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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공동체> 저자 베네딕트 앤더슨 돌아가셨네요
게시물ID : history_2455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잠룡815
추천 : 10
조회수 : 78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12/15 18:30:41
오유에서도 이분 언급하는 경우가 많아

관련기사 본김에  올려봅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1812

"사랑하는 사람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베네딕트 앤더슨을 보내며] 나라 없는 남자의 죽음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 2015.12.15



▲ 젊은 시절의 베네딕트 앤더슨. ⓒwikipedia.org


정치학자·역사학자·제3세계 연구자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12월 12일 저녁 강연차 방문한 인도네시아에서 죽었다.

1936년생인 앤더슨은 1957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문학사를 마친 뒤, 미국 코넬 대학교로 옮겨 1967년 인도네시아 독립 투쟁과 국민 국가의 형성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다. 그는 아시아와 남미 국가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국민주의(nationalism)를 결합시킨 "국민은 상상된 정치적 공동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우리나라에서 베네딕트 앤더슨은 '탈민족론의 거두'로 오해받아왔는데, 이는 '국민'을 뜻하는 nation을 '민족'으로 잘못 번역한데서 연유한다. nation을 언제나 모든 맥락에서 '국민'으로 번역할 수는 없다. '민족'으로 번역해야 맥락이 이해될 때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nationalism은 민족주의가 아닌 국민주의로 번역해야, 역사적 현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베네딕트 앤더슨의 이론을 '탈민족론'으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가 말한 상상되고 기획되어진 공동체는 '민족'이 아니라 '국민'이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국민(nation)의 개념을 제한·주권·공동체라는 세 가지 상상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상상은 거짓이나 사기를 뜻하는 게 아니며, 오랜 시간 걸쳐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인식의 산물'이라는 의미다. 제한(limited)은 영토와 국경이라는 공간적 측면이다. 주권(sovereign)은 국가 권력이 신의 의지나 핏줄에 따른 종교적·신분적 질서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로 존재해야 한다는 정치적 측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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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처럼 단일 민족이 단일 국민을 이룬 경우는 세계적으로 대단히 드물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다민족이 하나의 국민을 이룬다. 고려 시대부터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되기 시작한 한반도의 주민들은 한민족(韓民族)을 이뤘고, 120여 년 전 대한제국을 경과하면서 하나의 국민적 실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남북 분단으로 하나의 민족이 두 개의 국민으로 분열되어 고착되는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사랑한 인도네시아 국민은 20세기 중반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수백 개가 넘는 잡다한 민족들이 네덜란드 식민지 주민으로 살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종식을 계기로 하나의 국민으로 주조(鑄造)되었다. 국민은 다양한 민족을 하나로 묶는 도가니였다. 이 때문에 베네딕트 앤더슨은 "문제는 (국민들 사이에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어떤 공통된 상상이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공통된 상상이 만들어지는가"라고 역설했다.

민족 모순(national contradiction)과 계급 모순(class contradiction)이 얽히고설킨 한반도의 역사와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인식론의 정립이 중요했고, 구체적으로는 민족-국민-국가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립이 절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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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주의 연구자로서 베네딕트 앤더슨이 속한 나라(nation)가 어딘지를 말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앤더슨은 대영제국을 떠돈 아이였다. 1936년 중국 쿤밍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계 영국인이었던 아버지는 세금을 걷는 제국의 기관인 중국 해양세관에 근무했다. 1941년 일본 제국이 중국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자 가족은 캘리포니아로 도망갔다. 1945년 아일랜드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자기 조상의 땅에서 모호한 지위를 점했다. 가계(家系)의 한 갈래는 오랜 경력의 아일랜드 민족주의자(nationalists)였지만,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서 그들은 아일랜드 민족(nation)의 핵심인 가톨릭 정체성 없이도 명망을 누리는 특권 소수자로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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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수하르토 쿠데타 이후 학살당하는 인도네시아 공산당 지지자들. ⓒwordpress.com


1965년과 1966년 사이, 인도네시아는 반혁명 폭력에 휩싸였고, 이는 1967년 미국이 지원한 반공 독재자 수하르토의 권력 장악으로 이어졌다. 이어진 숙청 과정에서 60만 명에서 100만 명에 달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대부분은 공산당 지지자들이었다. 인도네시아 군부가 학살 대상을 고르는 과정에 깊숙이 참여했던 미국 중앙정보부는 1968년 비밀 해제한 자료에서 "20세기 최악의 대량 학살 중 하나"로 명명했다.

수하르토 쿠데타의 폭력은 앤더슨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사랑한 사람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발견한 느낌 같다"고 썼다. 그는 쿠데타의 진짜 역사를 연대기 순으로 정리하고 수하르토 정권의 선전을 반박하는 운동(cause)에 투신했다. 1966년 코넬 대학교에서 앤더슨과 그의 동료들은 <코넬 페이퍼(The Cornell Paper)>를 익명으로 냈다. 이 책자는 쿠데타에 관한 공식적인 설명이 틀렸음을 드러낸 중요 문건이 되었고, 인도네시아 반체제 인사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읽혔다.

앤더슨은 인도네시아공산당(PKI) 총비서였던 수디스만에 대한 1971년 여론 조작용 재판을 직접 목격한 두 명의 외국인 중 한 명이었다(수디스만 재판이 1966년~1967년 열렸음을 미루어 볼 때 1971년은 1967년의 오타로 보인다). 앤더슨은 나중에 수디스만의 증언을 번역해 출간했고, 이는 인도네시아 역사의 핵심 문헌이 된다. 

1972년 앤더슨은 인도네시아에서 추방되었다. 그 자신이 만든 나라(nation)의 망명객이 된 것이다. 수하르토 정권이 타도된 1998년에야 인도네시아에 돌아갈 수 있었다(베네딕트 앤더슨이 인도네시아를 재방문한 때는 1998년이 아닌 1999년이다). 사적으로 친구들을 방문하고 나서 앤더슨은 인도네시아의 주요 신문인 템포(Tempo)가 후원한 감동적인 이벤트를 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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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더스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상상의 공동체>는 인도네시아 역사라는 도가니에서 태어났다. 많은 언어와 민족들(ethnicities)로 이뤄진 인도네시아 같은 다양성의 국민들(diverse nations)은 어떻게 뭉치는가? 이 국민들은 왜 때때로 허물어지는가? 거대한 국민을 이루는 사람들을 서로 죽이지 않도록 막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때로 국민적 결합(national cohesion)은 실패하는가? 이것들은 앤더슨에게 추상적인 질문이 아니었다. 대신 인도네시아 역사에 대한 생생한 몰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상상의 공동체>는 앤더슨의 가장 잘 알려진 저작이지만, 그가 쓴 모든 게 읽을 만하다. 초국민적 테러리즘에 관한 연구 중에서 2005년 나온 <세 깃발 아래서 : 아나키즘과 반식민주의적 상상력(Under Three Flags: Anarchism and the Anti-Colonial Imagination)>(길 펴냄)보다 더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thoughtful) 것은 거의 없다.

앤더슨은 전 지구적 문화(global culture)에 대한 유창한 지지자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문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세계 여행자인 베네딕트 앤더슨이 인도네시아에서 죽은 것만큼 어울리는 건 없다. 인도네시아는 그가 진정으로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라였다.
출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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