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은 눈은 검게 썩어 바짓가랑이를 챈다. 눈을 내릴때 하얀색을 모두 써버린 하늘은 회색빛이라 길을 가는 모든 이들의 표정도 짙다. 바람 새는 낡은 외투에서 줄 끊어진 시계를 꺼낸다. 약속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다. '무조건''반드시''꼭''기필코''마지막' 수많은 단어가 붙은 기회가 이젠 무섭다. 억지로 표정을 밝게 해보려 노력하지만 햇빛 조차 비치지 않는데 밝게 웃는다는건 불가능하다.
책 읽는 취미는 커녕 세 줄 이상 넘어가는 글조차 하품없이 읽기 힘들어하는 내가 책방에 들어온건 단순히 추운 칼바람을 피해 몸을 녹일 장소가 필요해서였다 책을 사러온 척 책장의 책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본다. 물론 아는 책이 있을리없다. 약간 건조하고 까끌까끌한 감촉이 마음에 든다. 책 등을 쌀쌀 쓰다듬다 문득 한 책등에서 손가락이 멎었다. "병신백일장"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병신과 백일장? 비속어와 글짓기대회라니. 병신? 병신에 관한 글일까? 아니면 병신들이 엮은 책? 나도 모르게 책을 꺼냈다. 겉표지부터 심상치않다. "병신" 이렇게 당당히 외치다니, 내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 당당함이 마음에 들긴 하지만 이런 웃기는 제목이라니. 누군가에게 내가 들고있는 책의 표지를 들킬세라 재빨리 책장을 넘겼다.
"푸핫..!" 주위의 시선이 쏠린다. 벌겋게된 얼굴을 책 속에 묻는다. 표지 그대로 책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 '병신'이었다. 웃긴 병신, 슬픈 병신, 아름다운 병신, 멋진 병신. 세상은 넓고 병신은 많다고 하던데 과연 진짜였다.
더 읽다간 주변의 눈초리에도 정신없이 웃을것같아서 재빨리 카운터에 책을 올려놓는다. "풉" 카운터 아가씨도 터졌다. 그 모습에 또 다시 웃음이 터져나와 억지로 입꼬리를 부여잡고 후다닥 돈을 건내고 도망쳐나왔다. 그러나 이젠 한계다. "푸하하하하-!!" 우와, 대로 한복판에서 큰 소리로 웃다니 . 남글이 보면 '병신'같다고 생각하겠지? 그 모습을 상상하다 한번 더 웃어버렸다.
"자네 웃는 모습이 참 보기좋구먼, 무슨 재미난 일이있으면 나도 알려주게." 정신없이 웃는 모습을 기다리던 거래처 사장님께 들켰지만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가득 차올랐다. "혹시 책 좋아하십니까?" 어쩐지 오늘은 좋은 일만 생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