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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 장보고 (펌글)
게시물ID : history_244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알딸딸
추천 : 0
조회수 : 268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12/12 17:22:28




    해상왕 장보고





최근 해상왕 장보고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지만 인터넷 홈페이지 "http://www.berlinreport.com/gowithu/h_story/watercity/watercity.htm"에 실린 내용만큼 날카로운 분석이 없다고 생각되어 윗 글을 적극 추천하며 원문 그대로 게시하는 바입니다. 저작권 침해를 이유로 원저작자님의 삭제요청이 있을 시에는 즉각 삭제토록 하겠습니다.




        ㅇ 까투리섬 설화에 얽힌 에피소드

        통일 신라 시대, 우리 나라의 기상을 세계에 떨친 인물로 대표적인 두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도 대개는 파르미 고원을 넘어 실크 로드를 개척한 고구려계 유민 고선지 장군과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한 장보고를 선택할 것이다. 특히나 장보고는 우리에게 해상왕=장보고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어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은 모두 신라인이 아니다.

        청해진으로 알려진 전남 완도항에서 대략 북쪽으로 7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조금도' 또는 '장군섬'이라 불리는 장도(將島)라는 섬이 하나 있다. 그런데 청해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성터의 자취는 왠일인지 완도항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이곳 장도에 판축(板築) 토성의 형태로 남아 있다. 더욱이 해안 목책을 비롯하여 뫼당터, 우물, 목 없는 뫼터, 법화사지 등 청해진과 관련되는 모든 유적.유물과 여러 가지 전승 및 관련 지명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곳 장도와 이 섬에서 서쪽으로 200여 m 정도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는 완도읍 장좌리 일대에 한정되어 나타나고 있다.
(최근영.민덕식, '청해진의 역사적 고찰과 그 성의 분석', <장보고의 신연구>, 완도문화원, 1985, pp.221-222.)

        장도는 해발 42m의 작은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섬 둘레 1,296m, 면적은 약 10정보의 작은 섬이다. 그리고 경작 면적은 겨우 1정보 남짓해 농가 한 채도 살기 어렵다. 게다가 우물도 바닷가에 있는 옹달샘이어서 썰물 때만 이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섬의 지형이 바다를 향하고 있는 동남쪽은 높고, 육지를 향하고 있는 서북쪽으로는 낮은 데다 장좌리까지는 불과 200여 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 까닭에 밀물 때는 섬이지만 썰물이 되면 거의 육지와 이어져 있다. 거기에다 섬 근처의 수심도 불과 1-2m 내외여서, 항구는 물론 해포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구비 조건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한 곳이다.

        그런데 이곳 장도에서 서북쪽으로 대략 200여 m 떨어진 완도읍 장좌리의 서쪽에 위치한 상왕봉 기슭에 가보면 "장보네 묘", "목 없는 맷" 또는 "장군 맷"으로 불리우는 여섯 개 가량의 고총이 전승되어온다. 만일 여러분이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올라 상왕봉 기슭에 다다르면 아마도 대여섯 개 가량의 흙더미가 잡초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완도군지>에 의하면, "목 없는 묘는 장 장군의 묘요, 그밖의 5기는 그의 선친 양위와 근친 선대의 묘임이 틀림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이곳에 가면 '까투리섬'이라는 재미있는 설화가 하나 전해온다.

아주 먼 아득한 옛날, 완도읍에는 엄 장군과 그의 장인 장 장군이 살고 있었다. 엄 장군은 가용리 엄나무골에 살았고, 장 장군은 장좌리 장도에 살았다.... 장인과 사위는 사이가 좋아 이따금씩 서로 내기하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어느 날 하루는 해뜨는 시각을 기준으로 장도에서 건너다 보이는 동쪽 까투리섬에 누가 먼저 깃대를 꽂나 내기를 했다. 그런데 두 장군은 모두 재주와 도술에 뛰어났다. 그래서 장 장군은 까투리로, 그리고 엄 장군은 매가 되어 앞에 보이는 섬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매가 된 엄 장군은 날아가는 도중에 마음이 변하여 까투리가 된 장 장군을 그만 잡아먹고 말았다. 지금도 고금면 상정리 서해에 있는 섬을 까투리섬, 혹은 까튼섬, 또는 같은섬으로 부르는데, 그 섬 이름의 유래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역 등 해조류가 많이 나는 이 지역 이웃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일하러 갈 때, 장인과 사위가 동행하는 일이 있으면 액을 만난다 하여 이를 피한다고 한다.(<완도군지> 8편)

        그런데 대개 설화란 역사적 사실을 은유화해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은유는 그것이 실명화될 경우에 야기되는 압력, 즉 권력의 외압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까닭에 설화는 해석하기에 따라 때로는 집권자의 권력 의지가 반영되면서 왜곡·굴절되는 정사보다 더 많은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해상왕 장보고와 이 까투리섬 설화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인간 장보고의 출생과 죽음에 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ㅇ 번진 발호의 종식과 장보고의 등장

        그런데 장보고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통일 신라인이 아니다. 그는 당나라 사주 연수현 출신의 재당 신라인이었다. 다시 말해서 중국 산동반도를 지배했던 백제인의 후손인 것이다. 그는 '번진 발호'로 나라가 어지럽자 연수현에서 가까운 서주에서 세력을 떨치던 왕지흥 군에 들어갔다. 그런데 당시 친정부 세력인 왕지흥 군의 최대의 라이벌이자, 번진의 발호를 주도한 세력은 장사성처럼 대운하의 혈맥을 차단하며 당나라 조정을 위협하던 고구려 유민의 후예인 치청 절도사 이정기 일가였다.

        왕지흥 군이 세력을 잡기 약 반 세기 전, 당나라는 현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숙종 대에 이르러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데 겨우 성공한다. 하지만 그후 당나라는 급속히 쇠퇴하여 번진 발호의 시기에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당시 안록산의 군대에는 반란군에 있다가 관군으로 돌아선 후희일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안사의 난이 평정되고나서 그 공로로 산동 반도의 평로·치청 절도사가 되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실각하고 당시 그의 내외 종제였던 이희옥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희옥에게 이정기(李正己)란 이름을 하사하여 평로군 절도사를 계승하게 하고, 아울러 해운압 신라.발해 양번사(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를 겸직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양번사란 당시 재당 신라인들의 민간 무역을 관할하던 기구였다.
(김성호, <중국진출 백제인1>, 맑은소리, 1996, p.157.)

        고구려 유민으로서는 드물게 평로군 절도사와 해운압 신라.발해 양번사를 겸직한 이정기는, 당시 잦은 전란으로 통치력을 상실한 중앙 정부를 비웃으며 반정부적 태도를 취해 나갔다. 그런데 당시 중앙 정부에 대해 반정부적 태도를 취한 것은 비단 이정기뿐만이 아니었다. 위박 절도사 전승사(田承嗣), 성덕 절도사 이보신(李寶臣) 등 대부분의 지방 절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방 절도사들인 이들 번진이 발호한 것은 안사의 난에 뒤따른 후유증으로, 이미 통치력을 상실한 중앙 정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려던 당시의 시대 분위기였다.
(김문경, <唐代의 사회와 종교>, 숭전대학교 출판부, 1984, pp.46-53.) 훗날 역사가들에 의해 번진 발호라 불리는 이 시기는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14세기 말의 동아시아 정세처럼 점차 센터의 중심성이 붕괴되고 그 주변부에서 새롭고 다양한 역동성이 꿈틀거리는 동아시아 역사의 격변기였다.

        그런데 당시 이들 번진의 발호를 주도한 최대 세력은 고구려계 치청 절도사 이정기였다. 그는 자신의 절도사 직을 후손들에게 상속시키면서 치주·내주·청주·등주·밀주·해주 등 산동 반도와 그 주변 13개 주를 장악하고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중앙 정부에 대해 독립적인 태도를 취해 나갔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반 세기가 지난 9세기 초, 이들 이씨 일가에 도전하는 친정부 성향의 세력이 나타났다. 바로 산동성 서남단에 인접한 서주의 왕지흥이었다. 그는 당시 이씨 일가와 대립하는 여타 친정부 세력과 연합해 이씨 일가를 비롯한 번진의 발호를 종식시키는데 성공한다. 819년 2월의 일이다. 그런데 장보고는 당시 왕지흥이 이끌던 서주의 군중 소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ㅇ 신라방과 신라소

        그런데 당시 통일 신라는 말이 '통일 신라'이지 실상은 당나라의 '책봉국'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당나라에서는 산동 반도 청주에 치청 절도사 직을 두어 신라를 외교적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보고가 서주에서 무녕군 소장으로 있을 당시, 산동 반도의 치청 절도사 직을 맡고 있던 인물은 다름 아닌 왕지흥이 토벌한 이정기 일가였다. 당시 이들 이씨 일가는 번진 발호로 조정이 어지러운 틈을 이용해 대외 무역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시 재당 신라인의 민간 무역을 관할하던 해운압 신라·발해 양번사라는 직책을 이용하여 발해로부터는 많은 명마들을 수입해 팔고, 신라에서는 대량의 노비를 수입하여 매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 조정에서는 번진 발호(765-819)가 종식되자 이들 이씨 일가를 치청 절도사 직에서 직위 해제시키고 그 자리에 설평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장보고를 신라소의 제1대사로 발탁하였다. 장보고의 나이 서른 살 되던 819년 2월의 일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장보고가 맡은 '신라소 대사'란 직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먼저 여기서 말하는 대사란 오늘날 타국에서 자국의 외교권을 행사하는 대사(ambassador)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대당육전>에 따르면, 당시의 대사란 "무릇 여러 군진의 대사와 부사 이상은 모두 겸인을 거느린다"고 규정된 당나라의 군진급 책임자를 호칭하는 관호였다.
(김성호, 앞의 책, p.151.) 그렇다면 신라소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이러한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중국을 서양에 최초로 소개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마르코 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보다 무려 4백년이나 앞서 외국인이 기록한 최초의 중국 여행 기록인 <엔닌일기>에 눈을 돌리게 한다.

        <엔닌일기>를 서양에 맨처음 소개한 사람은 60년대 주일 미국 대사를 지냈던 E. O. 라이샤워이다. 그는 패어뱅크와 더불어 <동양문화사>라는 대작을 남겼으며, 하버드 대학 중국학 연구 기관인 옌칭 연구소를 만드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라이샤워는 <엔닌일기>를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베네치아의 상인이던 마르코 폴로는 글도 모르던 무지랭이인데다, 동양의 문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해 불교를 우상 숭배로 치부하던 서양의 오랑캐에 불과했다. 하지만 엔닌은 중국 문화와 불교 교리를 전수받은 당대 1급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마르코 폴로보다 더 훌륭한 편력의 업적을 남겼으며, ...<엔닌일기>는 모험으로 가득찬 경험을 하루하루 명료하게 기록한,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유니크한 문헌이다.(E.O.라이샤워, 조성을 역, <중국 중세사회로의 여행>, 한울, 1996, pp.13-14.)

        하지만 <엔닌일기>는 중국 당나라의 기록보다는 오히려 당시 동아시아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재당 신라인들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는 보기 드문 문헌이란 점에서 우리에게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 <엔닌일기>에 의하면, 신라소는 산동 반도 문등현에 있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은 문등현뿐만 아니라 초주와 연수현에도 있었는데, 그곳은 신라방(新羅坊)이라 불렸다.

        당시 당나라는 번진 발호가 종식된 819년 2월, 횡해 절도사 오중윤의 건의에 따라 번진 발호 때 번진 세력들이 임의로 설치한 군진을 원래대로 회복시키기 위해 지방 조직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문등현의 신라소와 초주와 연수현 등지의 신라방은 이와 같은 지방 조직의 전면적인 정비 사업과 더불어 일괄적으로 설치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나라 조정에서 이처럼 지방 조직의 정비 과정에서 신라방과 신라소를 설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당나라의 징수 제도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조용조(租庸調)이다. 조(租)는 전세(田稅)이며, 용(庸)은 인두세, 그리고 조(調)는 호별세이다. 그런데 조용조 시스템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전적(田籍)과 호적(戶籍)이 정기적으로 정확히 파악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적과 호적 조사는 현종 말기부터 시작해 안사의 난과 번진 발호 기간 동안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당시 당나라의 세원인 조용조 시스템은 실질적으로 완전 붕괴 상태에 있었다. 당시의 정황을 <신당서> 식화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용조는 인구 수를 근본으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원(713-41) 이후 나라의 호적이 오랫동안 고쳐지지 않은 채 백성들은 전출하거나 전란으로 사망하고, 전토는 매매되어 예전 기록과 다르게 되었다. 게다가 국가 예산이 절약되지 않은 상황에서 안사의 난과 번진이 발호함으로써 국가 재정은 날로 궁핍해지고 조용조 세법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처럼 조용조 시스템이 무너지자 번진 발호가 진행중이던 780년, 당시 재상이던 양염(楊炎)은 덕종에게 건의하여 '양세법(兩稅琺)'이란 징수 제도를 시행하였다. 양세법은 종래 6-10월 사이에 징수하던 각종 세금을 여름 수확기인 6월과, 추곡 수확기인 11월에 나누어 징수하는 제도로서 세목은 세 종류로 구별하였다.

        먼저 전세인데, 가호에는 주객의 차별을 두지 않고 현주소로 호적을 만들어 세금을 물리게 하였다. 그리고 호세는 연령에 관계없이 빈부의 차로 세를 징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거래 세금은, 한 곳에 거주하지 않는 행상에 대해 소재지의 주·현이 1/30을 과세토록 하였다. 이처럼 양세법은 예전의 조용조가 갖던 균등주의 원칙을 포기하고, 재산 소유의 정도에 따라 세금을 물리는 현실적인 징수 제도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새로 만들어진 상세의 세율은 원래의 1/30 이외에 거래 상품에 대해 매관당 20문씩 징수하는 열상고전(閱商賈錢)과 대나무, 나무, 차, 나전칠기 등에 부과되던 1/10의 상평본전(常平本錢) 등 각종 세목이 추가되었다.
(松井秀一, '兩稅法の成立と展開' <世界歷史 6>, 岩波書店, 1971, p.226.) 하지만 주거지가 일정하지 않은 행상에게 세금을 물리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세금 징수 시기에 상인들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면 얼마든지 탈세할 수 있고, 게다가 해외로라도 나가버리면 세금 징수는 말 그대로 물 건너간 꼴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번진의 발호로 치안이 붕괴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행상에 대한 양세법은 요즈음 우리 나라 국세청과 대기업에서 보듯이, 징수와 탈세를 둘러싼 끝없는 숨박꼭질의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819년 2월, 번진 발호가 종식되었다. 그러자 재정난에 허덕이던 조정으로서는 대대적으로 지방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당시 행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재당 신라인들의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이들을 일정 지역에 묶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초주와 연수현 등의 도시에는 신라방이란 블럭을 설정하여 재당 신라인들의 거주를 한정시켰다. 그리고 문등현의 적산포(赤山浦)와 유산포(乳山浦) 및 소촌(邵村) 등 해안 촌락 지역에 흩어져 사는 재당 신라인들에 대해서는 신라소라는 기구를 만들어 그곳에서 이들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였다. 물론 신라소는 주 도독부의 직속 관할 하에 있는 자치 기구였다.

 

        ㅇ 신라번과 진제이

        그런데 <엔닌 일기>에 의하면, 재당 신라인들은 초주와 문등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엔닌은 귀국선을 잡기 위해 항주만 연안의 명주(영파시)로 향하다가 도중에 귀국선을 만나 명주까지 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일기에 기록된 신라인 무역상 12명 가운데 무려 6명이 주산 군도 근처의 명주에서 활약하던 무역상들이었다. 이들이 바로 항주만 연안에 위치한 주산 군도의 '신라번'에 근거지를 둔 재당 신라인들이다. 819년에 번진 발호가 종식되고서 대대적인 지방 제도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절강성 동부의 명주 지역을 관할하던 절동 관찰사 설융(薛戎)이 묵종에게 올린 품의를 보면 신라번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 나온다.

절동 관찰사 설융은 삼가 아뢰옵니다. ...당도의 명주에서 70여 리 떨어진 망해진에서 굽어 보이는 대해 동쪽에서 신라·일본 제번(諸蕃)이 서로 경계를 접하고, 문서에 근거하여 명주에 속하지 않겠다고 청원하였습니다. 황제는 이를 허락하다.(<당회요>, 권78, 제사잡록上, 元和 14년(819) 8월조.)

        설융은 행정 정비의 일환으로 명주 망해진(현재의 진해)에서 굽어 보이는 3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주산 군도를 명주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곳 주산 해민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며 편입을 거부하자, 당황한 설융이 묵종에게 품의를 올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주산 해민들의 주장은 공식 문서에 근거한 정당한 요구였기에 묵종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청원을 승인해야만 했다.

        그런데 주산 군도에 있는 신라번은 언뜻 보기에 신라방과 신라소와 동일한 자치 기구처럼 보이지만, 동일시하기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신라방과 신라소는 당나라의 통치를 받는 자치 구역인데 반해, 신라번은 완전히 독립된 자치국으로서 당나라의 치외 법권 지역이었던 것이다. 주산 군도의 신라번이 이처럼 하나의 독립된 자치국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이 백제가 멸망한 뒤에도 그 명맥을 이어가던 해상 백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738년 7월 13일, 주산 군도에 옹산현을 설치했었다. 하지만 763년 3월 4일, 원조(袁晁)를 중심으로 한 주산 해민이 반란을 일으키며 거세게 저항하자, 당 조정에서는 옹산현을 폐지하고, 이 지역을 당나라 영토가 아닌 치외 법권 지역으로 인정한 터였다. 그런 까닭에 설융이 묵종에게 품의를 올렸지만, 묵종으로서는 공식 외교 문서로 인정한 사실을 뒤엎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이들 해상 백제인들은 자신들의 본국인 백제가 망하고, 한반도가 신라에 의해 통일되자, 어쩔 수 없이 '재당 신라인'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주산 군도의 신라번을 근거지로 하여, 자신들의 활동 영역을 점차 산동 반도 문등현과 초주에까지 넓힘으로써, 당시 중국 정부로서는 이들 지역에 그들의 자치 기구인 신라방이나 신라소를 만들어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재당 신라인들의 분포는 비단 중국 연안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들은 엔닌이 일본을 출발할 때 이용했던 큐슈 지역의 하카타 항이 위치한 오늘날 후쿠오카현 가와라정 근처의 진제이(鎭西)라는 곳에서도 집단 거주 생활을 하며 일본 민간인들과 구별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카타 항은 산동 반도 문등현의 적산포, 주산 군도 보타도와 더불어 당시 동아시아 3대 무역항 가운데 하나였다.

        이처럼 재당 신라인들은 당시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을 주도하며 양자강 연안과 산동 반도, 그리고 일본과 양자강 이남 지역에까지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하며, 해상 백제의 후손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백가제해 이야기>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이쯤해서 다시 장보고가 대사로 부임한 신라소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ㅇ 장보고의 적산 법화원 창건

<엔닌일기>에 따르면 재당 신라인의 자치 기구인 신라소의 행정 조직은 대사를 비롯해 그 밑에 신라 역어와 전사(專使), 그리고 짐꾼인 단두(團頭)와 연락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사무실과 전용 선박도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신라 역어란 재당 신라인으로서 중국어와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아는 통역 요원을 말한다. 당시 자치 기구의 책임자인 대사의 임무는 관할 구역 내 재당 신라인의 호구를 관할하고 상세의 징수와 함께 이들의 출입국 사무를 관장하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당시 조정으로서는 이런 대사 직분에 어울리는 재당 신라인이면서도 친 정부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을 찾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조건에 재당 신라인이면서도 친 정부 세력인 왕지흥 군의 군중 소장을 역임하고 있던 장보고보다 적합한 인물은 없었다. 그 결과 번진 발호가 종식된 819년 2월, 장보고는 등주 문등현의 신라소 제1대사로 발탁되기에 이른다.

신라소 제1대사로 부임한 장보고가 가장 먼저 시작한 사업은 적산포에 법화원을 창건하는 일이었다. 오늘날처럼 선박 건조 기술과 항해 기술이 발달되지 못해 항해할 때 바람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던 시절, 항해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이 말 그대로 가미카제(神風)에 달려 있음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해상 무역의 중심지에는 순풍 항해를 기원하는 항해 사찰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 까닭에 재당 신라인의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설치한 문등현 신라소의 제1대사로 부임한 장보고로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문등현 재당 신라인들의 출항지인 적산포에 항해 사찰을 세움으로써 이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창건된 것이 바로 법화원(法花院)이었다.

법화원은 현재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 서차각하촌(西車脚河村)의 해발 3백여 m의 척산(尺山) 중턱에 위치해 있다. 엔닌은 그의 일기에서 적산 법화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적산(赤山)은 순전히 암석으로 치솟은 곳이며, 문등현 청령현 적산촌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그 적산 뒤에는 절이 하나 있는데, 이를 적산 법화원이라 한다. 이 절은 장보고가 세운 것으로, 오랫동안 소유해온 사찰 전답으로 식량을 충당해왔는데 1년에 대략 500석을 얻는다고 한다. 겨울과 여름에 강론하며 겨울에는 <법화경>을, 여름에는 <팔권금광명경>을 연장자가 강론한다. 사원의 남북으로 바위 언덕이 있으며, 샘물이 사원 마당을 가로질러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사원의 동쪽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남서쪽으로는 멀리 트였다. 북쪽은 산봉우리들이 이어져 병풍을 이루고, 서남쪽 귀퉁이는 경사져 있다. 지금은 신라 통사(通事=역어)인 압아 장영(張詠)과 임(林) 대사 및 소촌(邵村) 담당인 왕훈 등이 전적으로 관리한다.

엔닌이 법화원을 방문했을 당시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로서 신라에 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 법화원의 신라소 책임자는 임 대사와 신라 역어 장영, 그리고 소촌 담당인 왕훈에 의해 공동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엔닌일기>에 의하면, 당시 법화원의 승려는 30여 명이었고, 11월 16일부터 이듬 해 정월 15일까지 2개월간 계속되는 겨울철 법회에 합숙한 남녀 신도는 무려 250명에 달했다.

ㅇ <엔닌일기>에 나타난 재당 신라인의 추석 풍속도

그런데 <엔닌일기>에 의하면, 이들의 경강식은 "사람들은 같은 소리로 부처 이름을 부르지만 곡조와 발음 소리는 한결 같이 당나라 음이 아닌 신라 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문경, <唐代의 사회와 종교>, 숭전대학교 출판부, 1984, p.139.) 이처럼 신라소의 사람들을 비롯한 재당 신라인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 공동체로서 신앙 생활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한반도의 신라인과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엔닌이 적산 법화원에서 목격한 재당 신라인들의 추석 명절을 통해서 확연히 드러난다. 엔닌은 그의 일기에서 법화원에서 목격한 추석 풍속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8월 15일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신라만의 독특한 명절이다. ...수많은 음식을 차려놓고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추기를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계속한다. 법화원은 고국을 추모하여 오늘을 명절로 삼았다. ...신라가 발해와 싸워 이 날 승리를 쟁취한 까닭에 이 날을 명절로 삼아 즐겁게 춤추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엔닌은 재당 신라인들이 기념하는 8월 15일을 추석이 아닌 신라가 발해와 싸워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 말하고 있다. 신라 성덕왕 32년인 733년 7월, 발해-말갈 연합군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 산동 반도의 등주를 침공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신라는 당나라의 원군 요청으로, 김사란을 함경도 방면으로 출병시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추석은 엔닌이 알고 있는 것처럼 전승 기념일이 아니라 <신라 본기>에 기록된 것처럼, 유리왕 5년인 AD 28년 경부터 햇곡식을 조상에게 바치던 다례에서 유례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당 신라인 중에서도 지식인 그룹에 속하는 법화원 승려들이 신라인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추석의 유래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만 해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명절은 각기 달랐다. 중국의 역대 문헌에 의하면 고구려는 10월에 하늘에 제사드리며, 잔치를 베풀고 즐겁게 먹고 마시는 풍속이 있었다. 그리고 백제는 사중지월(四中之月)이라 하여 정월과 4월, 그리고 7월과 10월에 각각 하늘과 오제에 제사를 지내고 즐겁게 놀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라만이 8월 15일을 추석 명절로 삼아 햇곡식을 조상에 바치고, 제사하며, 즐겁게 놀던 풍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재당 신라인들은 신라인과는 다른 해상 백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재당 신라인에 대한 이 같은 정체성과 이들에 대한 정확한 위상 파악은 우리가 앞으로 다루게 될 장보고의 파란 만장한 일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이야기는 잠시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다시 법화원 이야기로 돌아가자.

ㅇ 재당 신라인의 항해 사찰과 8-9세기 동아시아 3대 무역 항로

그런데 법화원과 같은 항해 사찰은 비단 문등현에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항해 사찰은 문등현의 적산포와 더불어 당시 동아시아 해상 교역의 3대 거점인 주산 군도의 보타도와 일본 큐슈의 하카타 항에도 있었다.

주산 군도 가운데 하나인 보타도는 남북 6.4km, 동서로 가장 넓은 곳이 4.3km, 가장 높은 산이 해발 291.2m인 작은 섬이다. 하지만 보타도는 진제사(普濟寺)·법우사(法雨寺)·혜제사(慧濟寺) 등 3대 사찰을 비롯하여 수많은 불교 유적이 집중되어 있어 오늘날 중국 4대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이자, 중국이 자랑하는 44개 풍경 지구 가운데 하나이다. 게다가 겨울 한철에는 양자강의 흐린 물이 남하하여 바닷물이 뿌옇지만, 쪽빛 구로시오 난류가 북상하는 여름에는 물이 맑아 해수욕과 피서지로도 유명하다. 또한 400여 종의 유관속 식물과 세계적인 휘귀목, 그리고 천년고장(녹나무)과 흑송이 숲을 이루어 보타도는 말 그대로 동지나해의 흑진주로 통한다.

그런데 이 보타도 남단에는 1정보 남짓한 크기의 신라초(新羅礁)라 불리는 매우 작은 섬이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위에는 조음동이 위치해 있다. 조음동(潮音洞)이라는 이름은 관음원의 관음상 바닥밑에 100m 가량의 암굴이 뚫리어 파도가 칠 때마다 불상 밑바닥까지 몰아치는 파도의 소리와 물안개가 장관을 이룬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섬의 중앙에는 법화사란 사찰이 있는데, 그 절의 뒷산에 상왕봉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보타도의 지명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면에서 완도 청해진의 지명들과 일치한다. 먼저 장보고의 설화가 전해오는 장도의 옛지명이 조음도이고, 완도의 가장 높은 산이 상왕산이다. 그리고 상왕산 기슭에는 장보고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법화사지가 있으며, 법화사 산너머에 관음암이 있다.

한편 일본 큐슈에 있는 하카타 항은 바로 엔닌이 출발한 항구이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대외 출입항이었던 하카타 항에서 동쪽으로 53km 가량 떨어진 곳에는 현재 일본 후쿠오카현 다가와군 가와라정(香春町)에 소재하는 향춘(香春) 신사가 있다. 향춘 신사는 엔가천(遠賀川) 상류의 내륙에 위치해 있지만, 사실은 고대 일본에서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로 연결되는 교통 요충지였다. 일본에서는 향춘 신사의 향춘(香春)을 '가와라'로 발음하는데, 바로 이 향춘 신사가 당시 하카타 항 근처에 세워졌던 항해 사찰인 신조사의 후신이다.

향춘 신사 기록에 의하면, 신조사는 713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시기는 당나라가 대외 무역을 허락해 오늘날 세관에 해당하는 시박사(市舶使)를 광주에 설치(714)한 것과 때를 같이하고 있어, 아마도 재당 신라인들이 일본과 교역하며 이곳 하카타 항에 창건한 항해 사찰로 추정된다.

이처럼 항해 사찰은 문등현의 적산포와 더불어 주산 군도의 보타도와 일본 큐슈의 하카타 항에도 있었다. 그리고 산동 반도 문등현의 적산포와 주산 군도의 보타도, 그리고 일본 큐슈의 하카타 항은 당시 동아시아 해상 교역의 3대 거점이었다. 그리고 이 세 지점을 연결한 것이 당시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삼각 항로였다. 다만 여기서 예외적인 것으로 산동 반도 위쪽에 위치한 등주 항로가 있었다. 하지만 이 항로는 신라와 발해의 중국과의 외교 루트로만 이용되었지 재당 신라인들의 무역 항로로는 이용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적산포와 하카다를 연결한 것이 적산 항로이고, 보타도와 하카다를 연결한 것이 명주 항로이다. 청해진으로 알려진 완도는 바로 이 적산포와 하카타 항으로 이어지는 적산 항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타도와 적산포를 잇는 항로가 있었는데, 흥미롭게도 보타도와 적산포는 해안으로 연결되지 않고 산동 반도 남부 연안과 강회 운하 및 강남 운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동안 수로가 해안으로 연결되지 않고 이처럼 운하로 연결된 것은 양자장과 회수 사이에 있는 강소성 연안 지역인 소북 연안이 양자강과 회하로 흘러 내려온 토사가 퇴적되어 수십 군데의 모래톱이 형성되어 있어 항해하던 배가 좌초하기 쉬운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 간행된 <중국 연안 수로지>에 의하더라도 소북 연안은 무려 30여 군데의 침몰선과 수중 장애물 및 천소(淺所)가 도사린 마의 조난 지역으로 경고되고 있다. 그래서 당나라에서는 소북 연안의 난항 지역을 우회하기 위해 동안 수로를 개발하고, 동안 수로의 남북 양단인 명주와 적산포에 대외 출입항을 개설했던 것이다. 원래 이 동안 수로는 수 양제가 고구려 침공을 준비하며 남방의 식량을 북방으로 수송하기 위해 건설한 대운하였다. 그런데 당나라에 들어와 수 양제가 건설한 대운하는 이처럼 소북 연안의 난항 지역을 우회하기 위한 수로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소북 연안의 자연적 제약을 극복하면서도 내륙 수운과 해외 항로를 절묘하게 결합한 국토 개발 계획의 멋진 걸작품이었다.

ㅇ 재당 신라인의 해상 교역과 무역 마찰

이처럼 8-9세기 재당 신라인들은 해상 백제 세력으로서 주산 군도의 '신라번'을 그 근거지로 산동 반도와 주산 군도, 그리고 일본 큐슈의 하카타 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해상 무역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당나라가 대외 무역을 허용하여 오늘날 세관에 해당하는 시박사를 광주에 설치한 714년을 전후해서 대일 무역을 시작해 일본과의 통상 마찰로 중단되는 10세기 초까지 근 200여 년(733-942)을 지속했다.

당시 일본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견당사를 파견하던 상황이었다. 그런 까닭에 뛰어난 항해 기술과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재당 신라인들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재당 신라인과 일본 큐슈 지역의 통상 마찰의 조짐은 대일 무역이 개시된 초기부터 그 징후를 드러내고 있었다. 일본은 재당 신라인으로부터 수입한 물품이 점차 일본 경제를 뒤흔들어놓자, 마침내 정부가 직접 가격 통제에 나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청해진이 설치되고서 동일한 문제로 신라의 흥덕왕이 취한 폐쇄 정책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가산을 기울여 수입품을 매매함에 따라 가격이 뛰고, ...대신 국내의 귀한 상품들은 천해지니, ...외국 상인들이 입항하거든 선상의 모든 물자를 통보하게 하고, 정해진 물품을 정부가 먼저 수매하게 한 다음 부적합한 사치품은 관청이 감찰하여 각 상품의 귀하고 천함에 따라 가격을 매겨 교역하게 하되 이를 어기는 자는 엄중히 처벌하도록 하라.(<유취삼대격> 744년 5월 17일자)

당시 이들 재당 신라인에 의해 들어온 수입 사치품에 대한 일본인들의 투기는 자국의 물가 체계마저 붕괴시킬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 조정에서는 물가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수입품에 대해 선매권을 행사하고서, 그 나머지 사치품들은 가격 통제를 통해 과도한 사치품 수입을 억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과는 달리 쇄국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던 신라에 대해서 재당 신라인들은 어떠한 전략을 구사했을까? 그것은 바로 인신 매매였다. 원래 무역과 밀수는 공식과 비공식의 차이일 뿐, 둘 다 교역의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언급할 일이 못된다. 이러한 정황은 오늘날 우리 나라 불법 이민 노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 교포들로 야기되는 양국 간의 문제를 떠올리면 조금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당시 이러한 인신 매매는 신라의 지방 관리 또는 토호들과 결탁한 재당 신라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팔려 나간 신라 양민들은 육지에서 강매되거나 해상에서 밀수상들에게 팔아 넘겨졌다. 우리가 판소리를 통해 익히 잘 알고 있는 <심청전>은 어쩌면 바로 이러한 인신 매매를 모티브로 한 문학 작품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김성호, 앞의 책, p.78.) 어쨌든 이러한 신라인 인신 매매는 결국 당과 신라의 외교 분쟁으로까지 치닫게 된다.

ㅇ 당나라와 재당 신라인의 파워 게임, 청해진 설치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는 바로 이러한 정황에서 이루어졌다. 장보고가 법화원을 창건하고 있을 무렵, 장보고와 같은 해에 이정기 일가를 대신해 치청 절도사 직에 임명된 설평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821년, 그동안 이씨 일가에 의해 행해져왔던 신라인 인신 매매 문제에 대해 묵종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리고 있다.

해적들이 약탈한 신라의 양민들이 제가 관할하는 등주와 내주 및 연해 지역 일대에서 노비로 매매되고 있습니다. ...노비 매매는 칙령에 의해 금지되었지만, 이곳은 오랫동안 이씨 일가에 속해 있어서 법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습니다.(<당회요>, 권86, 노비조 821년 3월.)

그리고 다시 1년 후인 822년 12월에 입당한 신라 사신 김주필도 묵종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하고 있다.

신이 등주에 도착해보니 노약자들이 거처할 집이 없어 대부분 향촌 해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 귀국하고자 하나 선박이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국 각지의 해안 관청에 통첩을 내리시어 매번 선편이 있을 때마다 귀환할 수 있도록 편의를 돌봐주시고 이를 제약하지 않도록 명을 내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당회요>, 권86, 노비조)

몇년전 남대문 지하 상가에 줄지어 앉아 있던 조선족 교포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그러자 묵종은 즉각적으로 신라 노비와 표착자의 귀환 조치를 취했다. 822년의 일이다. 하지만 정부의 노비 근절령이 하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당 신라인들은 여전히 신라인에 대한 인신 매매를 계속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번진 발호로 중앙 정부의 통제가 느슨해진 틈을 이용해 동지나해를 완전 장악함으로써 당시 동아시아의 무역을 통한 수익은 당나라 정부가 아닌 이들 재당 신라인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번진 발호의 종식을 계기로 다시 한번 센터의 중심성을 회복하고, 또한 국가 재정의 조달이 시급한 처지에 있던 당나라 조정에서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당 조정에서는 신라 노비를 매매하는 재당 신라인 출신 해적들을 근절하고, 동지나해의 해상 교역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설융의 뒤를 이어 강지목을 치청 절도사로 임명하였다. 825년의 일이다. 치청 절도사 직에 오른 강지목은 827년, 각국 선박의 안전 항해를 보장하는 '교통지사'를 신라와 발해, 그리고 일본에 통보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교통지사란 오늘날의 항해 조례에 해당하는 것으로, 아마도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 최초의 것으로 보인다.
(김성호, 앞의 책, p.156.) 당시 이 교통지사와 관련된 몇가지 에피소드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828년 정월 2일, 당시 발해국 대사로 있던 왕문구가 일본에 갔다가 본국으로 돌아오던중 풍랑을 만나 그만 배가 난파되어 일본 다지마국(但馬國
(여기에서 國이란 일본의 지방 단위 가운데 하나로 주(州)에 해당한다.))에 표류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일본 관리에게 이렇게 요청했다.

"대당 치청 절도사 강지일의 교통지사에 의하면 날씨가 좋지 않아 기간을 어긴 경우는 도망한 죄가 아니다. 지금 돌아가고 싶지만 보다시피 배는 파손되었고, 식량마저 떨어졌으니 바라건대 선박과 식량을 좀 도와 달라."

여기에서 발해국 대사는 일본 관리에게 자신이 도움을 청하는 근거로 대당 치청 절도사 강지일의 교통지사를 들고 있다. 물론 여기서 강지일( )은 강지목(睦)의 오기이다.

황실은 이것만으로 안심하지 못하여 이 신성한 행사 외에 신라에 기미츠(紀三津)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만일 일본의 선단이 신라 연안에 표류하게 되면 그들을 도와주고 억류하지 말도록 간청하였다. 이처럼 7세기 견수.견당사절단은 통상 중국으로 가는 도중 한반도 연안을 따라 갔으므로 대부분 한반도 땅이 보이는 범주에서 항해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본과 적대관계에 있던 신라에 의해 한반돡 통일되자 일본 선단은 이 코스를 피하여 북큐슈로부터 직접 대양을 향해 서쪽으로 위험한 항해를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서도 언제나 배는 한반도에 표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시나에 보낸 사절은 이유 있는 예방책이었다.

다른 하나는 836년 8월에 당시 12차 견당사 파견을 앞두고 일본에서 신라에 파견한 사자가 신라에 표류하여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신라로 향하던 일본 사신 기미츠는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혀 신라 해안에 표류하고 말았다. 그런데 기미츠가 정신을 차리고보니 휴대하고 있던 '사지(使旨)', 즉 자신의 신분을 보장하는 증서와 서신을 찾을 수 없었다.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그만 분실하고 만 것이다. 당시 일본과 신라는 적대 관계였다. 그래서 겁을 먹은 나머지, 그는 신라 측에 자신이 배를 타고 당나라로 향하다가 표류한 것처럼 꾸며댔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다보니 앞뒤가 맞지 않아 의심을 받다가 결국은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때 신라 측 권부였던 집사성(執事省)이 일본 측에 보낸 첩문을 보면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청주 첩지에 따라 항해중인 선박에 양식을 적절히 지급하여 본국으로 방환한다.

여기서 말하는 청주 첩지는 물론 산동 반도 청주에 있던 치청 절도사를 지칭한 것으로, 앞서 발해 대사가 말한 교통지사와 같은 것이다. 이처럼 당나라에서는 827년, 치청 절도사 강지목을 통해 당시 교역국이던 발해와 신라, 그리고 일본에 교통지사를 통보하였다. 그리고 신라에 중국으로 사신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 해인 828년 2월에 신라 사신이 입당하자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할 것을 지시하고, 4월에는 신라소 제1대사 경험이 있는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난 10월, 최후의 노비 근절령이 하달되었다. 이처럼 당나라는 교통지사를 통보하여 동아시아 각 국간의 항해 조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당나라 산동 반도와 일본 큐슈를 잇는 적산 항로의 중간 지점인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함으로써 당시 쇄국 정책을 취하고 있던 신라를 동아시아 무역 시장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완도 항은 조선 시대에 가리포진으로 불렸는데, 이곳은 충무공 이순신조차 "호남 제일의 요충지"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완도 항은 신지도와 암초 및 구두봉이 자연적인 방파제를 이루고 있고, 해심도 깊어 항구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완도 항 뒷산인 동망봉과 남망봉에 오르면 원근의 여러 섬들이 한 눈에 들어와 완도 항은 천혜의 망루이자 해안 요새로서의 최적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824년, 적산 항로를 따라 일본을 왕래하던 장보고도 이러한 완도의 정세에 대해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완도는 적산항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장보고로서는 무역항으로서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당시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는 적어도 2척의 교관선(交關船)과 1척 이상의 회역선(廻易船)을 소유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교관선이란 당나라 관청의 자본금으로 운영하는 무역선을 말한다. 그리고 회역선(廻易船)이란 교관선과 구별되는 순수한 민간 무역선으로 선박과 자금이 모두 민간인 소유인 무역선을 말한다. 당시 장보고의 교관선을 운항하던 선장은 최운십이랑이라는 '대당 매물사'였다. 당시 청해진의 교관선 무역은 치청 절도사가 제공하는 자본금과 장보고의 민간 선박, 그리고 선장 최운십이랑이 결합한 반관 반민 형태의 무역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수익은 관청인 치청 절도사와 선주인 장보고, 그리고 선장인 최운십이랑이 나누어 갖게 되어 있었다. 당시 치청 절도사는 관청의 재정을 여기에서 얻은 수익금을 통해 조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관 반민 무역의 기원은 수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를 침공했던 수나라 양제는 정부의 재원을 조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울과 지방의 각 주에 관청 자본인 공해전을 제공하여 교역을 통해 얻은 이득을 공용에 충당하게 하였다. 그후 이러한 형태의 무역은 당나라 무덕 연간(618-26)때부터 외국 무역상인 번관(蕃官)과의 교역을 통해 얻은 수익을 재원으로 조달하는 방법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번관이 바로 장보고의 교관선 선장인 최운십이랑과 같은 외국 무역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관선 무역은 원나라 때가 되면, 정부가 선박을 제공하는 소위 '관자구선(官自具船)' 형태의 무역으로 발전한다. 원나라 때는 관청이 선박과 자본을 제공하고, 외국인 무역상을 전문 경영인으로 선발하여, 무역에서 얻은 이익을 관청과 상인이 7:3 비율로 나누었다. 이러한 관자구선 형태의 무역은 원래 쿠빌라이가 구상했다가 그의 사망과 더불어 중단되었지만, 당나라 때 있었던 교관선 무역의 발전된 형태였다.

이처럼 당나라의 청해진의 설치는 명목상으로는 노비 근절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쇄국 정책을 지향하는 신라를 동아시아 교역 시장으로 끌어들여 교관선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획득하려는 당나라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일환이었다.



ㅇ 청해진 대사 장보고

한편 신라에 도착한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가 되어 신라의 흥덕왕을 예방하였다. 828년 4월의 일이다. 장보고의 예방을 받은 흥덕왕은 당시 신라를 외교적으로 통제하던 치청 절도사 소속의 대사 자격으로 온 장보고의 요청에 따라 완도를 청해진으로 개방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당시 신라에서는 이러한 진을 설치할 경우에 해당 진에 1기 군 정도의 행정 권역을 주어, 그곳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여 행정 기구로서의 재정적 자립 기반을 마련하게 하는 것이 상례였다. 하지만 청해진의 경우에는 진만 설치했을 뿐, 그에 따른 행정 권역을 별도로 할당해주지는 않았다. 청해진의 재정은 교관선 무역에서 얻은 수익으로 조달할 것이기 때문에 수세 기반으로서의 토지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항구와 거주지 및 항해 사찰 등을 건축할 주거용 부지는 허락되었다.

그런데 당시 완도는 주인 없는 무인도가 아니라 사유지였다. 실례로 엔닌은 귀국할 때 기착했던 전남 다도해 지역의 고초도를 "신라국 제3재상의 방마처"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제3재상이란 오늘날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부령을 말하고, 방마처란 말을 방목하여 키우는 곳을 말한다. 그런데 당시 여천군 돌산면 앞바다의 안도도 신라 왕실의 방마산이었으며, 그 근처에는 황룡사의 사찰 전답(장원)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부산 절영산도 신라 왕실의 방마장이었다.

이처럼 당시 서남 해안의 수많은 섬들은 신라 귀족 내지 권부의 개인적인 사유지였으며, 이들은 섬들을 그들의 장원이나 방마처 내지 사냥터로 사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신라의 토지 제도는 이미 개인 소유가 이루어져 거래되고 있었다. 전남 담양군 남면 학선리에 위치한 개선사(開仙寺)의 석등(보물 제111호)을 보면 통일신라 시대 정부 예산으로 경문왕과 문의왕후 및 왕녀의 발원으로 세워진 석등의 유량답(油糧畓)을 매입한 토지 문건이 기록되어 있다.

용기 3년(891) 신해 10월 모일, 승려 입운은 서울로 보낼 나락 100석으로 오호비소리의 공서(公書), 준휴(俊休) 2인으로부터 석보평 대업저의 논 4결과 ...오답(奧畓) 10결을 나누어 매입했으며, 휴전(畦田) 남쪽은 지씨 땅이고, 동쪽은 영행의 땅, 그리고 서북쪽은 같다.(旗田魏, '新羅 高麗의 田券',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6, p175-207.)

이처럼 사유권이 성립된 까닭에 흥덕왕은 비록 청해진을 개방하기는 했지만, 이미 사유화되어 있는 토지까지 마음대로 하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까닭에 당시 왕이 토지를 주려면 우리가 '식읍(食邑)'이라 부르는 일정한 면적의 수세권을 주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경우에 하사량은 토지 면적 대신에 식읍에 거주하는 호수로 표시된다. 청해진에 망명했던 김우징이 신무왕으로 등극하고서 장보고에게 하사한 식읍 2천 호가 그 좋은 예이다.

어쨌든 당나라의 압력으로 신라의 전남 완도 앞바다에 청해진이 설치되자 이 기회를 노린 재당 신라인들은 물밀듯이 신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들의 경쟁적인 수출로 신라에는 동아시아의 사치품들이 홍수처럼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신라는 골품제라는 사회적 신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신분 서열에 따라 의복, 장신구, 수레, 생활집기, 가옥 등이 엄격하게 차별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호 개방에 따라 해외로부터 이러한 사치품들이 대량 유입되어 민간에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신라 사회는 일본의 경우처럼 사회를 지탱해주던 신분 질서 체계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문호 개방이 급기야 신라의 사회 질서 체계를 송두리채 흔드는 정치적 위기를 몰고온 것이다. 상황이 이쯤되자 청해진이 설치된지 6년이 지난 834년, 흥덕왕은 문호 개방을 취소하는 특별 교서를 공포하였다.

사람에게는 모름지기 위와 아래가 있고, 지위에는 귀하고 천함이 있어, 명칭과 법식이 같지 않고 의복도 다르다. 그럼에도 풍속이 점차 각박해지고,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호화 수입품만 귀히 여기고, 우리의 토산품을 천하다며 싫어하니, 예절(신분 간의 차이)이 없어지고 풍속이 파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에 옛법에 따라 분명히 명하노니, 그래도 만일 일부러 범하는 자에 대해서는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이때에 골품별, 남녀별 및 관등별로 제한된 사치 품목은 의복, 장신구, 수레, 집기 및 가옥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품목이 망라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품목들 가운데는 공작미, 대모, 비취모, 자단, 심향 등 동남 아시아산과 슬슬세, 구수 등 아랍산 수입품도 들어 있었다. 모두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사치품들이다. 그 결과 신라의 문호 개방은 완도 청해진이 설치되고서 겨우 6년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그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동안 쇄국 정책으로 산업 경쟁력이 취약했던 신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앞서 살펴 보았던 것처럼, 일본은 수입품에 대해 가격 통제로 맞섰지만 신라는 아예 문호를 폐쇄해버린 것이다.

ㅇ 청해진에 망명한 김우징

당나라의 장보고를 통한 완도 진출은 흥덕왕이 신라 전역에 사치 금지령을 하달하여 문호 개방을 취소함으로써 그 본연의 목적을 상실하고 만다. 흥덕왕 9년인 834년의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치청 절도사의 외교적 관할 하에 있던 신라 측으로서는 당나라 조정에 직접 청해진의 철수를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래서 신라 조정에서는 당시 완도를 관할하고 있던 무주(광주) 도독 김양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장보고가 완도 항을 더 이상 이용하지 못하게 막았다.

상황이 어렵게 돌아가자 장보고는 완도의 도주와 타협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미 무주 도독 김양의 지시를 받은 도주는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기로는 장보고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완도 이외의 지역에 청해진을 설치하게 되면 청해진을 허용한 애초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되어, 나당 간에 복잡한 외교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장보고는 청해진을 완도에서 완도에 딸린 장도로 옮겨, 그곳에서 도주 측과 대치하며 신라의 대외 정책에 변화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쇄국주의로의 전환을 결정한 흥덕왕이 사치 금지령을 하달한 그 이듬 해에 죽고 만다. 835년의 일이다. 그리고 갑작스런 흥덕왕의 죽음은 당시 권력의 생리가 그러하듯이, 곧바로 왕위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권력 다툼은 당시 개방된 성 문화를 유지하던 신라에서 결코 흔하지 않던 흥덕왕의 순정주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흥덕왕은 즉위한 직후 자신이 그처럼 사랑하던 왕비를 잃고 말았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후사를 고려해 왕비의 간택을 여러 차례 상소했다. 하지만 왕비를 잃고서 실의에 빠진 흥덕왕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며 신하들의 상소를 물리쳤다.

외짝새도 짝을 잃은 슬픔이 있거늘, 하물며 좋은 배필을 잃고서랴?
어찌 차마 무정하게 곧 재취를 하겠는가.

흥덕왕은 시녀조차 접근시키지 않고 오직 환관들만으로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흥덕왕의 이러한 편벽증에 가까운 사랑으로 신라는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후사가 없었다. 이처럼 직계 왕통의 단절이 명확해지자 점차 권력에 혈안이 된 종친들이 왕위 쟁탈전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파워 게임의 주역은 흥덕왕의 종제였던 김균정과 또 다른 종제(헌정)의 아들인 당질 김제륭이었다. 당시 종제파에는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과 무주 도독 김양이 가세하였고, 당질파에는 흥덕왕의 조카였던 김명을 비롯하여 이흥과 배훤백이 가세함으로써 골육 상쟁으로 치달았다.

파워 게임에서 먼저 기선을 잡은 것은 종제파였다. 그들은 당질파보다 먼저 왕궁에 입궐하여 왕좌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당질파에서는 병력을 동원하여 종제파를 몰아내버렸다. 종제파의 수장이던 김균정은 이 과정에서 살해되었고, 무주 도독 김양은 배훤백이 쏜 화살에 다리를 맞고 월성 북천의 백률사 근처 한기로 피신했다가 산 속으로 잠적하여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쯤되자 하루 아침에 아비를 잃은 김우징은 당질파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어디론가 피신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신라 전역이 이미 당질파의 세력에 들어간 상황에서 마땅히 피신할만한 곳이 있을리 만무했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목숨이 경각에 달려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던 김우징은 마침내 장보고가 머물고 있는 청해진을 떠올렸다. 그곳은 치외 법권 지역인데다 군사마저 있으니 이보다 좋은 망명처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 김우징은 장보고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김우징은 처자를 데리고 황산 진구(양산)로 달아나 거기에서 배를 타고 청해진으로 망명하였다. 837년 5월의 일이다.

ㅇ 김우징을 이용해 청해진의 부활을 꿈꾼 장보고

당시 청해진에 있던 장보고는 흥덕왕의 사치 금지령(834)으로 무역이 중지되자 신라의 대외 정책에 변화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무려 3년이나 허송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망명해온 것이다. 장보고는 김우징의 망명을 신라의 대외 정책을 전환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로 여기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종제파의 우두머리인 김균정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당질파의 김제륭은 제43대 희강왕으로 즉위하였다. 흥덕왕이 서거한지 1년이 지난 836년의 일이다. 하지만 김제륭이 희강왕으로 즉위한지 2년이 지난 837년, 희강왕을 옹립하였던 흥덕왕의 조카 김명은 이홍과 공모하여 희강왕의 측근을 차례로 제거해갔다. 그러자 겁에 질린 희강왕은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살하고, 결국 흥덕왕의 조카인 김명이 제44대 민애왕에 올랐다.

그동안 청해진에서 기약없는 망명 생활을 하던 김우징은 김명(민애왕)의 쿠데타 소식을 접하자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장보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장보고는 이번 기회에 김우징을 신라왕으로 옹립함으로써 흥덕왕에 의해 시행되었던 사치 금지령을 해제시키고 다시 무역의 재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쿠데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개 두 가지 전제 조건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먼저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는 것이 그 하나이고, 대외적으로 합법적인 정권으로 인준받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그런데 당시 청해진에는 신라의 정부군과 대항할 정도의 군사는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김우징의 부친인 김균정의 부하 가운데 이곳 완도의 청해진을 관할하는 무주(광주) 도독을 역임한 인물이 있었다. 배훤백이 쏜 화살에 발을 맞고 산 속에 은거하던 김양이 바로 그였다. 그런데 김양은 아이러니하게도 흥덕왕이 쇄국 정책으로의 복귀를 선언하자 장보고를 압박해 완도에 있던 청해진을 장도로 몰아낸 장본인이었다. 그런 까닭에 장보고로서는 불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신라의 수도인 월성 침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전남 지역의 군사 요충지인 무주를 장악해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김양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러한 결탁은 훗날 장보고에게 커다란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만다.

한편 산 속에 숨어 있던 김양은 김우징이 장보고와 합세하여 반격을 가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즉각 이전의 부장들을 통해 군사를 모집하였다. 민애왕 원년 2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3월, 김양은 모집한 군사들을 이끌고 자신이 관할하던 전남 무주를 습격하였다. 무주 백성들이 환영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주를 장악하는데 성공한 김양은 내친 김에 남원으로 북상하여 지리산 운봉을 넘어 일격에 신라의 수도 월성을 치고자 하였다. 하지만 김양의 군대는 남원에서 신라 관군과 싸우면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였다. 먼저 급조된 병사들이라 위계 질서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조직력에서 많은 취약점을 드러냈다. 게다가 모집되자마자 급박하게 실전에 투입되느라 무기나 군량미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로 전투를 계속하다보니 부대의 사기가 현격히 저하되고 있었다.

상황을 판단한 김양은 일단 군사들을 치외 법권 지역인 완도 청해진으로 돌렸다. 청해진에서 지친 병마들을 쉬게 하고, 그 사이에 장보고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군량미와 무기를 확보하여 전열을 재정비할 셈이었던 것이다. 물론 무역 재개를 원하는 장보고로서도 이러한 김양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장보고는 이들에게 무기와 군량미를 대주고 이들의 쿠데타를 공인해줌으로써 중지되었던 무역이 재개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장보고는 먼저 산동 반도 청주에 있는 치청 절도사에게 현재 신라의 왕위 찬탈을 둘러싼 권력 투쟁 상황을 보고하고, 그를 설득하여 김우징의 망명 정부를 승인하게끔 만들었다. 당시 당나라의 책봉국이던 신라로서는 당나라의 공인 여부가 곧 정권의 전통성을 보장하는 외교적 인준 절차와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838년 7월, 김우징은 당나라 치청 절도사에게 노비와 더불어 사신을 파견하였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노비는 돌려보내고 김우징을 신라 왕으로 인준해주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10월 하순 경, 마침내 사자가 김우징의 신라 왕으로의 책봉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바로 그때, 즉 10월 19일에서 22일까지 3일간 밤마다 혜성이 나타나 광채나는 꼬리가 동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김우징에게 "이 상서로운 징조는 옛것을 제거하고 새것을 펴며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을 징조"라며 하례하였다. 1천년 신라 사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 임금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정통성은 이제 민애왕이 아닌 김우징에게 있었다. 하례를 받은 김우징은 그 자리에서 김양을 평동 장군으로 제수하고 민애왕 정권의 타도를 결의하였다.

당나라의 합법적인 승인을 받은 김우징은 그로부터 한 달이 조금 지난 838년 12월, 영산강 하류의 곡창 지역인 나주 철야현을 공략했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군량미의 확보가 전력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마침 무주의 김량순이 합류해왔다. 장보고의 무기 지원과 충분한 휴식, 그리고 김우징의 신라 왕 옹립과 때마침 나타난 혜성의 상서로운 징조, 여기에 군량미까지 확보한 김우징의 쿠데타 세력은 무주 공략때 남원까지 진출했던 경험을 살려 남원에서 지리산 운봉을 넘어 대구로 치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이듬 해 839년 정월, 대구에 이른 김양의 부대는 항거하는 신라 정부군을 무참히 공략해버렸다. 당시 정부군의 총대장은 김양과 4촌지간인 김흔이 맡고 있었다. 김흔은 헌덕왕 때 입당한 유학파였고, 한때 강주 도독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애왕과 신무왕의 패권 다툼이 강릉 김씨 4촌간에 피로 얼룩진 사투로 돌변하고 만 것이다.

대구 전투에서 김흔의 대병력을 격파한 김양은 기세당당하게 월성으로 진출하여 이궁으로 도망간 민애왕을 찾아내어 살해하였다. 그리고 피로 얼룩진 궁궐을 청소한 뒤 4월,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등극시켰다. 완도 청해진에서 망명하던 김우징 정부가 마침내 월성으로의 환도에 성공한 것이다. 앞의 그림은 청해진에서 월성을 탈환하기까지 세 차례에 걸친 김우징의 왕권 장악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1차 작전은 전남 지역 군사 요충지인 무주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2차 작전인 철야현 침공은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3차 작전은 최종 목적인 신라의 수도 월성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김우징이 왕권을 장악하는 데 있어서 병력 모집과 3차에 걸친 작전 수행은 모두 무주 일대에 연고권을 갖고 있던 김양이 주도한 것이었다.

그에 반해 김우징의 망명 정부에 대한 외교와 군비 지원은 장보고의 몫이었다. 먼저 장보고는 치외 법권 지역인 청해진에 들어온 김우징을 받아줌으로써, 김우징의 정치적 망명을 가능케 했다. 게다가 장보고는 당나라로부터 망명 정부를 공인받게 한 외교적인 공작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 결과 망명한 김우징 정권은 하루 아침에 정통이 되고, 월성 정권은 괴뢰 정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당시 오랫동안 책봉 체제로 길들어져온 신라 권력의 생리 구조였다.

마지막으로 장보고는 김우징 정권의 전쟁 부담금을 담당했다. 장보고는 교관선 2척에 회역선 1척 이상을 소유했던 보기 드문 해상 재벌이었다. 그래서 그는 해상 교역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투자의 일환으로 당시 무역으로 축적한 부의 상당량을 전비로 내놓았다. 2년여에 걸쳐서 김우징의 망명 정부가 동원한 무기와 군량 등 막대한 전쟁 비용을 장보고는 부담했다. 그런 까닭에 월성에 입성한 신무왕은 즉각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는 동시에, 식읍 2천 호를 하사하여 자신의 감사의 마음을 표하였다. 장보고 없는 김우징의 신문왕 등극이란 있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이처럼 김우징을 중심으로 한 청해진 망명 정부는 외교와 재정을 담당했던 장보고와 모병 및 작전을 지휘했던 김양으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진 일종의 정경 유착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ㅇ 무릇 섰다고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

839년 4월, 김우징은 신무왕으로 즉위하였다. <엔닌 일기>에 의하면 바로 그 무렵 엔닌은 일본 대사의 귀국선에서 이탈하여 풍파에 시달리면서 법화원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엔닌은 소천포에 당도한 4월 20일 새벽에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작은 배를 타고온 재당 신라인들이 포구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사람들에게 "장보고가 신라 왕자와 합심하여 신라국을 벌하였으며 왕자는 이미 신라국 왕이 되었다"고 알리는 광경이었다. 김우징이 월성으로 환궁한지 불과 20일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장보고의 승전보가 얼마나 신속하게 황해를 건너 교민 사회로 전달되었나를 알 수 있다. 장보고의 거사가 재당 신라인들의 이해 관계, 즉 신라의 통상 재개와 얼마나 깊이 맞물려 있었나를 실감하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엔닌은 장보고의 승전보를 들은지 불과 4일 만에 "대당 천자가 신라 왕자에게 왕위를 하사하기 위하여 신라로 보내는 사신들에게 선박을 마련하고 겸하여 녹까지 하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앞서 청해진에 망명한 김우징이 당나라의 책봉을 받기까지 3개월이 소요되었던 것과 비교한다면 전광 석화와도 같은 책봉사 파견이었다. 청해진의 장보고와 산동 반도 청주의 치청 절도사 사이의 치밀한 정보 라인 속에서 모든 일이 신속하게 처리되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무왕은 즉위하자마자 청해진 대사 장보고를 감의 군사로 봉하고, 식읍 2천 호를 하사하였다. 하지만 신무왕은 불행히도 즉위한지 불과 3개월만에 서거하고 만다. 그 결과 신문왕의 아들 문성왕이 그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문성왕은 아버지 김우징과 함께 청해진에 망명한 터여서 즉위(839년 7월)하자마자 장보고를 진해(鎭海)장군으로 삼고 겸하여 복장(服章)을 하사했다. 참고로 여기에서 장보고가 신무왕과 문성왕으로부터 부여받은 '감의군사'와 '진해장군'이란 직책은 신라의 벼슬이 아닌 당나라의 관작이다.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장보고는 신라인이 아닌 치청 절도사의 대사 자격으로 파견된 재당 신라인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장보고가 감의 군사와 진해 장군에 제수됨으로써 장보고와 청해진의 앞날은 쾌청한 가을 하늘처럼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는 문호를 개방할 터이고, 그렇게 되면 장보고는 신라 왕실과의 두터운 신뢰 관계를 이용하여 엄청난 무역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보고가 장좌리 상왕봉 기슭에 세웠다는 법화사도 아마 이때 만들어졌을 것이다. 물론 이 항해 사찰의 이름은 자신이 신라소 제1대사로 부임해 적산포에 세운 법화원에서 따온 것이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언제나 그렇게 호락호락한 법이 아니다. 문호 개방을 약속했던 신무왕은 즉위한지 3개월만에 서거하고, 그를 대신해 왕위를 이어받은 문성왕은 좀체로 문호를 개방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신무왕이 즉위할 때 불과 한 달이 채 못되어 책봉사를 파견했던 당나라는 문성왕이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책봉사 파견을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호사 다마라고 바로 이러한 정황에서 장보고에게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하는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그가 액운을 만난 것은 진해 장군으로 제수된 이듬 해 겨울이었다. 그 불행의 발단이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문성왕으로부터 부여받은 진해 장군이란 관작 때문이었다. <속일본후기>를 보면 당시 일본 큐슈를 관할하던 다자이후(大宰府)가 장보고의 일을 일본 조정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신라국 신하인 장보고가 사자를 파견해 방물을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일반 백성과 신하에게는 외교권이 없기 때문에 이들을 즉각 재당 신라인이 거주하는 진제이에서 추방했습니다.(<속일본후기> 840년 12월 27일자)

여기에서 말하는 진제이는 앞서 언급했던 하카타 항에 위치한 재당 신라인들의 거주지이다. 장보고는 이 해 7월, 문성왕으로부터 제수받은 진해 장군이란 관명으로 일본에 조공했다. 하지만 그것은 장보고에게 있어서 되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말았다. 당시 외교권은 한 나라의 국왕만이 행사할 수 있는 배타적인 고유 권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보고는 진해 장군이란 관명으로 조공함으로써 신라의 왕권을 농락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외교 분규를 일으킨 장본인은, 당시 장보고의 수하에 있던 이소정이라는 부하였다. 그는 장보고의 명을 받고 일본 큐슈 다자이후 측에 선물을 전달하다가 그만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하고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다. 아마도 장보고로서는 신라 왕실의 두터운 신뢰를 받게 되자 자신의 영역을 일본에까지 확대하고 싶었으리라. 그래서 일본과의 우의를 유지하기 위해 이소정을 통해 선물을 보낸 것인데, 이 과정에서 이소정이 그만 외교 분규를 일으키고 만 것이다. 이소정으로부터 자초 지종을 보고받은 장보고가 대노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보고의 분노는 사태를 진정시키기보단 오히려 사태를 겉잡을 수 없이 확대시키는 불씨가 되고 말았다. 장보고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은 이소정은 앙심을 품고 당시 무주 도독의 별가(비서)로 있던 염장에게 투항해, 월성으로 도망쳐 일본에서 있었던 외교 분규의 실상을 신라 조정에 밀고해버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문성왕과 장보고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장보고의 불운은 여기에서 그친 게 아니었다. 설상 가상으로 여기에 신라 왕실과의 외교 분쟁으로 비화된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사건은 일본과 외교 분규가 있었던 그 이듬 해 봄에 일어났다. 그리고 그 봄은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맞이한 마지막 봄이 되고 말았다. 문성왕 3년인 840년 봄, 월성에서 7등관 직급인 일길찬 홍필은 모반을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김우징처럼 치외 법권 지역인 청해진으로 망명하였다. 그런데 장보고는 홍필을 잡아 월성으로 압송하지 않고 그의 망명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신라로서는 치외 법권 지역인 까닭에 그를 잡아들이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아야만 했다. 아마도 장보고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홍필의 망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하지만 신라 조정에서 볼 때는 이 사건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만일 이러한 망명 사태가 계속될 경우에 제2, 제3의 김우징이 탄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점차 장보고의 힘이 강해지다보면 최악의 경우에 장보고를 매개로 한 치청 절도사의 압력이 점차 가속화되어 신라가 완전한 당나라의 속국, 아니 속주로 전락하게 될 위험조차 있었다. 치외 법권 지역인 청해진에 머물러 있는 장보고는 신무왕과 문성왕으로 이어지는 신라 왕권의 형성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공헌한 인물이었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왕권으로도 제압할 수 없는 위험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 결과 장보고의 게거는 신라 왕실의 정권 안보 차원에서 절대 절명의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ㅇ 장보고의 피살과 신라와 당의 외교 분규

청해진과 신라 조정의 관계가 이처럼 험악하게 돌아가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신라의 관리로서 당나라 연주도독부사마로 있던 김운경을 신라에 파견하였다. 장보고가 피살되기 4개월 전인 841년 7월의 일이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김운경을 신라에 파견하여 신라 측이 문호를 개방하면 문성왕을 책봉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미 신라 왕실의 마음은 장보고의 제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장보고를 계속 살려둘 경우에 제2의 김우징 사태와 문호 개방이 불가피해질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해진에 머물고 있는 장보고에 대한 위상 파악이 이루어지자 신라 조정은 당나라 측의 외교 공세에 전연 대응하지 않고 장보고 제거 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흥덕왕의 문호 개방 취소로 악연이 되었다가, 신무왕 옹립을 계기로 협력 관계로 돌아섰던 장보고와 김양의 관계는 다시금 악화 일로로 치닫기 시작했다. 김양은 월성 침공 직후 잠깐 동안 지금의 재무장관에 해당하는 창부령으로 재직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날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부령으로 있었다. 김양은 먼저 월성 침공 당시 여섯 부장 가운데 수석이던 염장을 택했다. 그리고 염장을 무주 도독의 별가로 임명하여 장보고를 제거하기 위한 사전 작업에 착수했다. 여기서 별가란 일명 장사로도 불렸던 주도독의 시종자를 일컫는 말로 신라에서는 이를 사마라 했다.

그런데 '까투리 설화'에 의하면, 엄장군은 장 장군의 사위로 설정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엄 장군은 염 장군의 오기이다. 이것은 장보고와 염장이 김우징의 청해진 망명 시절, 같은 우군이었음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장보고가 김양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의 심복이던 염장에게 자신의 딸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김양은 이처럼 장보고와 장인-사위라는 절친한 관계에 있던 염장을 이용해 장보고의 암살을 기도하였다. <신라 본기>에서는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염장이 나라를 배반한 것처럼 꾸며 청해진으로 망명하니 궁복(장보고)은 장사(염장)를 사랑하는 터라 아무런 의심없이 그를 맞이하여 상객으로 삼고 함께 술을 마시며 놀았다. 궁복이 취하자 염장은 그의 칼을 빼어 목을 베어버린 후 장보고의 무리들을 불러놓고 설득하니, 그들이 땅에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옛부터 사위는 백년 손님이라 하였다. 장보고는 오랫만에 찾아온 사위를 맞아 마음을 터놓고 회포를 풀다가 그만 어이없게도 사위인 염장의 칼에 맞아 운명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841년 11월의 일이다. 그런데 당시에 이루어진 암살은 적장의 목을 따다 바치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염장은 장보고를 비롯해 반항했던 부장 이창진과 장보고의 아들 등 청해진 수뇌들의 목을 베어 월성으로 가지고 갔을 것이다. 그 결과 청해진에는 이들의 목 없는 몸뚱아리만이 천년 동안 잡초 속에 묻혀 침묵을 지켜온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아직도 완도읍 장좌리 서쪽에 위치한 상왕산 기슭에 가면 '목 없는 맷' 또는 '장군 맷'으로 불리우는 다섯 내지 여섯개의 흙더미가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까투리섬 이야기라는 슬픈 전설과 함께.

어쨌든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암살로 신라와 당나라의 외교 관계는 무려 5년 동안이나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물론 문성왕에 대한 책봉도 이루어졌을리 만무했다. 하지만 요즈음 북한을 국제 사회로 끌어들이기 위한 4자 회담에서 보듯이, 외교란 결코 감정적인 대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장기간에 걸친 교착 상태는 신라나 당나라 어느 쪽에서도 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신을 먼저 파견한 것은 신라쪽이었다. <구당서>에 의하면 846년 2월에 신라는 사신 김국련을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당시 김국련은 장보고를 제거할 수밖에 없음을 변명한 자료를 가지고 입국했다.

그런데 이 자료에는 장보고가 자신의 딸을 신라 왕비로 만들려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반역을 꾀했으며, 장보고를 살해한 무주 별가 염장은 김양의 하수인이 아니라 단순히 의기 충천한 민간인으로 위장되어 있다. 그리고 장보고의 암살도 841년이 아닌 846년으로 되어 있다. 게다가 본문을 살펴보면 중국인들이 좋아하도록 중국 고사를 줄줄이 인용하면서 장보고의 제거를 정당화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쇠퇴 일로에 있던 당나라로서는 진상을 파악하고 있다 하더라도 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왈가 왈부할 형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장보고는 당나라로서도 껄끄러운 재당 신라인이었다. 그런 까닭에 신라 측의 공식 사과로서 상황은 종료되고, 나당 관계는 급전하여 해빙 무드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엔닌일기>에 의하면, 김국련의 입당 다음 해인 847년 윤 3월 10일, 김간중과 왕박 등이 청주 모평현 남쪽의 유산포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이때 당나라는 6년 전에 서거한 신무왕과 그를 계승한 문성왕의 즉위를 한꺼번에 승인하는 조문-책봉사를 파견했다. 엔닌이 귀국하면서 잠시 머물렀던 구축도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이때 조문`-`책봉사의 규모는 무려 500명에 달하는 맘모스 사절단이었다. 이로써 장보고 제거 후 6년이나 계속되어온 나당 간의 외교 분규는 완전히 종식되고 만다.

하지만 이처럼 장보고를 둘러싼 나당 간의 외교 분규가 종식되었어도 신라는 곧장 청해진을 폐쇄하지는 못했다.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 때문이었다. 신라에서 청해진이 폐쇄된 것은 나당 간 외교 관계가 재개되고서 4년이 지난 문성왕 13년 2월에 이르러서였다. 신라는 장도에 있던 청해진을 폐쇄하고, 이곳 장도를 중사처로 지정하였다. 당시 신라에는 나라의 제사를 모시는 장소로 대사가 3곳, 중사가 23곳, 그리고 소사가 24곳이 있었다. 신라는 장도를 이처럼 나라의 제사를 관장하는 중사처로 지정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장도에 대한 당나라 측의 연고권을 봉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장도에 있던 청해진 사람들을 오늘날 전북 김제인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

이처럼 장보고가 제거된 뒤에 청해진이 폐쇄되었다는 것은, 청해진이 신라 자체의 해운력에 의해 성립된 것이 아니라, 재당 신라인 출신인 장보고가 치청 절도사의 보호 아래 청해진에 진출함으로써 이루어졌음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장보고는 8~9세기 동아시아 해상 무역을 주도한 재당 신라인으로서, 당시 이들의 무역 독점을 우려한 당나라 조정의 정책에 따라 청해진 대사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신라인도 아니고 당인도 아닌 그러면서 당나라 관직을 받고 신라에서 활동한 장보고의 미묘한 위상은 그를 청해진 대사로 만들어주어 한 때의 영광을 꽃피우게 했다. 하지만 장보고는 결국 자신의 미묘한 위상 때문에 신라와 당나라 양국으로부터 버림받아 천 년을 넘게 장좌리 상왕봉 기슭에 '목 없는 맷'이란 이름으로 잡초 속에 파묻혀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청해진 대사로 활동하다가 쇠락하는 신라 정권에 연루되어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한 장보고가 재당 신라인에게 남긴 화두는 '토착화'였다. 그런 까닭에 이 토착화라는 화두는 장보고에 이어 개성 상인의 실질적인 대부가 된 왕건을 조망하는 중요한 포커스로 대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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