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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로 근무하던 대학병원 응급실, 당시 한 해 9만여 명의 환자가 내원하고 있었으니 아마 일 년간 한 전공의가 직접 진료하는 환자의 수는 어림잡아 만오천 명가량 되었을 겁니다. 그 많은 환자들을 보다 보면 종종 환자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게 하거나 심한 경우 그 생명을 놓치는 경우가 생깁니다. 한참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씩, 아직도 뇌리에 박혀 죄송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 없는 환자분들이 떠오릅니다.
병원의 외래진료가 끝나고 환자가 몰리기 시작하는 평일 저녁시간, 이미 혼잡해진 응급실에 정규 침상은 진작 모두 차 버리고 추가 침상으로 이중삼중 새로운 줄이 만들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70대 할아버지 한 분이 복통이 심하다며 응급실로 실려 들어오셨습니다.
이미 많은 환자를 배정받은 상태였지만 카트에 실려 들어오는 환자를 무시하고 있을 순 없었습니다. 접수도 되지 않았지만 일단 먼저 다가가 초진부터 진행해보니, 심한 복통이 있었고 구토 한번 외엔 특별히 다른 증상은 없었습니다. 환자는 전날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했는데 체한 느낌이라고 하였습니다. 복부 진찰을 위해 러닝셔츠를 걷어보니 할아버지의 배가 약간 불러와 있었고 복통이 심한지 배에 힘을 주고 있었습니다. 원래 배가 이 정도 있었는지 묻자 같이 오신 부인과 따님은 할아버지 배가 원래 좀 나온 편이라며 평소에도 이 정도는 불러 있었다고 했습니다.
일단 체했거나 장염일 가능성이 있지만 구토 한 번만 가지고는 장염이라고 속단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70 노인이 이렇게 심한 복통을 호소하는 경우, 복통의 원인으로 담낭염, 충수돌기염, 복막염, 대장암 같은 복부 자체의 문제인 경우도 있고, 심근경색이나 대동맥박리 같은 혈관 질환인 경우도 배제할 수 없어 넓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검사를 진행해야 했습니다. 먼저 수액과 진통제를 처방하고 혈액검사를 시행하도록 오더를 입력했습니다. 그리고 결과에 따라 복부 CT를 확인할지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또 혹시 모를 심근경색에 대비해 인턴 선생님에게 심전도를 먼저 찍어달라 하였습니다.
잠시 후 인턴 선생님이 가져온 심전도는 빠른 맥박과 함께 부정맥 소견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심방세동이라는 흔한 부정맥으로 노인이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환자에게서 자주 보이는 부정맥입니다. 심장을 뛰게 만드는 전기 신호를 처음 만들어내는 동심방결절이 전기신호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그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심방 이곳저곳이 제각각 전기신호를 만들어내면서 발생하는 불규칙한 부정맥입니다. 이 부정맥이 발생한 경우 부르르 떠는 심방에서 피딱지와 같은 혈전이 잘 생기게 되고, 혈관을 타고 몸 이곳저곳으로 날아가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뇌혈관으로 가면 뇌경색, 심혈관으로 가면 심근경색, 간혹 장간막동맥으로 가게 되면 장간막경색증이 발생해 심각한 후유증을 만들기도 합니다.
일단 할아버지의 심전도가 심근경색 소견이 아니란 것을 확인한 이후 나머지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두 시간 동안, 솔직히 말하건대 할아버지는 제 기억에서 잊혀 있었습니다. 저는 계속 밀려 들어오는 새로운 환자의 진찰을 하고 오더를 내고를 반복하고 있었거든요. 할아버지의 경과를 자주 확인해서 X-ray 결과를 확인하고 복통이 더 심해졌다면 복부 CT를 먼저 진행하기로 하는 등의 발 빠른 대처가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두 시간이 되어갈 무렵, 저는 여러 환자의 결과를 확인하며 한 명 한 명 퇴원을 결정하거나 입원조치를 위해 해당과 전공의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뛰고 있던 제 한쪽 손에는 그 할아버지의 결과지도 함께 들려 있었지요. 아직 검사 결과를 확인하지 못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응급실 한쪽이 혼잡스러워졌습니다. 할아버지가 있는 자리에 커튼이 쳐지고 3년 차 전공의 선배가 뛰어 들어갔습니다. 급히 따라 들어가보니, 할아버지는 의식이 없어져 있었고 빠르게 뛰던 심전도 파형은 어느새 아주 느려져 거의 의미 없는 전기신호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제가 맡은 환자인 할아버지의 심장이 갑자기 멈춰버린 것이었습니다.
부랴부랴 기관삽관을 하고 심폐소생술을 시작했습니다. 이유도 모르고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슴이 부서지도록 열심히 가슴압박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족들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고 3년 차 선생님은 환자 가족을 진정시키면서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급히 연락을 받은 당직 교수님도 응급실로 뛰어들어와 상황을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 사이 확인한 혈액 검사에서는 큰 이상 소견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시간 전, 초진 후 진작 찍었던 복부 X-ray 결과는 심한 장폐색 소견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심방세동으로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인 장간막경색증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를 빨리 파악했더라면 먼저 복부 CT를 찍고 장간막경색증을 확진해 혈전을 녹이는 주사를 사용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는 두 시간 동안 할아버지의 존재를 잊고 있었고, X-ray 검사 결과를 확인하지 못해 그 결정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한번 멈춘 할아버지의 심장은 다시 뛸 줄을 몰랐습니다. 심폐소생술을 지속한 지 30분이 넘어가고 거의 한 시간이 되어갈 무렵, 교수님의 설명을 들은 가족들은 심폐소생술을 그만 중지해달라고 하였고 그렇게 할아버지 이마 위로 흰 천이 씌워졌습니다.
의사로서 주치의를 맡은 환자의 생명을 놓쳤다는 생각에 저는 심한 죄책감에 빠졌습니다. 게다가 상황이 모두 끝난 뒤에 도착한 아드님은 멀쩡하게 응급실에 들어오셨던 아버지가 사망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교수님의 멱살을 잡곤 분노에 찬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아드님의 분노가 저를 향한 것만 같아, 다른 환자의 결과를 확인하느라 컴퓨터 앞에 서 있었지만 화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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