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윤이상 납치고문...서독정부 vs 한국정부
게시물ID : history_246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잠룡815
추천 : 4
조회수 : 117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12/22 13:39:07
옵션
  • 펌글
윤이상...
서독에서  1959년 빌토번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작품》을,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초연해
동아시아 음악의 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시킨 그의 작품은 음악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고
1965년 초연한 불교 주제에 의한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1964)와 1966년 도나우싱엔 음악제에서 초연한 관현악곡 《예악》은 그를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죠

 1972년 서독 뮌헨 올림픽에서 공연한 오페라 <심청>은 윤이상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통합니다.  당시 <심청>은 동서문화의 완벽한 결합을 보여주었다는 극찬과 함께 동양인과 서양인 모두에게 박수를 받았었죠

암튼 이런 윤이상을 서독에서 납치한 당시 한국정부...

그에 계속해서 주권침해적으로 보이게 강력하게 항의한 서독정부...

요즘이런일이 안일어나지만 일어났다면 참 쪽팔릴듯...

 1982년 9월,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서조차  제7회 대한민국 음악제에서 이틀간 '윤이상 작곡의 밤'이 열렸었는데....

요즘 시대가 시대인만큼 

원래 윤이상 국제음악제로 출범하려 했지만 이념적 이유로 '윤이상'이란 이름을 삭제하고 윤이상이름을빼고 통영국제음악제 라고 하죠...ㅡ


1995년 유명한 괴테상을 독일 바이마르에서 받고, 그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암튼 기사본문은 A4용지 7장 분량입니다~ 시간날때 읽어보세요~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1947

태극기에 나치 문양…박정희 집권기에 어쩌다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37> 유신 쿠데타, 서른 번째 마당 김덕련 전 기자 2015.12.20 13:39:3

.....................


'청와대 친서' 거짓말에 속아 고문실에 대롱대롱 매달린 세계적인 음악가

프레시안 : 체포 과정은 어떠했나.

서중석 : 체포가 아주 극적으로 이뤄진 경우도 많고, 당사자를 속여 끌고 온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체포 과정이 크게 논란이 됐다. 6월 20일 이후 해외에서 붙잡혀 온 사람이 서독에서 16명, 프랑스에서 8명, 미국에서 3명, 영국에서 2명, 오스트리아에서 1명 등 무려 30명이나 됐다. 


당시 한국 지식인, 문화인 가운데 일류급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동베를린 사건으로 체포됐다고 볼 수 있다.

체포 과정을 보면 최덕신 서독 주재 대사도 모르게 작전이 시작된 것으로 돼 있다. 


윤이상의 경우 '박 대통령의 친서를 가져왔다. 8.15 행사에 당신이 초대받았다'고 말한 사람에게 속아서 오게 됐다. 

윤이상, 이응로 모두 이런 식이었다.


 특정 장소로 오라는 모 기관의 말에 속아서 갔다가, 그곳에서 서독 본 주재 한국 대사관까지 강제로 납치된 경우도 있다. 상당수는 기관원과 같이 가는 것에 응하지 않는다면 여권이나 대한민국 시민권을 뺏길 것이라는 압박을 받고 응했고, 또 한국의 가족이 당할 피해 같은 것 때문에 응하고 그랬다.

천상병 시인, 이 양반은 이 사건으로 몸이 더 나빠져서 기이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 기이한 행동이 참 안타까운 모습으로 여러 군데에서 나타나고 그랬다. 이 사람은 중앙정보부에서 '베를린 유학생 친구와 어떤 관계인지 자백하라'는 요구를 받으며 3번이나 전기 고문을 당했다. 몇 번이나 까무러치고 그랬다. 그래서 이 사건으로 잡혀간 지 6개월 만에 나온 후에도 행려병자로 분류돼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었다. 행려병자 비슷한 취급을 오래 받았다. 내가 <신동아>에 있을 때 <신동아> 부장이던 사람하고 천 시인이 친구였는데, 천 시인이 다리를 비틀며 회사에 찾아와 친구 이름을 부르면서 소리를 지르고 그랬던 게 기억난다. (천상병 시인이 행려병자로 분류돼 병원에 있을 때,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지인들은 천 시인이 어딘가에서 쓰러져 세상을 떠난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다. 시간이 더 지나도 모습을 보이지 않자, 지인들은 천상병 유고 시집을 발간한다. 그런데 얼마 후 천 시인은 병원에서 나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시인이 살아 있는 동안 유고 시집이 나온 특이한 사례다. 그렇게 해서 첫 번째 시집을 낸 천상병은 고문과 가난으로 고통받았음에도 삶을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으로 표현한 '귀천'을 비롯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 시를 남기고 1993년 세상을 떠났다. <편집자>)

프레시안 : 천상병 시인뿐만 아니라 이 사건에 휘말린 다른 사람들도 극심한 고통을 겪었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들은 어떤 고문을 당했나.

서중석 : 잡혀 온 사람들은 고문을 많이 당했다. 대표적으로 음악가 윤이상이 당한 경우를 한 번 보자. 6월 17일 낯선 사람이 윤이상에게 전화를 해서 "저는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 비서입니다. 대통령께서 보낸 친서를 전달해야 하니 이 호텔로 나와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거기에 가니까, '본국 대사관에 같이 가자'고 하면서 윤이상을 끌고 간 것이다.

윤이상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처음에는 윤이상이 시멘트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는데, 기관원은 윤이상의 허리 쪽을 발로 차고 무릎과 정강이를 밟아 뭉개면서 무릎을 꿇게 하고 그러면서 계속 고문했다. "너는 북조선의 간첩이야. 너는 공산주의자이며 노동당원이야"라며 윤이상한테 이 내용을 쓰라고 강요했다. 모서리가 뾰족하고 두꺼운 각목으로 윤이상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마구 때려 쓰러뜨렸다. 이런 매타작이 계속됐다. 


그뿐만 아니라 1미터 정도 되는 높이의 통나무에 윤이상을 매달고, 팔다리를 둥글고 긴 나무에 묶은 다음 얼굴에 젖은 천을 씌웠다. 물이 가득 든 주전자의 물을 천 위에 막 부어대면 천이 입과 코에 달라붙어서 숨쉬기도 어렵고 기절하게 되는데, 이런 물고문으로 윤이상은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 그런 후에는 다시 결박을 풀어서 바닥에 눕힌 다음 의사가 주사를 놓아 깨어나면 또 매달아서 물고문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윤이상은 어린 시절 고향 통영의 어른들이 송아지나 돼지를 잡던 모습 그대로 자신이 통나무에 매달린 모습이었다고 했다. 박정희 정권 때 나도 이걸 당했는데, 그때 나 역시 꼭 그런 생각이 들더라. 돼지를 매달듯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으니까. 하여튼 주사를 7번 정도 놓은 뒤 고문자들은 윤이상을 잠시 쉬게 한 후 계속해서 자기들이 쓰라는 대로 진술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 동백림 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겪은 이응로, 윤이상, 천상병을 기리는 '동백림 3인의 거장' 행사(2006년 7월 20일, 서대문형무소). ⓒ연합뉴스



대법원의 용기 있는 판결과 괴벽보 사건

프레시안 : 동백림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서중석 : 이 사건이 국제적인 사안으로까지 크게 확대된 건 체포 과정 때문에도 그렇게 됐지만 외교 문제가 크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은 서독과 차관 문제라든가 광부와 간호사 문제 등 여러 사안 때문에 좋은 관계를 맺어야 했는데, 서독 정부가 서독에서 붙잡아 간 사람 16명 전원 귀환을 요구하면서 외교 문제로 번졌다. 

자국 영토에서 수십 명을 그런 식으로 끌고 간 것을 주권 침해로 볼 수 있는 부분도 있었고, 서독 지식인들이 특히 윤이상 문제로 들고일어나 외무성에 강력히 항의한 점도 작용해 서독 정부로서도 그렇게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심 재판은 1967년 12월에 열렸다. 피고인 34명 전원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조영수와 정규명에게는 사형, 윤이상, 정하룡 등 4명에게는 무기 징역 등의 형을 선고했다. 방청석이 100여 명의 국내외 기자로 붐볐는데 그중 20여 명은 외국 기자였다. 공판이 정말 공정하게 진행되는가를 보기 위해 독일에서 대학 교수와 정부 대표 등 10여 명의 외국인도 내한해 재판을 참관했다.

1심이 끝났을 때 서독 정부는 공정한 재판과 감형을 요구했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은 정규명의 사형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서독에서 붙잡아 간 피의자 전원 송환을 요구했다
1968년 4월에 선고된 2심 판결에서 윤이상은 무기 징역에서 징역 15년형으로 감형됐다. 다른 피고들은 대개 1심과 비슷한 형을 받았다

..............

서중석 : 본국과 서독 사이에 끼여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던 최덕신 서독 주재 대사가 1967년 7월 6일 최규하 외무부 장관한테 "주독 특명 전권 대사로서 이곳에서 더 복무하는 것이 사태 수습에 도움이 못 된다. 즉시 귀국하도록 하명이 있기를 앙망한다"고 하면서 빨리 사표를 수리해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이 나온다.

대법원 판결 직후인 1968년 8월에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정부가 행사에 한국 대사를 초청하자 좌익 학생들이 항의 집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때 일부 학생은 태극기에 나치 표지를 붙여 게양했다고 문서에 나온다. 재항소심 재판이 열린 1968년 12월 5일에는 

독일 학생 40여 명이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을 석방하라"며 서독 주재 한국 대사관에 난입했다. 
40분간 대사관은 완전히 데모대의 폭력에 노출됐고, 독일 학생들이 기물을 파손하고 공관 간판에 붉은 페인트를 칠했다고 
대사관이 외무부에 보고한 문서도 있다.

그리고 1969년 1월 하인리히 뤼브케 서독 대통령은 파울 프랑크 외무부 제1정치국장을 특사로 한국에 보냈다. 

서독 대통령의 특사가 '형이 확정된 2명은 15일 이내에 석방하고 재판 계류 중인 윤이상 등 4명은 1971년 말까지 풀어준다'는 비밀 합의를 한국 정부와 한 것으로 이 공개 문서에는 적혀 있다.

지금 이야기한 것처럼 1969년 1월 서독 정부는 외무성 고위층을 특사로 파견해 여러 현안을 논의했다. 그래서 윤이상은 1969년 2월 24일 형이 확정된 후 형 집행 정지로 출감했다. 이응로 화백도 이어서 출감했다.

.........................

서중석 : 윤이상은 구치소에 수감돼 있을 때, <장자>를 테마로 그전에 작곡하고 있었던 오페라 '나비의 꿈' 마지막 부분을 작곡했다. 먼저 출감한 부인 이수자가 이걸 가지고 서독에 갔다. 윤이상의 형이 확정되기 전날인 1969년 2월 23일 뉘른베르크 시립 오페라 극장에서 '나비의 꿈' 첫 번째 공연을 했다. 윤이상을 대신해 부인이 참석, 관객들의 환호에 답했다. 서독의 많은 신문은 이 오페라에 대해 대서특필했다. 관객들의 요청으로 오페라의 막이 31번이나 다시 올라가야 했을 정도로 유례없는 대성공을 거뒀다. 

1969년 윤이상은 서독의 권위 있는 상인 킬 문화대상 수상자가 됐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인물이 몇 사람 있지 않나. 무용가로는 일제 때 유명했던 최승희가 있고 음악가로는 윤이상이 있다.

윤이상이 감옥소에서 나온 이후인 1972년 8월 1일에는 뮌헨올림픽 문화 행사의 일환으로 오페라 '심청전'이, 이것도 국내에 보도가 참 많이 됐는데, 볼프강 자발리쉬의 지휘, 귄터 레너트의 연출로 초연됐다. 1974년에는 서베를린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됐고, 1977년에는 베를린예술대학 정교수로 재직하게 됐다. 광주항쟁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인 1982년 8월, 유명한 '광주여 영원히'라는 곡이 북한에서 연주됐다. 그때부터 북한에서는 해마다 정기적으로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됐다. 한 달 후인 1982년 9월,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남한 정부도 폭이 넓다'는 걸 보여주려고 그랬겠지만, 제7회 대한민국 음악제에서 이틀간 '윤이상 작곡의 밤'이 열렸다. 윤이상의 복권이라고 볼 수 있는 조치가 이뤄진 것이다.

1988년 5월에는 인권 관계 발언으로 유명한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윤이상에게 수여했다. 1990년 윤이상은 분단 45년 만에 남북 통일 음악회를 성사시켰다. 그 결과 서울전통음악연주단이 처음으로 평양에서 열린 제1회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가했다. 그리고 평양 음악단은 서울 송년 음악회에 참가했다. 

1992년에는 만 75세 생일 기념으로 <윤이상, 시대의 작곡가>라는 논문집이 발간되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윤이상 탄생 75주년 축하 음악회가 열렸다. 그해 일본에서는 열흘에 걸쳐 '윤이상 탄생 75주년 기념 페스티벌'이 개최됐다. 같은 해에 일본 영서방(影書房) 출판사에서 <윤이상 나의 조국, 나의 음악>이 출간됐다. 그해 함부르크 자유 예술원의 공로상도 받았다. 1995년 유명한 괴테상을 독일 바이마르에서 받았고, 그러고 나서 그해 세상을 떠났다.

프레시안 : 이응로는 어떠했나.

서중석 : 이응로 이분은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면서 미술 활동을 계속했다. 미술 전문가들이 20세기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를 꼽을 때 이응로가 여러 차례에 걸쳐 꼽혔다. 2015년 <아트 인 컬처>에서 창간 15년을 맞아 전문가 23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는데,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가 누구냐'는 조사에서 1위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2위는 월북 화가 이쾌대였고 3위는 이응로와 김환기였다. <월간 미술>이 1996년에 실시한 조사에서도 역시 백남준, 김환기, 이응로 이 세 사람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이응로는 1996년 <월간 미술> 조사에서 3위, 2001년 <아트 인 컬처> 조사에서는 1위를 기록했다.

이렇게 한국을 대표하는 분들이 1967년 6.8 부정 선거로 정국이 한창 소란했던 때 간첩 사건으로 붙잡혀 와서 심하게 고문당하고 중형을 선고받은 건 민족의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




출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1947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