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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영웅 혹은 폭군, 스탈린 (6)
게시물ID : history_11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4
조회수 : 872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1/05/03 20:48:22
위 포스터야말로 공업화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스탈린의 야망을 상징하는듯 합니다.

17. 소비에트 5 개년 경제 계획 - 스탈린식 공포 정치의 서막

1928년, 한때의 동지였던 부하린마저 축출한 스탈린은 그가 그토록 원하던 최고권력자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

다. 이후 25년간 스탈린의 1인 독재시대가 계속되게 되지요. 더 이상 사람좋은 미소로 자신을 감출 필요가 

없어지게 되자 , 스탈린은 거칠것 없이 자신의 입맛대로 연방을 개조해나가기 시작합니다. 그가 가장 먼저 

손을 댄 분야가 바로 경제정책이었습니다. 당시 소련 정부의 경제정책은 NEP (신경제 정책) 이라고 불리는

정책이었는데 집권 전에 스탈린은 이 경제정책을 지지하는 척 했습니다만 내심 큰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정책은 사유재산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인민들을 달래기 위해 사유재산과 잉여 생산물의 매매를 허용

하고 있었는데, 이 덕분에 1차 대전 이후로 날로 궁핍해져 가던 농가사정이 좀 나아지는 등의 성과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책이 러시아의 완벽한 공산화를 방해하고 있다는 목소리도 작지 않았고, 스탈린 역

시 그런 생각을 품고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자신이 권력을 잡게 되자, 스탈린은 신

경제 정책을 폐기하고 새로운 경제개발 정책을 수립, 추진하게 됩니다. 이 정책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연방 내의 진정한 공산주의 질서의 확립

스탈린은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유한 자영농 계층을 박멸하고, 집단 농장화를 통한 생산 수단의 공유화

가 중요 과제라고 보았습니다.

2.연방 전체의 신속한 공업화

당의 지지계층인 노동자들을 늘리고,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전쟁에 대비하려면 군수산업 중심의 공업화

가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이리하여 1929년부터 위에 언급한 두가지 목표를 내세운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 개발 정책이 아니라, 이후 스탈린 집권기를 특징짓는 공포 정치의 시작이었습니다. 스탈린은 자

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물론 자신이 아닌 인민들의 희생)도 치를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18.굴라크 수용소의 탄생 - 중소 자영농 멸절을 추진하다

스탈린은 자신의 새로운 경제정책의 방해가 되는 세력들로 먼저 "쿨라크" 라고 불리는 중소 자영농들을 지목

하고, 이들을 지상에서 지워버릴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우선 쿨라크들을 제외한 영세한 규모의 농민들을 콜

호스, 혹은 소프호스 라고 불리는 집단 농장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그곳에서 집단 노동에 종사하게 하였습니

다. 그러나 이들은 뒤에 남겨진 쿨라크들의 운명에 비하면 행복한 것이었습니다. 1930년 1월 30일 정치국에

서 쿨라크들에 대한 "처리 계획"이 승인되자 쿨라크들은 NKVD가 그들을 위해 준비한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

려가게 되지요. 당시 기록에 따르면 약 30만 가구의 쿨라크 가정이 1930년 7월까지 굴라크 수용소로 끌려갔

고, 나중의 스탈린이 직접 언급한 바에 따르면 1천만명의 농민들이 이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수용

소의 환경은 이루 말할수 없이 열악했으며 추위와 질병에 시달리며 하루 20시간 남짓의 노동에 시달려야 했

습니다. 이후에도 200만명에 달하는 "반동 분자"들이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오지에 위치한 수용소로 끌려가

서 금광 채굴 등의 중노동에 시달리다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런 과격한 정책은 다만 중소 자영농 계층만을 

박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머지 인민들에게 누구라도 서기장 동무와 당의 방침에 반항하면 어떻

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도 있었던 것이지요. 실제로 쿨라크들 외에도 성직자, 당에 대해 불만을 

품은 지식인들도 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지요. 어찌됐던 이런 공포정치를 통해 1933년까지 농토

의 60 %를 집단 농장화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비록 농민들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었지만, 스탈린과 당은 얻

고자 하는 것을 얻을수 있었습니다. 집단 농장화를 통해 트랙터 등을 이용한 농업의 기계화가 가능해졌고, 

이를 통해 남는 노동력은 도시의 공장으로 흡수할 수 있었죠. 1926년부터 1939년까지 2000만명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또한 식량의 공출이 용이해지면서 서방국가로부터의 기계 수입도 용이해지게 되

었죠. 그러나 너무 지나친 식량 공출로 인해 홀로도모르와 같은 비극을 낳기도 했습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

을 강제 수용소로 내몰아 희생시키고, 지나친 식량 공출로 또다시 수백만명의 아사자를 발생시킨 점만 봐도 

스탈린을 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단죄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지요. 바야

흐로 대숙청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1.농민들의 콜호스 이주를 독려하는 포스터입니다.

2.집단 농장화의 성과를 선전하는 포스터입니다.

3.굴라크 수용소의 열악한 거주지를 찍은 사진입니다.

4.수용소에서 동사한 시신을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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