로 그리고 올바르게 배워고 가르쳐야 한다. 

1107년(예종 2)에 3년간 준비한 별무반 17만명을 윤관이 인솔하고 여진을 공격하여 승승장구 승리를 거듭하고 이른바 9성(九城)을 쌓게 되었다. 9성은 함주(咸州)·영주(英州)·복주(福州)·웅주(雄州)·길주(吉州)·공험진(公嶮鎭)·의주(宜州)·통태진(通泰鎭)·평융진(平戎鎭)이었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1108년(예종 3) 2월 무신(戊申)에 비를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비문의 내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세종실록지리지』 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의 내용을 보면, “공험진(公嶮鎭)의 선춘령(先春嶺)은 윤관이 비를 세운 곳이다. (본래) 비석 네 면에는 모두 글자가 있었던 것을 언젠가 호인(胡人)이 그 글자를 뭉개버렸다. 뒷날 어떤 사람이 그 비석 뿌리를 파내보니 ‘高麗之境(고려지경)’의 네자만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 -고려대학교 소장, 31 x 41cm
윤관장군이 여진을 물리친뒤 9성을 쌓고 중앙에 윤관장군이 장막안에 정좌하고 있고  병사들이 <고려지경 高麗之境>이란 비석을 세워 국경선을 표시한 조선후기의 그림


확대함


(고려) 예종 때에는 여진을 쳐서 쫓아내고 9성(城)을 설치한 뒤에 오도양계(양광도楊廣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서해도西海道, 교주도交州道 등 5도, 북쪽에는 서북계西北界와 동북계東北界)로 개편하였는데 이때가 고려의 판도가 가장 넓었던 시기다. 서북쪽으로는 압록강, 동북쪽으로는 선춘령을 경계로삼았으므로 서북쪽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였지만 동북쪽은 고구려의 영역보다 더 넓혔다고 할 수 있다. 두만강이 아니라 선춘령이 고려의 동북쪽 국경이다.”

조선전기 최고의 전국지리지인『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서문에 나오는 고려의 동북쪽 국경에 대한 국가적 인식으로, 편찬 책임자 서거정이 썼다. 

조선은 태조 때부터 최북단의 동북쪽 국경이 고려의 윤관이 개척한 9성의 선춘령과 공험진임을 분명히 선언하면서 명나라로부터 확답을 얻어내고자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태종 4년(1404)에 이르러 명나라에 파견한 김첨이 공험진 이남의 땅이 조선의 관할 영역임을 명나라와 합의하는 성과를 올렸고, 세종 때에도 공험진이 조선의 동북쪽 경계임을 재확인하였다.

 
222.JPG
 

세종은 1439년에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공험진의 위치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고,『세종실록』지리지에 그때의 조사결과가 “두만강 건너 10리에 현성(縣城) ~ 북쪽 90리에 어라손참(於羅孫站) ~ 북쪽 30리에 허을손참(虛乙孫站) ~ 북쪽 60리에 유선참(留善站) ~ 동북쪽 70리에 거양성(巨陽城) ~ 서쪽 60리 선춘현(先春峴)”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의 일본인 학자들은 9성의 위치를 함흥평야에 한정하고 윤관이 국경비로 세운 선춘령비를 마운령비로 판단하여『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부정하는 식민사관을 전개하였다.

이상태 강연자는 『세종실록』지리지와『신증동국여지승람』등 조선시대의 여러 기록과『서북피아양계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一覽之圖)』등 조선시대의 고지도 10점에 대한 꼼꼼한 검토를 통해 고려의 윤관 장군이 개척한 9성(城)의 북쪽 경계인 선춘령과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의 만주에 있었음을 체계적으로 증명했다. 

또한 두만강으로부터 동북쪽의 만주 지역에 대한 실제 답사를 통해 공험진과 선춘령에 이르는 옛 기록의 여러 지명을 비교 고찰하여 위치를 하나하나 찾아 본 내용을 보여주었다. 만주지역 답사 확인과정에서 중국 공안이 계속 붙어 다녔다고 하며 다음엔 중국비자가 안나올지 모른다고 한다. 왜냐면 영토문제는 메우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일 것이다.

느낀 점은 우리가 너무 과거 기록를 무시하거나 중국에 가기 힘들어 포기하지 않았나 한다.  그곳에 무언가 흔적이 있지 않을까?  지명도 바뀔수 있다고 하며 그 예로 고려성촌(高麗城村)이  고성촌(高城村)과  려성촌(麗城村)으로  나뉜다고 말한다. 고지도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확인하여야한다. 영토란 전쟁에 의해서 변하므로 쉽게 바꿀 수 없다. 영토의식은 잠들지 말고 늘 깨어 있어야한다. 

▼이상태 부회장



좌측아래는 회령, 우측에 종성 그리고  선춘령과 공험진이 보인다



▼ 중국국경에서 어렵게 찍은 사진





회령에서 공험진까지






두만강 넘어서



백두산과 두만강 북쪽에 선춘령이 적혀있다.

 

봉화올리는 산악지도에도 선춘령 표시

333.JPG








★ 강연자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1&aid=0002738978


이상태 한국영토학회 부회장 "만주 동북지역은 우리 영토였다"


출처 http://blog.naver.com/OpenMagazineViewer.nhn?blogId=jawkoh&logNo=220473238460&categoryNo=0&parentCategoryNo=0&view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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