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명 : 윤동식
생 일 : 1972.8.24
출생지 : 서울
직 업 : 프라이드선수
신장/체중: 184cm/90kg
좌우명 : 노력한만큼 거둔다
주특기 : 허벅다리,모두걸기,삼각누르기등
학력 사항 - 서울 당곡초등학교 졸업 - 서울 체육중 졸업 - 서울 체육고 졸업 - 한양대 체육교육학과 졸업 -
한양대학교 체육대학원 졸업(체육교육학 석사)
윤동식 선수에 대해 얘기하자면. 대학재학중의 92년 유도세계청소년 선수권 2위로 메이저급 국제무대 데뷔를 하게 됩니다.
결승때는 프랑스 선수 닥셀얀지. 결승전 그때 윤동식은 절반을 뺐기고 주의도 뺐긴 상태에서 효과를 2개 땁니다.
그리고 종료시간2초 남기고 극적인 모두걸기를 성공시켰는데요, 한부심은 한판을 또 한부심은 절반을 선언했는데
주심이 안타갑게도 절반을 선언해서 패했었습니다. 모두가 한판기술이었다고 하지만 비운의 시작이었을까요
하지만 잃은것보단 얻은것이 많은 경기였습니다 그 후로 그 친구가 본인의 패배를 인정 윤동식 선수에게 친구하자고 신청
처음의 국제적인 친구가 됐다고 합니다.
윤 선수는 서울 출신으로, 초등학교에서 유도를 배워, 중학교, 고등학교와 체육계의 학교에 진학해 유도를 경험합니다.
한양 대학에 나아가, 대학재학중보다 국제대회에서 실적을 남기기 시작해, 졸업하고 나서 즉시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하는 등 무럭무럭 두각을 표합니다.
94년에 한국 마사회 (KRA)에 유도 선수단이 설립되어, 윤 선수도 KRA에 가입.
실업단에서 기반을 얻은 윤 선수는, 94년(에)히로시마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그 후의 소속선수의 활약으로, 한국 마사회 유도단= 한국 유도대표라고 말을 듣는 KRA유도부의 기초를 쌓았습니다.
그리고, 실력의 절정기를 맞이한 윤 선수는, 93년부터 94년에 걸쳐서, 국제대회에서 47연승을 기록합니다.
이것은 한국의 국내 최다연승 기록이고, 연승중에 효과조차도 포인트를 상대선수에게 주지 않아서 한국 유도의 톱 선수로서 군림했습니다.
이 기록은 그의 KRA 소속선수인 제자 , 04년(에) 아테네 올림픽 유도 73kg급 금메달의 이원희가 48연승을 할때까지
10년에 걸쳐 깨지지 않는 기록이었습니다. 참고로 이원희는 미국유도영웅 49연승 찰라에 페드로한테 졌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유도회는 학벌이 강하고, 유도계에서는 그저그런 한양 대 출신의 윤 선수는 다른 명문 유도대학 출신선수들의 유리한 판정으로 계속 좌절했습니다
한국의 톱 유도가로 있으면서, 96년(에) 바르셀로나, 97 세계선수권, 98 아시안게임때까지 00년(에) 시드니와 올림픽의 예선에서 아닌 판정에 따라서 결승에서 패배해, 팬으로부터는 「비운의 유도왕」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되었습니다.
우선 불운의 시작을 알리는것은 95년 일본 지바 세계유도선수권을 두달 앞두고 태능 선수촌에서 훈련하던 윤동식에게 큰 사건이 하나 일어나는데 연습 도중 동료선수가 넘어지면서 윤동식의 무릎을 덮쳐서. 이때 윤동식은 무릎 인대가 여러개 끊어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이 부상이 그에게 '비운'이라는 꼬리표가 되어수년 동안 그를 따라 다니며 그 '비운'의 굴레에 얽어 맨다.
두달 앞으로 다가온 세계선수권 대회를 대비한 훈련은 못한 채 그는 물리치료만 받아야 했다. 거의 패배를 모르고 승승장구 하던 윤동식이었기에 '그래도 설마..' 하는 기대를 주위 사람들은 해보았지만 윤동식은 예선 탈락합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는 시합 도중 팔목이 부러지는 중상까지 입고만다. 그 무릎 부상이 결국 윤동식을 96년아틀란타 올림픽, 97 세계선수권, 98 방콕 아시안 게임까지 계속해서 비운의 구렁텅이에 몰아 넣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학벌도 넘어야 했습니다 윤동식은 한양대선수입니다
용인대 자신들의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또 그것에 저해가 되는것은 앞뒤 가리지 않고 짓밟아 버리는 것이 있는데
95년 세계선수권 탈락과 함께 부상을 입고 돌아온 윤동식에게 용인대 숨 쉴틈도 주지않은 채 집단 총격을 가했습니다
이 총격은 97세계선수권, 98아시안게임때까지 조인철선수를 앞세워
지원사격에 확인사살까지 윤동식을 비운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없게 끔 만들어 버립니다
국가대표 선발에는 조인철선수와 항상 다툼을 하는데
조인철선수는 절대 먼저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는 용인대선수고 아무리 윤동식선수가 좋은경기를 펼처도
판정까지간다면 무조건 조인철선수의 승입니다
그러기에 윤동식은 처음부터 적극적입니다. 무조건 한판을 따야되기 때문이죠
유도에서 큰기술을 노리는것은 언제나 위험하기 때문에 항상 불리한 조건으로 임하는것이고
윤동식 주특기인 허벅다리기술은 조인철이 바지를 잡는 반칙을 많이하기때문에
그 기술도 쓸수없고 항상 조인철선수가 경기장 끝으로 유인해서 플레이를 펼치기 때문에
조인철의 기술이 들어가면 장내요.. 윤동식의 기술이들어가면 장외니..
처음에는 던지는 한판이 강했던 윤 선수가, 판정으로 항상 불리해
확실하게 승리를 빼앗을 수 있는 삼각조르기같은 관절기술의 달인으로서 된 이유는 이 계기가 한몫한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두선수들의 관계가 나쁜것은 아닙니다.. 윤동식선수의 가장친한친구는 조인철선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윤 선수는, 01년에 뮌헨에서 행해진 세계 선수권에서 90kg급 3위의 성적을 남긴 것을 최후로 현역을 은퇴해, 소속하고 있는 KRA의 코치로 취임했습니다.
당분간은 후진의 지도에 임하고 있었던 윤 선수입니다만, 「올림픽의 징크스를 털어서 떨어뜨리고 싶다」라는 생각하는 것에서 아테네 올림픽을 앞둬 또 한번 대표의 자리를 목적현역에 복귀.
03년 6월의 리투아니아 국제로 우승해, 03년 10월보다 시작되는 유도의 한국 국내 예선에 출전합니다.
81kg급으로 1차 예선, 2차 예선 함께 7위라고 하는 성적으로 끝나, 크게 포인트를 뗄 수 있었던 윤 선수는, 대표권획득의 가능성은 거의 사라집니다.
그러나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고 싶다」라는 기분에서 윤 선수는 굳이 04년 6월의 한국 대표최종선발 전인 한국 체중별선수권으로 출장.
4위라고 하는 성적을 남기고 은퇴했습니다
그 후 8월의 아테네 올림픽의 중계에서는, 가장 시청률을 기록한 한국 MBC의 유도해설자로서 활약.
동아 일보에서도 올림픽의 해설 위원을 맡아, 유도의 경기의 해설을 행실호평을 얻었습니다.
그 후(에), 종합격투기의 연습을 시작하는 한편으로, 04년 10월의 한국의 전국 체육 대회(국가체제)에서는 유도일반부 81kg 이하 급에 충북 대표로서 출장.(왜 충북대표로 나갔는지 아직도 의문)
국가체제통산 8번째의 우승을 꾸미는 등 여전히 현역의 역량이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어, 은퇴는 하고 있지만 현역 선수와 다른것이 없는 유도실력을 보여줬습니다
윤 선수는 04년 년말의 한국에서의 인터뷰에서, 04년 12월상순에 DSE보다 PRIDE출장의 offer을 받은 것을 밝혀, 「이종(종합) 격투기에 평소부터 관심이 높았고, 현역시대에는 같이했던 요시다 히데히코가 활약하는 것을 봤다. 관절이라고 누르는 것의 기술이 득이되고, 일본의 무대에서 충분히 통용될 수 있다.」이라고 코멘트.
연말에 변호사를 동반 해 계약교섭을 행실, PRIDE남축제를 관전하였습니다
윤 선수는 PRIDE 미들급 GP출장의 기자회견에서 「요시다, 나카무라, 사쿠라바와 싸우고 싶다. 일본에서 하는 대회이니까 일본인을 쓰러뜨리고 싶다」라고 코멘트 해, PRIDE으로 활약하는 자신이 있는 것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실제, PRIDE남축제 2004에서는, 유도금메달리스트의 타키 본 마코토 선수가 종합 데뷔전을 싸워 고전해, 전투용선수를 상대로 판정으로 승리를 닦았지만, 「종합격투기를 무시했습니다 죄송합니다.」이라고 코멘트를 하고 있습니다.
또, 요전 날의 HERO' S에서는, 같은 한국 KRA소속의 올림픽유도 은 메달 리스트의 김민수선수가 밥샵을 상대로 KO패배를 당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한국인 처음으로 프라이드 미들급 GP에 입성하고 강자인 사쿠라바선수와 붙게됩니다..
그전부터 윤동식선수의 자신감있는 말투와 일본인킬러를 부각시켜서 프라이드측은 흥행성을 유도합니다..
윤선수의 강한 코멘트는 프라이드측의 철저한 계산이었습니다 그래야 홍보효과가 더 크니까요
윤선수가 그때 말씀하시는거보니.. 프라이드측에서 인터뷰할때 웃지말아줬으면 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길수있고 좀 오바성 언변도 프라이드측이 유도한겁니다. 철저하게 놀아난거죠
프라이드측은 일본인킬러 윤동식을 악역으로 몰아넣었고 훈련도 제대로 못한선수를 수없이 명승부를 펼친
일본의 시들해지는 사쿠라바와 대전시켜 사쿠라바 8강과 그의 부활을 예고했습니다.
충격적인 38초 패배를 당하고 미국으로 가서 충격의 아픔을 달래고 한국으로 와 연습을 한후
일본 다카다도장에서 훈련중입니다
그가 얼마나 활약할지는 저조차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를 존경하게 되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그의 완벽한 인간성과 끝없는 도전인것 같습니다
참고로 윤동식과 전기영에 대한 라이벌구도와 요시다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쓰고싶었지만
주제에 어긋나 쓰지 않았습니다..
윤동식 유도대회전적
92년 3월(에) 이탈리아 국제 78kg급 우승
92년 8월(에) 세계 주니어 선수권 78kg급 준우승
93년 2월(에) 파리 국제 78kg급 준우승
93년 4월(에) 아시아 선수권 78kg급 우승
93년 2월(에) 오스트리아 국제 78kg급 우승
93년 2월(에) 독일 국제 78kg급 우승
93년 12월(에) 한국 국제 78kg급 우승
94년 2월(에) 파리 국제 78kg급 우승
94년 2월(에) 오스트리아 국제 우승
94년 2월(에) 파리 국제 78kg급 우승
94년 2월(에) 독일 국제 78kg급 준우승
94년 7월(에) goodwill 게임 유도 78kg급 우승
94년 10월(에)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78kg급 우승
95년 2월(에) 프랑스 국제 78kg급준 우승
95년 2월(에) 독일 국제 78kg급 우승
95년 2월(에) 오스트리아 국제 78kg급준 우승
95년 2월(에) 파리 국제 78kg급 우승
95년 9월(에) 마쿠하리 세계 선수권 3회전패퇴
96년 2월(에) 오스트리아 국제 78kg급 3위
97년 4월(에) 아시아 유도 선수권 78kg급 우승
97년 4월(에) 버밍험 국제 78kg급 우승
98년 4월(에) 영국 국제 우승
99년 8월(에) 한국 국제 90kg급 우승
00년 2월(에) 헝가리 국제 90kg급 7위
00년 5월(에) 아시아 유도 선수권 90kg급 우승
00년 8월(에) 헝가리 90kg급 7위
00년 12월(에) 한국 국제 90kg급 5위
01년 2월(에) 아르메니아 국제 90kg급 7위
01년 3월(에) 이탈리아 국제 90kg급 3위
01년 5월(에) 동아시아 대회 90kg급우승
01년 7월(에) 뮌헨 세계 선수권 90kg급 3위
◆ 기타 사항
- 국내선수중 A급 국제대회(15개국 이상 참가대회) 최다 우승
- 파리오픈 3회 우승(국내선수 중 최다)
- 독일오픈 2회 우승
- 아시아선수권 3회(2체급) 우승(국내선수 중 최다) 등
- 47연승
특히 연승기간 중 상대에게 단 한번도 점수를(효과 조차도) 뺏기지 않음
- 세계선수권3회,ྜ올림픽우승자 전기영과 11승 9패
- 92올림픽,95세계선수권 우승자 일본의 고가와 1전 1승
- 시드니올림픽 -90Kg 우승자 후이징가와 2전 2승
- 시드니올림픽 -81Kg 우승자 타키모토와 2전 2승
이둘은 처절한 라이벌관계였습니다 2등은 전기영이 했죠
하지만 94년 전기영선수가 체급을 올리면서 라이벌관계는 마감됩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judohero 얼마전 일요스페셜에도 나왔던 윤동식 선수입니다.. 현재는 프라이드 미들급 선수로 활동중이고 데뷔전인 일본 영웅 사쿠라바 선수에게 38초만에 패배 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학벌이 아니란 이유 만으로 언제나 정상에 서질 못하고 비운이라는 딱지를 떼어 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유도로 최고가 되고 싶었고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올림픽 무대에 서질 못합니다. 용인대가 아니기 때문에 실력은 세계 탑클래스라도 갈수 없었죠. 그리고 그는 프라이드 행을 택했습니다. 세계 최고가 되고 싶었죠. 그런 프라이드는 사쿠라바를 위해 그를 단 1주정도 연습시키고 맞붙입니다. 결과는 뻔한 참패.. 사람들은 돈에 눈이 멀었다며 손가락질을 했고 윤동식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 다카다 도장으로 가서 연습하게 됩니다.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혼자 빨래며 식사 등 해결하며 죽기 살기로 연습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달전 프라이드30에서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다키모토와 붙게 됩니다. 정말 연습한 흔적이 묻어나는 경기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패배.. 비운이라는 딱지를 또 떼지 못했습니다. 이번 주 월요일에 일본 여행 차 다카다 도장에서 윤동식 선수를 만나고 왔습니다. 일본에서 그는 정말 외로워했고 한국 사람인 저를 보고는 정말 반가워 했습니다. 마치 동네 형 같은 분위기로.. 윤동식 선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왜 프라이드로 가서 고생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학벌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고 그는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중입니다. 제발 우리나라 학벌로 인해 제 2의 추성훈, 윤동식 선수같은 사람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사람이 최고가 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진정한 오유분이라면 윤동식 선수 경기때 꼭 응원하실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