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최근 해상왕 장보고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지만 인터넷 홈페이지 "http://www.berlinreport.com/gowithu/h_story/watercity/watercity.htm"에 실린 내용만큼 날카로운 분석이 없다고 생각되어 윗 글을 적극 추천하며 원문 그대로 게시하는 바입니다. 저작권 침해를 이유로 원저작자님의 삭제요청이 있을 시에는 즉각 삭제토록 하겠습니다. ㅇ 까투리섬 설화에 얽힌 에피소드 통일 신라 시대, 우리 나라의 기상을 세계에 떨친 인물로 대표적인 두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도 대개는 파르미 고원을 넘어 실크 로드를 개척한 고구려계 유민 고선지 장군과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한 장보고를 선택할 것이다. 특히나 장보고는 우리에게 해상왕=장보고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어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은 모두 신라인이 아니다. 청해진으로 알려진 전남 완도항에서 대략 북쪽으로 7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조금도' 또는 '장군섬'이라 불리는 장도(將島)라는 섬이 하나 있다. 그런데 청해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성터의 자취는 왠일인지 완도항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이곳 장도에 판축(板築) 토성의 형태로 남아 있다. 더욱이 해안 목책을 비롯하여 뫼당터, 우물, 목 없는 뫼터, 법화사지 등 청해진과 관련되는 모든 유적.유물과 여러 가지 전승 및 관련 지명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곳 장도와 이 섬에서 서쪽으로 200여 m 정도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는 완도읍 장좌리 일대에 한정되어 나타나고 있다.(최근영.민덕식, '청해진의 역사적 고찰과 그 성의 분석', <장보고의 신연구>, 완도문화원, 1985, pp.221-222.) 장도는 해발 42m의 작은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섬 둘레 1,296m, 면적은 약 10정보의 작은 섬이다. 그리고 경작 면적은 겨우 1정보 남짓해 농가 한 채도 살기 어렵다. 게다가 우물도 바닷가에 있는 옹달샘이어서 썰물 때만 이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섬의 지형이 바다를 향하고 있는 동남쪽은 높고, 육지를 향하고 있는 서북쪽으로는 낮은 데다 장좌리까지는 불과 200여 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 까닭에 밀물 때는 섬이지만 썰물이 되면 거의 육지와 이어져 있다. 거기에다 섬 근처의 수심도 불과 1-2m 내외여서, 항구는 물론 해포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구비 조건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한 곳이다. 그런데 이곳 장도에서 서북쪽으로 대략 200여 m 떨어진 완도읍 장좌리의 서쪽에 위치한 상왕봉 기슭에 가보면 "장보네 묘", "목 없는 맷" 또는 "장군 맷"으로 불리우는 여섯 개 가량의 고총이 전승되어온다. 만일 여러분이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올라 상왕봉 기슭에 다다르면 아마도 대여섯 개 가량의 흙더미가 잡초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완도군지>에 의하면, "목 없는 묘는 장 장군의 묘요, 그밖의 5기는 그의 선친 양위와 근친 선대의 묘임이 틀림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이곳에 가면 '까투리섬'이라는 재미있는 설화가 하나 전해온다. 아주 먼 아득한 옛날, 완도읍에는 엄 장군과 그의 장인 장 장군이 살고 있었다. 엄 장군은 가용리 엄나무골에 살았고, 장 장군은 장좌리 장도에 살았다.... 장인과 사위는 사이가 좋아 이따금씩 서로 내기하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어느 날 하루는 해뜨는 시각을 기준으로 장도에서 건너다 보이는 동쪽 까투리섬에 누가 먼저 깃대를 꽂나 내기를 했다. 그런데 두 장군은 모두 재주와 도술에 뛰어났다. 그래서 장 장군은 까투리로, 그리고 엄 장군은 매가 되어 앞에 보이는 섬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매가 된 엄 장군은 날아가는 도중에 마음이 변하여 까투리가 된 장 장군을 그만 잡아먹고 말았다. 지금도 고금면 상정리 서해에 있는 섬을 까투리섬, 혹은 까튼섬, 또는 같은섬으로 부르는데, 그 섬 이름의 유래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역 등 해조류가 많이 나는 이 지역 이웃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일하러 갈 때, 장인과 사위가 동행하는 일이 있으면 액을 만난다 하여 이를 피한다고 한다.(<완도군지> 8편) 그런데 대개 설화란 역사적 사실을 은유화해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은유는 그것이 실명화될 경우에 야기되는 압력, 즉 권력의 외압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까닭에 설화는 해석하기에 따라 때로는 집권자의 권력 의지가 반영되면서 왜곡·굴절되는 정사보다 더 많은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해상왕 장보고와 이 까투리섬 설화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인간 장보고의 출생과 죽음에 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ㅇ 번진 발호의 종식과 장보고의 등장
ㅇ 신라방과 신라소 베네치아의 상인이던 마르코 폴로는 글도 모르던 무지랭이인데다, 동양의 문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해 불교를 우상 숭배로 치부하던 서양의 오랑캐에 불과했다. 하지만 엔닌은 중국 문화와 불교 교리를 전수받은 당대 1급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마르코 폴로보다 더 훌륭한 편력의 업적을 남겼으며, ...<엔닌일기>는 모험으로 가득찬 경험을 하루하루 명료하게 기록한,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유니크한 문헌이다.(E.O.라이샤워, 조성을 역, <중국 중세사회로의 여행>, 한울, 1996, pp.13-14.) 하지만 <엔닌일기>는 중국 당나라의 기록보다는 오히려 당시 동아시아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재당 신라인들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는 보기 드문 문헌이란 점에서 우리에게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 <엔닌일기>에 의하면, 신라소는 산동 반도 문등현에 있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은 문등현뿐만 아니라 초주와 연수현에도 있었는데, 그곳은 신라방(新羅坊)이라 불렸다. 조용조는 인구 수를 근본으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원(713-41) 이후 나라의 호적이 오랫동안 고쳐지지 않은 채 백성들은 전출하거나 전란으로 사망하고, 전토는 매매되어 예전 기록과 다르게 되었다. 게다가 국가 예산이 절약되지 않은 상황에서 안사의 난과 번진이 발호함으로써 국가 재정은 날로 궁핍해지고 조용조 세법은 무너지고 말았다.
ㅇ 신라번과 진제이 절동 관찰사 설융은 삼가 아뢰옵니다. ...당도의 명주에서 70여 리 떨어진 망해진에서 굽어 보이는 대해 동쪽에서 신라·일본 제번(諸蕃)이 서로 경계를 접하고, 문서에 근거하여 명주에 속하지 않겠다고 청원하였습니다. 황제는 이를 허락하다.(<당회요>, 권78, 제사잡록上, 元和 14년(819) 8월조.) 설융은 행정 정비의 일환으로 명주 망해진(현재의 진해)에서 굽어 보이는 3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주산 군도를 명주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곳 주산 해민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며 편입을 거부하자, 당황한 설융이 묵종에게 품의를 올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주산 해민들의 주장은 공식 문서에 근거한 정당한 요구였기에 묵종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청원을 승인해야만 했다.
|
ㅇ 장보고의 적산 법화원 창건 <엔닌일기>에 따르면 재당 신라인의 자치 기구인 신라소의 행정 조직은 대사를 비롯해 그 밑에 신라 역어와 전사(專使), 그리고 짐꾼인 단두(團頭)와 연락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사무실과 전용 선박도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신라 역어란 재당 신라인으로서 중국어와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아는 통역 요원을 말한다. 당시 자치 기구의 책임자인 대사의 임무는 관할 구역 내 재당 신라인의 호구를 관할하고 상세의 징수와 함께 이들의 출입국 사무를 관장하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당시 조정으로서는 이런 대사 직분에 어울리는 재당 신라인이면서도 친 정부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을 찾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조건에 재당 신라인이면서도 친 정부 세력인 왕지흥 군의 군중 소장을 역임하고 있던 장보고보다 적합한 인물은 없었다. 그 결과 번진 발호가 종식된 819년 2월, 장보고는 등주 문등현의 신라소 제1대사로 발탁되기에 이른다. 신라소 제1대사로 부임한 장보고가 가장 먼저 시작한 사업은 적산포에 법화원을 창건하는 일이었다. 오늘날처럼 선박 건조 기술과 항해 기술이 발달되지 못해 항해할 때 바람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던 시절, 항해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이 말 그대로 가미카제(神風)에 달려 있음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해상 무역의 중심지에는 순풍 항해를 기원하는 항해 사찰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 까닭에 재당 신라인의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설치한 문등현 신라소의 제1대사로 부임한 장보고로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문등현 재당 신라인들의 출항지인 적산포에 항해 사찰을 세움으로써 이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창건된 것이 바로 법화원(法花院)이었다. 법화원은 현재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 서차각하촌(西車脚河村)의 해발 3백여 m의 척산(尺山) 중턱에 위치해 있다. 엔닌은 그의 일기에서 적산 법화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적산(赤山)은 순전히 암석으로 치솟은 곳이며, 문등현 청령현 적산촌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그 적산 뒤에는 절이 하나 있는데, 이를 적산 법화원이라 한다. 이 절은 장보고가 세운 것으로, 오랫동안 소유해온 사찰 전답으로 식량을 충당해왔는데 1년에 대략 500석을 얻는다고 한다. 겨울과 여름에 강론하며 겨울에는 <법화경>을, 여름에는 <팔권금광명경>을 연장자가 강론한다. 사원의 남북으로 바위 언덕이 있으며, 샘물이 사원 마당을 가로질러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사원의 동쪽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남서쪽으로는 멀리 트였다. 북쪽은 산봉우리들이 이어져 병풍을 이루고, 서남쪽 귀퉁이는 경사져 있다. 지금은 신라 통사(通事=역어)인 압아 장영(張詠)과 임(林) 대사 및 소촌(邵村) 담당인 왕훈 등이 전적으로 관리한다. 엔닌이 법화원을 방문했을 당시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로서 신라에 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 법화원의 신라소 책임자는 임 대사와 신라 역어 장영, 그리고 소촌 담당인 왕훈에 의해 공동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엔닌일기>에 의하면, 당시 법화원의 승려는 30여 명이었고, 11월 16일부터 이듬 해 정월 15일까지 2개월간 계속되는 겨울철 법회에 합숙한 남녀 신도는 무려 250명에 달했다.
ㅇ <엔닌일기>에 나타난 재당 신라인의 추석 풍속도 8월 15일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신라만의 독특한 명절이다. ...수많은 음식을 차려놓고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추기를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계속한다. 법화원은 고국을 추모하여 오늘을 명절로 삼았다. ...신라가 발해와 싸워 이 날 승리를 쟁취한 까닭에 이 날을 명절로 삼아 즐겁게 춤추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엔닌은 재당 신라인들이 기념하는 8월 15일을 추석이 아닌 신라가 발해와 싸워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 말하고 있다. 신라 성덕왕 32년인 733년 7월, 발해-말갈 연합군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 산동 반도의 등주를 침공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신라는 당나라의 원군 요청으로, 김사란을 함경도 방면으로 출병시킨 적이 있었다.
ㅇ 재당 신라인의 항해 사찰과 8-9세기 동아시아 3대 무역 항로
ㅇ 재당 신라인의 해상 교역과 무역 마찰 어리석은 백성들이 가산을 기울여 수입품을 매매함에 따라 가격이 뛰고, ...대신 국내의 귀한 상품들은 천해지니, ...외국 상인들이 입항하거든 선상의 모든 물자를 통보하게 하고, 정해진 물품을 정부가 먼저 수매하게 한 다음 부적합한 사치품은 관청이 감찰하여 각 상품의 귀하고 천함에 따라 가격을 매겨 교역하게 하되 이를 어기는 자는 엄중히 처벌하도록 하라.(<유취삼대격> 744년 5월 17일자) 당시 이들 재당 신라인에 의해 들어온 수입 사치품에 대한 일본인들의 투기는 자국의 물가 체계마저 붕괴시킬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 조정에서는 물가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수입품에 대해 선매권을 행사하고서, 그 나머지 사치품들은 가격 통제를 통해 과도한 사치품 수입을 억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ㅇ 당나라와 재당 신라인의 파워 게임, 청해진 설치 해적들이 약탈한 신라의 양민들이 제가 관할하는 등주와 내주 및 연해 지역 일대에서 노비로 매매되고 있습니다. ...노비 매매는 칙령에 의해 금지되었지만, 이곳은 오랫동안 이씨 일가에 속해 있어서 법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습니다.(<당회요>, 권86, 노비조 821년 3월.) 그리고 다시 1년 후인 822년 12월에 입당한 신라 사신 김주필도 묵종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하고 있다. 신이 등주에 도착해보니 노약자들이 거처할 집이 없어 대부분 향촌 해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 귀국하고자 하나 선박이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국 각지의 해안 관청에 통첩을 내리시어 매번 선편이 있을 때마다 귀환할 수 있도록 편의를 돌봐주시고 이를 제약하지 않도록 명을 내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당회요>, 권86, 노비조) 몇년전 남대문 지하 상가에 줄지어 앉아 있던 조선족 교포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그러자 묵종은 즉각적으로 신라 노비와 표착자의 귀환 조치를 취했다. 822년의 일이다. 하지만 정부의 노비 근절령이 하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당 신라인들은 여전히 신라인에 대한 인신 매매를 계속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번진 발호로 중앙 정부의 통제가 느슨해진 틈을 이용해 동지나해를 완전 장악함으로써 당시 동아시아의 무역을 통한 수익은 당나라 정부가 아닌 이들 재당 신라인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대당 치청 절도사 강지일의 교통지사에 의하면 날씨가 좋지 않아 기간을 어긴 경우는 도망한 죄가 아니다. 지금 돌아가고 싶지만 보다시피 배는 파손되었고, 식량마저 떨어졌으니 바라건대 선박과 식량을 좀 도와 달라." 여기에서 발해국 대사는 일본 관리에게 자신이 도움을 청하는 근거로 대당 치청 절도사 강지일의 교통지사를 들고 있다. 물론 여기서 강지일( )은 강지목(睦)의 오기이다. 청주 첩지에 따라 항해중인 선박에 양식을 적절히 지급하여 본국으로 방환한다. 여기서 말하는 청주 첩지는 물론 산동 반도 청주에 있던 치청 절도사를 지칭한 것으로, 앞서 발해 대사가 말한 교통지사와 같은 것이다. 이처럼 당나라에서는 827년, 치청 절도사 강지목을 통해 당시 교역국이던 발해와 신라, 그리고 일본에 교통지사를 통보하였다. 그리고 신라에 중국으로 사신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 해인 828년 2월에 신라 사신이 입당하자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할 것을 지시하고, 4월에는 신라소 제1대사 경험이 있는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난 10월, 최후의 노비 근절령이 하달되었다. 이처럼 당나라는 교통지사를 통보하여 동아시아 각 국간의 항해 조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당나라 산동 반도와 일본 큐슈를 잇는 적산 항로의 중간 지점인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함으로써 당시 쇄국 정책을 취하고 있던 신라를 동아시아 무역 시장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
ㅇ 청해진 대사 장보고 한편 신라에 도착한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가 되어 신라의 흥덕왕을 예방하였다. 828년 4월의 일이다. 장보고의 예방을 받은 흥덕왕은 당시 신라를 외교적으로 통제하던 치청 절도사 소속의 대사 자격으로 온 장보고의 요청에 따라 완도를 청해진으로 개방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당시 신라에서는 이러한 진을 설치할 경우에 해당 진에 1기 군 정도의 행정 권역을 주어, 그곳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여 행정 기구로서의 재정적 자립 기반을 마련하게 하는 것이 상례였다. 하지만 청해진의 경우에는 진만 설치했을 뿐, 그에 따른 행정 권역을 별도로 할당해주지는 않았다. 청해진의 재정은 교관선 무역에서 얻은 수익으로 조달할 것이기 때문에 수세 기반으로서의 토지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항구와 거주지 및 항해 사찰 등을 건축할 주거용 부지는 허락되었다. 그런데 당시 완도는 주인 없는 무인도가 아니라 사유지였다. 실례로 엔닌은 귀국할 때 기착했던 전남 다도해 지역의 고초도를 "신라국 제3재상의 방마처"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제3재상이란 오늘날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부령을 말하고, 방마처란 말을 방목하여 키우는 곳을 말한다. 그런데 당시 여천군 돌산면 앞바다의 안도도 신라 왕실의 방마산이었으며, 그 근처에는 황룡사의 사찰 전답(장원)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부산 절영산도 신라 왕실의 방마장이었다. 이처럼 당시 서남 해안의 수많은 섬들은 신라 귀족 내지 권부의 개인적인 사유지였으며, 이들은 섬들을 그들의 장원이나 방마처 내지 사냥터로 사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신라의 토지 제도는 이미 개인 소유가 이루어져 거래되고 있었다. 전남 담양군 남면 학선리에 위치한 개선사(開仙寺)의 석등(보물 제111호)을 보면 통일신라 시대 정부 예산으로 경문왕과 문의왕후 및 왕녀의 발원으로 세워진 석등의 유량답(油糧畓)을 매입한 토지 문건이 기록되어 있다. 용기 3년(891) 신해 10월 모일, 승려 입운은 서울로 보낼 나락 100석으로 오호비소리의 공서(公書), 준휴(俊休) 2인으로부터 석보평 대업저의 논 4결과 ...오답(奧畓) 10결을 나누어 매입했으며, 휴전(畦田) 남쪽은 지씨 땅이고, 동쪽은 영행의 땅, 그리고 서북쪽은 같다.(旗田魏, '新羅 高麗의 田券',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6, p175-207.) 이처럼 사유권이 성립된 까닭에 흥덕왕은 비록 청해진을 개방하기는 했지만, 이미 사유화되어 있는 토지까지 마음대로 하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까닭에 당시 왕이 토지를 주려면 우리가 '식읍(食邑)'이라 부르는 일정한 면적의 수세권을 주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경우에 하사량은 토지 면적 대신에 식읍에 거주하는 호수로 표시된다. 청해진에 망명했던 김우징이 신무왕으로 등극하고서 장보고에게 하사한 식읍 2천 호가 그 좋은 예이다. 사람에게는 모름지기 위와 아래가 있고, 지위에는 귀하고 천함이 있어, 명칭과 법식이 같지 않고 의복도 다르다. 그럼에도 풍속이 점차 각박해지고,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호화 수입품만 귀히 여기고, 우리의 토산품을 천하다며 싫어하니, 예절(신분 간의 차이)이 없어지고 풍속이 파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에 옛법에 따라 분명히 명하노니, 그래도 만일 일부러 범하는 자에 대해서는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이때에 골품별, 남녀별 및 관등별로 제한된 사치 품목은 의복, 장신구, 수레, 집기 및 가옥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품목이 망라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품목들 가운데는 공작미, 대모, 비취모, 자단, 심향 등 동남 아시아산과 슬슬세, 구수 등 아랍산 수입품도 들어 있었다. 모두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사치품들이다. 그 결과 신라의 문호 개방은 완도 청해진이 설치되고서 겨우 6년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그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동안 쇄국 정책으로 산업 경쟁력이 취약했던 신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앞서 살펴 보았던 것처럼, 일본은 수입품에 대해 가격 통제로 맞섰지만 신라는 아예 문호를 폐쇄해버린 것이다.
ㅇ 청해진에 망명한 김우징 외짝새도 짝을 잃은 슬픔이 있거늘, 하물며 좋은 배필을 잃고서랴? 흥덕왕은 시녀조차 접근시키지 않고 오직 환관들만으로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흥덕왕의 이러한 편벽증에 가까운 사랑으로 신라는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후사가 없었다. 이처럼 직계 왕통의 단절이 명확해지자 점차 권력에 혈안이 된 종친들이 왕위 쟁탈전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파워 게임의 주역은 흥덕왕의 종제였던 김균정과 또 다른 종제(헌정)의 아들인 당질 김제륭이었다. 당시 종제파에는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과 무주 도독 김양이 가세하였고, 당질파에는 흥덕왕의 조카였던 김명을 비롯하여 이흥과 배훤백이 가세함으로써 골육 상쟁으로 치달았다.
ㅇ 김우징을 이용해 청해진의 부활을 꿈꾼 장보고
ㅇ 무릇 섰다고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 신라국 신하인 장보고가 사자를 파견해 방물을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일반 백성과 신하에게는 외교권이 없기 때문에 이들을 즉각 재당 신라인이 거주하는 진제이에서 추방했습니다.(<속일본후기> 840년 12월 27일자) 여기에서 말하는 진제이는 앞서 언급했던 하카타 항에 위치한 재당 신라인들의 거주지이다. 장보고는 이 해 7월, 문성왕으로부터 제수받은 진해 장군이란 관명으로 일본에 조공했다. 하지만 그것은 장보고에게 있어서 되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말았다. 당시 외교권은 한 나라의 국왕만이 행사할 수 있는 배타적인 고유 권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보고는 진해 장군이란 관명으로 조공함으로써 신라의 왕권을 농락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ㅇ 장보고의 피살과 신라와 당의 외교 분규 염장이 나라를 배반한 것처럼 꾸며 청해진으로 망명하니 궁복(장보고)은 장사(염장)를 사랑하는 터라 아무런 의심없이 그를 맞이하여 상객으로 삼고 함께 술을 마시며 놀았다. 궁복이 취하자 염장은 그의 칼을 빼어 목을 베어버린 후 장보고의 무리들을 불러놓고 설득하니, 그들이 땅에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옛부터 사위는 백년 손님이라 하였다. 장보고는 오랫만에 찾아온 사위를 맞아 마음을 터놓고 회포를 풀다가 그만 어이없게도 사위인 염장의 칼에 맞아 운명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841년 11월의 일이다. 그런데 당시에 이루어진 암살은 적장의 목을 따다 바치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염장은 장보고를 비롯해 반항했던 부장 이창진과 장보고의 아들 등 청해진 수뇌들의 목을 베어 월성으로 가지고 갔을 것이다. 그 결과 청해진에는 이들의 목 없는 몸뚱아리만이 천년 동안 잡초 속에 묻혀 침묵을 지켜온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아직도 완도읍 장좌리 서쪽에 위치한 상왕산 기슭에 가면 '목 없는 맷' 또는 '장군 맷'으로 불리우는 다섯 내지 여섯개의 흙더미가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까투리섬 이야기라는 슬픈 전설과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