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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옥(이대 영문과) 교수..위안부문제를 한국에서 최초로 알리신...
게시물ID : history_247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잠룡815
추천 : 2
조회수 : 128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12/31 09: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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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과교수님이시지만 그 어떤 교수님들보다

한국사회에서 국제적으로 피해자들을 알리시는데 큰 도움을 주신분...

관련 좋은 기사가 있길래 올립니다.



http://www.ddanzi.com/ddanziNews/62867518

[논평]위안부의 ‘백년 한(恨)', 10억 엔으로 엿 바꿔 먹다

1.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1990년 1월 4일자 <한겨레>는 한 면을 털어서 이색 연재를 시작했다. 제목은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의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 윤 교수는 이대 영문과 교수로 평양 출신이다. 첫 회 연재를 시작하면서 윤 교수는 서두에 ‘필자의 말’을 장황하게 썼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필자가 정신대의 발자취를 찾아 그들의 비참한 과거를 밝혀 보려는 데에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다. 


1944년 12월 내가 이화여자전문학교 1학년 때 일제가 한반도 각지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들을 마구 정신대로 끌어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이에 많은 학생들이 서둘러 결혼하기 위해 자퇴를 하기 시작하자 당황한 학교 당국은 “학교에서 책임지고 말하는 데 너희들에게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우리들은 국민 총동원령에 응한다는 서식에 지장을 찍어야 했다.


나는 부모님의 권고에 따라 학교를 자퇴해 정신대를 모면했지만 그 무렵의 내 또래의 많은 처녀들이 일제에 의해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에 일어난 이 끔찍한 일이 자칫하면 21세기에까지 이어져, 제2차 세계대전조차 들은 적이 없는 세대에게로 옮겨갈 것을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 금할 수 없다. 나는 이 일만은 잊어버려서는 안 되고 역사적으로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야 한다는 믿음에서 이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만일 일본이 우리나라 젊은 여성을 왜, 어떻게, 얼마나 끌고 갔으며, 무슨 짓을 했는지, 전쟁 뒤에는 어떻게 되어서 이렇게도 돌아오는 사람이 없는 지를 진작 밝히고 응징했더라면 오늘날처럼 기지촌에서 또는 관광지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외화벌이에 나서는 한국의 매춘여성은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키나와와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일본군 위안부였던 우리의 여성들이 전후 연합군 위안부로 고스란히 넘어간 경우를 발견하고 이런 느낌은 더욱 절실했다.


이 글은 1980년 12월, 1988년 2월과 8월, 그리고 지난해 7월 등 네 차례에 걸쳐 일본 홋카이도와 오키나와, 타이 핫차이, 파푸아뉴기니―그러니까 우리 정신대의 피눈물 자국을 따라 현지 신문 등 옛 자료를 뒤지고 관계자들의 증언을 모아 작성한 기록이다.


‘구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렇게 한국사회에선 처음으로 공론의 장에 오르게 됐다. 위안부 문제를 처음 거론한 사람은 역사학자도, 여성학자도, 정부 관료도 아닌 영문학자였다. 


‘필자의 말’에서 밝힌 대로 윤정옥(91) 교수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비를 들여 해외취재를 한 것은 순전히 ‘개인적 기억’에다 지식인으로서 양심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기생관광’, 기지촌 여성 문제 등 여성 인권이 사회문제여서 접근한 측면도 없진 않다.  


기사.jpg 

<한겨레> 1990년 1월 4일자에 실린 윤정옥 교수의 위안부 취재기 첫 회  


지난 2000년 3월 1일, 광화문 네거리 교보문고 앞 대로변에서 열린 제400회 ‘수요 집회’ 때 만난 윤 교수는 필자에게 “당시 내 고향 친구들 가운데도 여러 명이 정신대로 끌려갔다”며 “70이 된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우리 역사에 엄연히 있었던 일임에도 그 누구도 잘 몰랐던 역사,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역사, 그리고 감추고 싶었던 역사를 윤 교수가 어두컴컴한 지하창고에서 끄집어 낸 것이다. 해방 55년이자 1965년 한일협정이 타결된 지 25년만의 일이었다. 


윤 교수의 한겨레 연재는 한국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언론사 기자 못지않은 현장취재와 방대한 증언 채록, 관련 사료를 총망라한 역작이었다. 역사학계, 언론계, 정부 관련부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88년 여름 취재차 찾은 삿포로에서 윤 교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찾아간 곳은 ‘다치마스 미사키’라는 절벽이었다. 이곳은 매춘 강요를 견디다 못해 조선인 위안부들이 뛰어내려 목숨을 끊은 곳으로, 마을 사람들은 절벽에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어머니―, 어머니―”하고 울부짖는 소리로 들린다는 것이다. 


...................


출처 http://www.ddanzi.com/ddanziNews/62867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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