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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와 같은 부류들은 이런 부류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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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한우물파기
추천 : 0/14
조회수 : 1054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5/12/29 15:18:16
[오마이뉴스 백승대 기자]

김구 청문회
ⓒ 매직하우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고르게 존경받고 있는 인물은? 바로 백범 김구다. 아마도 10만 원 권 지폐가 발행된다면 그 인물로 김구가 유력하게 거론될 것이다. 때문에 그동안 김구에 대해서 비판을 하려면 그 근거를 따지기도 전에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김구 청문회>(총 2권, 매직하우스 펴냄)를 통해 김구라는 성역에 흠집을 내고자 하는 저자 김상구는 재야의 학자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이 책 추천사에서 "보수에게는 물론 진보의 상당 부분에도 김구는 그야말로 손 댈 수 없는 신화 그 자체"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김구의 정치 인생에서는 분명히 진보로서도 긍정할 수 있는 부분들은 있다며 "외교노선의 이승만과 달리 김구는 더 급진적인 항일투쟁노선을 견지한 것도 그렇고, 예컨대 1947년 12월 중순부터 김구가 돌연히 지지하게 된 남북연석회의 등 분단을 예방하려는 움직임들"을 거론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1920년대 초반부터 분명해진 김구의 거의 맹목적이다 싶은 반공 성향"을 필두로 "박정희 시절 김구의 정책적 영웅화 이외에 이광수라는 또 한 명의 반공주의적 민족주의자가 윤문한 <백범일지> 역시 '국민 독서'가 돼 우리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역사를 김구의 눈으로 보게 한" 것이 김구를 성역화했다고 봤다.

<김구 청문회>의 부제는 '친일파가 만든 독립영웅'이다. 저자 김상구는 해방 이후 정국에서 이승만의 반민족적·반민중적 행위에 대한 김구의 저항을 제대로 찾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김구는 친일파들로 이루어진 한민당에게 수많은 자금을 받고 그들과 결탁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근거로 부일협력 재벌 최창학에게 제공받은 김구의 거주지 경교장(죽첨장), 친일파 송진우에게 받은 900만 원, 삼양사 창업주인 친일파 김연수에게 받은 700만 원, 그리고 '주석 김구 각하'로 극존칭을 써가며 김구와 임시정부 홍보에 앞장섰던 <동아일보> 등을 언급한다.

도발적 문제제기가 아닐 수 없다. 아래는 <김구 청문회>에 실린 주요한 문제제기를 정리한 것이다.

[논란1] 박정희가 김구를 '민족영웅'으로 만들었다?

독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김구를 독립영웅으로 만든 이가 다름 아닌 박정희'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에는 김구의 아들 김신이 있다.

김구의 아들 김신(공군 중장)은 박정희와 함께 5·16 쿠데타를 주도했으며 유신독재 시절 박정희 곁에서 함께했다. 이런 사안에 연좌제를 적용해 김구를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또 김신이 아버지 김구의 고귀한 뜻을 버리고 만주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에게 협력했다는 시각과 함께 김구의 뜻이 김신의 선택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저자에 따르면 아무튼 "김구의 아들 김신이 박정희의 쿠데타에 일조함으로써 얻게 된 과실은 엄청났다". 김신 개인의 일신영달과 가족들의 기득권 진입은 차치하고라도 아버지 김구가 진보와 보수, 여와 야의 경계와 상관없이 대다수 국민이 숭배하는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실제로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백범 김구를 적극적으로 민족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남산에는 백범광장을 조성하고, 1962년에는 김구에게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대한민국장, 건국훈장 1등급)을 수여했다. 훈장심사는 이병도, 신석호 등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린 친일사학자들이 주도했다.

김신은 1962년 공군참모총장직을 예편하고 타이완 주재 대사로 부임해 8년간 일했다. 1971년 귀국한 김신은 대통령의 권유로 공화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으나 낙선한다. 하지만 그후 교통부 장관을 거쳐 유신시대에는 대통령 추천으로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이 된다. 그리고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을 거쳐 백범김구기념관 관장 및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을 지냈다.

[논란2] <백범일지>는 '친일파' 이광수가 윤문했다?

김구를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백범일지>를 친일파 문인 춘원 이광수가 윤문 각색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일 것이다. 전 국민의 필독서로 자리잡은 <백범일지>는 유려한 문장, 쉽고 간결한 문체로 출간되자마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백범 개인의 일생도 흥미롭지만,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지사들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이기 때문이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김지림군과 삼종질 흥두가 편집과 번역, 철자법 수정 등 궂은일을 했다"고 썼다. 때문에 오랫동안 김지림이 <국사본백범일지>의 윤문자로 알려졌다. 하지만 김구의 아들 김신은 이광수가 윤문자임을 고백한 바 있다.

"춘원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답니다.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 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 의문입니다."
- 최일남이 만난 사람-김신씨: 백범은 왜 단정을 반대했는가, <신동아>1986년 8월호, p.347

<백범일지>는 이광수의 윤문을 거치면서 전국민의 교양서로 자리잡았다. 아래 두 문장의 차이를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여등(汝等)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또한 반만리 중역(重域)을 격(隔)하여 그 때마다 이야기하여 줄 수도 없으므로 시시(時時)로 설여(說與)할 수도 없으므로…"

"아비는 이제 너희가 있는 고향에서 수륙 오천리를 떠난 먼 나라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린 너희를 앞에 놓고 말하여 들릴 수 없으매…"

앞의 글은 김구의 아들 김신이 지난 1994년 백범 친필본을 공개한 뒤 집문당에서 영인본을 발간하고, 그것을 윤병석이 직해(그대로 해석함)한 책에서 가져온 것이다. 아래 글은 1947년 도서출판 국사원에서 최초로 출간한 <백범일지>에서 따온 글이다.

대부분 처음 글은 어렵다 못해 난해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글은 국한문 혼용 시대였던 1947년에 발간되었음에도 문체가 대단히 유려하다.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논란3] 김구는 정치적 위기 때문에 김일성을 만났다?

평양을 방문한 임시정부 지도자 김구.
ⓒ 김종성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익히 아는, 김구의 발언이다. 김구는 이 말을 남기고 남북연석회의 참석을 위해 북으로 갔다.

하지만 저자는 김구가 김일성을 만난 이유를 달리 봤다. 바로 친일파 장덕수 암살사건이다. 김구는 이전에도 여운형과 송진우 암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거기다 장덕수까지 암살 당하자 미군정은 미온적이던 태도를 바꿔 김구를 직접 재판정에 세웠다.

물론 김구는 유죄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김구와 그가 이끌던 한독당은 치명상을 입었다. 긴 기간 정치적 동지였던 조소앙은 정계를 은퇴했고 김구의 측근인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 최중하, 박광옥, 배희범 등 8명에겐 교수형이, 조엽과 박정덕에겐 10년형이 언도됐다.

한독당은 민중으로부터 고립됐고, 김구는 '정치적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김구가 이른바 남북연석회의 '김일성·김두봉·김구·김규식 4김회담'으로 정치적 돌파구를 모색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당시 주한 정치고문 제이콥스도 비슷하게 해석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표면적으로는 '통일한국'을 부르짖지만, 남북연석회의를 제안하고 평양회담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들의 지지가 보잘 것 없으며 선거에 당선되는 것조차 불투명하자, 경기가 시작되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주한정치고문(제이콥스)이 국무장관에게, 1948.4.9. FRUS 1948, vol.6, pp.1177-1178)"

저자는 김구의 반공 노선이 변화한 게 아니라 남쪽에서는 더 이상 정치적 재기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김구가 북한의 김일성을 끌어들였다고 본다. 왜냐하면 김일성을 만나고 온 김구는 도리어 이승만과 화해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측의 이범석은 김구가 여순반란(1948.4.19.) 사건에 관련됐다는 정보를 흘렸다. 김구가 극좌극우 연합을 통한 쿠데타를 음모했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김구는 노선 변화를 보인다. 1949년 전반까지 김구는 표면적으로 통일운동세력을 자임했다. 그러나 1949년 5월 12일, 김구의 한독당은 "남북협상노선을 포기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을 지지·육성하는 노선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한다. 그리고 김구는 이승만을 만난다.

"초여름이 녹음도 짙어 고궁의 황혼이 깃들이는 19일 저녁 7시 (중략) 버들 꽃은 바람에 날리어 솜결같이 피어 날리고 뜰 앞에 모란꽃과 작약꽃이 만발하여 피인 덕수궁에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부인을 동반하고 이곳을 찾았다. 다번한 정무의 틈을 타서 이곳을 찾은 대통령과 때를 같이 하여 또 이곳에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는 김구씨는 이 자리에 나타났다. 세 분은 모두 석양의 모란꽃을 관상하고 돌아갔는데 이 두 분이 한 자리에 나타난 것은 최근의 드문 일로써 말썽 많은 세상의 물의를 물리치고 이 두 분이 친밀하고 은근한 한때를 같이 보냈다는 것만 하여도 그 뜻이 적지 않을 것이다."
- <동아일보> 1949년 5월 3일자

저자는 김구가 이승만에게 가까이 간 것만큼 중도·좌익 및 북조선과는 더욱 멀어졌다고 말한다.

성역화된 김구, 바로 보기

우리는 <백범일지>와 <나의 소원>을 읽으면서 이승만 대신 김구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통일 한국에 살고 있을 거라는 행복한 상상을 해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 책은 '그 행복한 상상이 하나의 악몽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김구의 홍보부장 격인 엄항섭은 잡지 <한민> 창간호(1936년 3월 1일자)에 기고한 글 '아독립운동(我獨立運動)의 동향(動向)'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러한 정명강간(精明强幹)한 중심인물을 영수로 하고 그의 영도에 절대복종하여 정성단결 되는데서만 우리의 독립은 완성될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에게서도 얼마던지 그 예를 찾을 수 있으니 의대리(意大利)의 무소리니, 독일(獨逸)의 히틀러, 토이기(土耳基)의 게말파샤, 중국의 장개석, 아라사(俄羅斯)의 스타린 등이 이 각기(各其) 유일무이한 영수가 되여 그의 지도하에 당세는 발전되고 국가운명을 보장하고 있다. 강적을 상대로 하여 일장혈전(一場血戰)을 경(經)하고 우리의 자유를 획득할 중임을 자부하는 우리는 일개 강유력(强有力)한 당과 정명강간(精明强幹)한 영수의 영도가 없어서는 될 수 없다."

김구를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인물로 만들어 그의 영도에 절대복종하여 단결하는 것이 우리의 독립이 완성될 것이라는 발상에 소름이 끼친다.

추천사를 쓴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는 1947년 북한 거리에 걸려있던 '타도 김구, 이승만' 펼침막과 1947년 실시된 '가장 반통일적이고 반민족적인 단체'를 묻는 질문에 김구의 한독당이 2위로 꼽힌 사실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왜 당시 1947년 서울시민은 '한독당과 김구를 반통일의 전형인 이승만을 능가하는 집단과 사람으로 보았을까'라며 문제제기한다.

강 전 교수는 "혹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 운운하면서 이 책을 달갑게 생각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정통성이나 역사 평가는 일시적인 혼란 등이 있을지라도 올바른 장기적 역사행로를 위해 응당 허물어져야 한다. 여운형 선생이나 건국준비위원회를 비롯해 정통성의 근원은 얼마든지 쌓여 있다"고 이 책의 의의를 말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에 대한 그 어떤 반론도 용납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김구가 그러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등장에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역사가와 그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그 과거가 조작, 왜곡되었다면 이해와 해석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신화화된 김구의 이미지를 넘어 이제 김구의 실체를 보아야 할 시점이다.

덧붙이는 글 | 백승대님은 <김구 청문회>의 편집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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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이야기를 인용한답치고, 이런 식의 글을 적었는데,
뭐 이상할 것도 없고 이상해야 될 필요도 없습니다.
원래 박노자같은 부류들 뭐 진중권이나 이런 사람들
달면 친일파 처단이요 반공몰이 중지요
쓰면 반공주의자들이요 친일파요 파시즘이었다는 것이죠.
 
원래 이런 인간들이었습니다.
 
참고로 이야기를 하자면 디워 사건, 황우석 사건, 기성용 원숭이 세레모니 사건까지
친일파를 척결하잔 사람들
반공몰이를 금지하자는 사람들이 갑자기 변화된 모습으로 글을 썼습니다.
 
흡사 지금의 강용석 변호사와 박찬종 변호사와 다를 것은 없어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말하는 여쪽 깨시민들....
그들에게 속은 사람들이 여쪽에서도 한두명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방법은 하나네요. 저 글의 대상이 된 김구 선생님을 더 지지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죠.
저런거 상관없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데 저라도 그런거 하지말란 법은 없잖아요?
기성용 논쟁에서도 저는 피파의 결정은 "신경쓰지 않는다."라는 것을 존중합니다.
원래 세상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유관순 개신교 논쟁 유관순 친일파 부각 논쟁을 보니 유관순 열사님은 열사님이셨구나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신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러한 비판에 대해서는 쉴드를 치려고 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들의 비판하는 저 김구 주석님이 아닌 
본인들의 정체성을 찾아주기 위해서입니다. 어른이 정체성이 없는게 곤란하잖습니까?
 
친일을 이야기하고 매국을 이야기하는 저들에게도 되돌려줍니다.
김구 주석님에 대해서 저런 식의 글을 적는 것도 친일파이며 매국노입니다.
또한 반공주의자들이 김구 주석님을 레드로 모는 것과 다를게 없다구요.
또한 이런 기사는 일본인들이 제일 좋아하겠지요.
 
 
경험론이라는게 어찌 보면 참 좋군요. 직접 당해봐야 한다는 것을 말이죠.
참고로 전 슈바이처 박사님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잦은 변화를 하지 않으신 분이라는 것을
가식이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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