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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춤의 귀향 - 난고마을의 마쓰리와 부여의 은산별신제
게시물ID : history_246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잠룡815
추천 : 0
조회수 : 1510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5/12/22 17:57:13

 정가왕(禎嘉王)과 그 아들 복지왕(福智王) 이 진짜 백제의 왕이었는지 아니면 귀족인데 어차피 본국도 망했겠다
그냥 왕이라 칭한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산들 이야기가 춤으로 수천년 이어지는것을 보면 복은 있는거 같네요

그런데 신라추격대가 일본까지 가서 이들을 죽였다는것을 보면 당시에 안알려진 역사의 숨겨진애기도있는듯하네요...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1945

백제춤의 귀향
[김유경의 '문화산책'] 난고마을의 마쓰리와 부여의 은산별신제

김유경 언론인 2015.12.22 10:57:15


2015년 올 한해 본 공연 중 뒤늦게나마 기록을 남기고 싶은 무대가 있었다. 10월 4일 장충동의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일본 백제춤의 귀향' 공연이 그 중 하나이다. 망국 후 왜로 건너간 백제 왕족을 기려온 일본 규슈 미야자키현 한 신사에 보존돼온 춤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 

무용가 국수호 (전 중앙대 교수)는 백제인 미마지가 일본에 전한 무악을 찾아보는 답사 중 일본의 백제촌이라 불리는 규슈 미야자키현 남향구(南向區, 난고구)마을에서 전승돼온 백제신악(神樂, 가구라)을 주목했다. 


의자왕 휘하 백제의 중요인물로 짐작되는 정가왕(禎嘉王)과 그 아들 복지왕(福智王) 일행은 망명 직후 672년 일본의 천지천황이 죽고 천무천황이 왕권을 잡는 과정에서 일어난 '임신(壬申)의 난' 때 풍랑 속에 북규슈로 피난했다. 정가왕은 난고마을 미카도(神門)에, 장남 복지왕은 여기서 떨어진 히끼(比木)마을에 각각 자리 잡았다. 이들은 의학과 농업기술을 비롯해 불교, 천문, 건축, 예절과 문화 등 선진문명을 일본 주민에게 전파하며 존경받았다. 이후 정가왕은 신라 추격대와 싸우다 전사했다. 마을에서는 미카도 신사를 세워 그를 미카도대명신으로 받들었다. 복지왕도 죽어서 히끼신사의 수호신이 되었다. 

한일문화교류회의 박전열 위원은 "왕의 호칭에 대한 의미는 한국과 일본이 다르다. 한국 역사서에 정가왕과 복지왕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들은 의자왕의 왕자일 수도 있지만, '왕처럼 훌륭한 사람'의 의미를 부여한 백제인일 수도 있다.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그 지역과 관련 있는 인물을 내세워 신사의 수호신이자 축제의 신으로 받드는 것이 패턴이다"고 했다. 

아들 복지왕 측에서는 생전에 일행을 이끌고 히끼에서 90킬로미터(km) 떨어진 미카도의 아버지 정가왕을 방문해 효를 다하는 의례와 제사를 행했다고 한다. 

"복지왕이 해마다 먼 길을 걸어 아버지 정가왕을 찾아와 상봉하는 예절은 일본인에게 효의 행동과 가르침을 보여주며 감동시킨다. 그에 덧붙이는 의례와 질서, 춤의 미의식, 백성들과의 관련, 문화의 여러 모습이 사람을 설득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1000년하고도 수백 년간 지속돼 주민들의 애호를 받는 축제가 된 것이다"는 일본 측의 설명이 있었다.

난고마을에서는 추운 동짓달에 행해지는 이 행사를 1300년 넘게 지켜오며 놀이적 요소가 더해진 마을의 축제 '시와스마쓰리'로 만들었다. 1월 하순, 18명의 정해진 일행이 차가운 바닷물에 목욕재계한 뒤 히끼신사의 복지왕 상징물을 받들고 이동, 마중 나온 미카도 마을 사람들과 길 가운데서 만나며 의례가 진행된다. 지금은 히끼마을과 난고마을 두 지역 간을 걷지 않고 자동차로 이동해 종래의 8박 9일 행사가 2박 3일로 압축되었다. 

제사와 의례가 행해지는 미카도 신사에는 복지왕 일행을 맞아 추위를 녹이는 모닥불이 서른 군데 이상 피워져 불기둥을 올리고 있다. 제관들은 제례 용구를 반드시 왼쪽 어깨에 걸머진 채 이동한다. 흰 종이와 꽃 같은 붉은 모자로 장식된 복지왕의 혼백 상징물은 성스러운 것으로 아무도 열어볼 수 없다. 미카도 신사에 들어온 뒤 제관 두 명만이 참석해 혼백을 싼 흰 종이를 위에서부터 7장째까지 갈아줌으로써 해마다 새 옷으로 갈아입히는 의식 또한 축제의 한 과정이다. 

국수호 는 이날 공연에 대해 "백제의 정수는 많이 희석되었겠지만, 그래도 백제인들을 위한 신무로서 지켜진 부분이 있고 그 정신은 크게 보이는 만큼 대단한 가치를 지닌 움직임으로 판단되어 몇 편을 골라 무대에 올리고 한국 관객에게 보이게 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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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왕 부자 상봉의 춤. 전체과정 중에서 가장 성스럽고 중요한 의식이다. 제단에 차려진 것은 백제왕 부자의 위패와 제수인 떡이다. ⓒ한용훈


방울과 부채를 든 두 남성이 엇갈리듯 스치며 발 전체를 바닥에 대고 끌면서 신체를 이동하는 디딤새가 의례적인 분위기를 냈다. 사에키, 무라다 두 제관이 추었다. 음악은 북과 피리 두 가지만 따랐다. 간디, 나카모토 등 출연자들이 춤과 음악을 번갈아가며 맡아 연주했다. 

▲ 상봉과 이별의 춤 사이에는 '고귀한 이에게 고귀한 것을 드린다'는 뜻의 여성 제관이 추는 춤이 있었다. 혼백을 싼 용구와 방울을 들고 추었다. ⓒ한용훈



백제왕 부자에게 바치는 정재무(궁중무)는 유일하게 여성 제관이 추는 가구라였다. '고귀한 분에게 고귀한 것을 드린다'는 의미라고 했는데 방울과 혼백을 싼 종이를 들고 대체로 움직임이 빠르지 않으면서 우아한 분위기를 냈다. 일정을 모두 끝내고 마지막 정가왕과 복지왕이 헤어지는 춤은 흰옷을 입은 두 남성이 방울과 부채를 들고 추었다. 우리의 살풀이춤처럼 주변의 액을 내쫓고 모든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정화의 의미도 겸한다. 이들 세 편의 가구라가 '백제춤의 귀향'을 말하는 대표 춤이다. 


▲ 백제왕 부자의 이별을 상징하는 춤. 한국의 굿거리에서 정화의 의미를 담고 추는 춤 살풀이와 느낌이 비슷했다. ⓒ한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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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신사의 춤 어떤 점을 백제와 연계시켜 보는지를 국수호 씨가 설명했다. 

"발뒤꿈치를 디뎌서 버선코를 올린 다음 바닥 전체를 딛고 몸을 이동시키는 디딤새는 한국춤과 상통한다. 박자는 빨라도 동작은 느린 움직임으로 가기 때문에 백제시대의 궁중 예악이 이렇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일본 신사에서 제사에 등장하는 움직임이 어느 지역의 경우나 대충 이러하다. 우리의 종묘제례악도 느리다. 왕 앞에서 추는 춤 - 정재무는 빠른 것이 없다. 그 사실을 잘 보여주는 춤이 이번 백제춤의 귀향 공연이라고 할 수 있다."

▲ 무사의 용맹함을 나타내는 칼춤. 백제왕과 추격군과의 전투를 대비한 무용을 말해주는 춤이 축제 과정에 포함된다. 칼날 부분을 손에 쥐고 춘다. ⓒ한용훈

무복은 일본 신사의 제관들이 입는 일반적인 옷 비슷한데, '백제의 관복이 저러했으려나' 싶은 길게 내려온 채색옷 상의와 모자를 썼다. 

일본에서의 축제 전 과정에는 백제 왕족이 이곳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전사한 호족의 무덤을 찾는 의식도 빠지지 않으며, 두 마을 사람들이 간직해온 정가왕 일행의 이야기를 전하는 33개 춤 중엔 무인의 용맹을 보여주는 활춤과 칼춤이 있었다. 

활춤은 경쾌한 움직임이고, 칼춤은 칼을 휘둘러 자리를 정화시키면서 실제로 베어지는 날카로운 도검 두 자루의 칼날 부분을 맨손으로 잡고 추었다. 수십 년간의 훈련을 거쳐 이뤄지는 고난도의 칼춤으로, 머리장식이 칼날에 베어져 떨어지도록 얼굴 가까이 칼을 대고 추었다. 귀신이 복을 나눠주고 풍년을 기원하는 일본의 민속 무용도 무대에 올랐다. 일본 건국신화를 나타낸 춤도 나왔다. 


8개 춤이 추어지는 중간에 제단에 차린 떡을 관객들에게 나눠주는 음복례(飮福禮)가 있어 떡을 얻어먹었다. 일본 현지에서는 긴 시간 진행되는 의례라 관객들에게 틈틈이 여러 번의 음복 행하고 날이 추우니까 하얀 일본 떡에 청주, 과자, 우동 등을 먹는다고 했다. 서울에 와서는 여러 켜로 갖은 소를 넣은 팥 시루떡 세 가지를 제단에 올렸다. 


백제 유민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짐작게 하는 마지막 의례가 더 있었다. 2박 3일의 일정을 끝내고 두 마을 사람들은 헤어지면서, 서로의 얼굴에 검댕칠을 한다. "슬픔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검댕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이라고 일본에서 온 제관들이 전했다. 그리고 떠나며 소리치는 이별인사는 '오사라바- 살아서 봐'라는 뜻의 외침이다. 

▲ 오사라봐 - 부자 간의 상봉 일정이 끝나고 헤어질 때 '살아서 보자'는 이별 인사를 외치며, 슬픔을 감추기 위해 서로의 얼굴에 검댕칠을 한다. 부여 은산별신제와는 사뭇 다른 정서를 지녔다. ⓒ한용훈


난고마을의 시와스마쓰리는 한국의 부여군 은산리에서 백제 멸망 당시의 두 충신 복신과 도침을 기리는 은산별신제와 동일한 배경을 지닌다. 두 가지 제(祭) 모두 1350년을 지켜 내려오는 마을의 제이다.

 1980년 3월 은산별신제를 취재했는데, 이곳은 백제멸망 당시의 격전지였다. 동네주민 중에서 화주와 대장을 뽑고 제물을 마련하며 오랜 전통의 무녀가 신내림 등, 제를 주관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집집마다 대문 앞에 황토를 뿌리고, 산에 가서 제에 쓸 나무부터 베어오고 미리 만들어 절에 맡겨둔 꽃을 받아오는 행사가 화려해 사람들이 구경을 많이 왔었다. 전장의 장수처럼 말을 탄 제관들과 옥색 도포를 입은 마을 남정들, 화려한 옷차림의 무녀와 마을 주민들이 은산천 둑길을 따라 걸어가던 모습이 더할 나위없는 한국적 풍경이었다. 춤과 음악도 곁들였으나 특별히 복신과 도침을 위한 춤의 의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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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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