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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적 차원'이란 이름의 파시즘
게시물ID : sisa_6420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들깬잠
추천 : 2
조회수 : 25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12/31 21: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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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대승적 차원에서. 

그들은 마치 미래를 위해 싸우는 전사들처럼 말했다. 다가올 미래, 국제사회의 위험이 하염없이 가중되고 있고, 모두가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화해를 통해 과거를 잊고 힘을 합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과거는 청산되어야 한다고.


우리가 이 논리와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친일청산에서도, 과거사진상위원회에서도, 가까이 세월호에서도 이 논리는 반복해서 등장했다. 이는 국가차원의 문제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하나고 부정 입학사건에서도 학부모의 요구는 동일했다. 대다수 노사분규의 결말 역시 이러한 화해와 미래란 말로 마무리 되었다. ‘앞으로 함께 살아갈 사람끼리’이 표현은 이제 황금률이 되어 이 사회 도처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다.


우리는 이를 곱씹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황금률의 발원지가 낯선, 미지의 괴물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 안의 욕망 중 하나, ‘평등’을 향한 욕망에서 튀어나왔다고 보는 것이 옳다.  ‘앞으로 함께 살아갈 사람끼리 왜 그러냐?’의 다른 표현법은 ‘너만 특별 취급할 수는 없지 않느냐’이다. 지옥의 구렁텅이같은 이 세상에서 왜 세월호나, 위안부만이 예외적으로 취급되어야 하는 이 ‘평등’의 욕망이,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든데 왜 너만 예외취급 받아야 하냐는 이 바람이 이 황금률의 서식지이다.


이 황금률은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이래 숱하게 이어진 비상식적인 조치들을 가능케 하는 동력이었다. 그리고 이 욕망을 대변하는 한 편에 선 것은 ‘일베’였다. 일베에서 주목할 부분은 혐오나 차별에 선행하는 ‘무차별적’이란 요소다. 사회 전반을 넘어 가족도, 부모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이 ‘무차별’의 원칙이야말로 일베의 본질에 가깝다. 따라서 ‘우리 안에 일베’란 표현은 이제 다시 쓰여야 한다. 이것은 결코 우리 안에 있는 혐오나 차별을 보라는 것이 아니다. 봐야 할 것은 혐오, 차별이 아닌 평등의 욕망이다. 예외없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공동체 사회의 평등한 관계를 복원하고자 하는 바람이 이 욕망의 기점이라 본다면, ‘우리 안에 일베’란 표현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는 납득하기 힘들었던 박근혜 정권의 탄생을 설명해 준다. 불평등이 극심했음에도 자본에 강경하지 못했던 노무현 정권 시절의 실패는 이들에게 자본을 제압할 정도의 강력한 권력을 지닌 존재를 꿈꾸게 했다. 자본 그 자체라 할 이명박 정권에서도 반복된 문제는 표면적으로라도 자본과 괴리된, 심지어 자본에 무지해보이는 대상을  욕망케 했다. 이들은 역사 속에서 이 이미지의 부합되는 이미지를 찾았고 그에 부합되는 대상으로서 박근혜를 선택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추측일까? 만약 그렇다면 박근혜는 애초에 대통령, 공화제의 헌법적 테두리 내에 따르는 자로서 선택된 것이 아니다. 박근혜는 칼 슈미트의 언급에 부합하는, 진정한 의미의 주권자, 즉 예외상태를 지정할 수 있는 헌법 외부의 존재로서 선택된 것이다.


‘흙수저’로 불평등함 속에서 살아가야 할 ‘헬조선’을 해결하기 위한 강력한 힘에 대한 갈망. 이러한 인식에서 보자면 우리가 맞이한 파시즘 사회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파시즘이란 어떤 특정 광기어린 집단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다. 이들을 움직이는 동력은 일베와 마찬가지로 평등에 대한 욕망이며, 단지 이를 어떤 대리자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방법에 의해 탄생할 뿐이다. 따라서 파시즘에 대응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된다. 우리는 파시즘이란 단어 속에서, 히틀러를, 스탈린을, 박정희를 상상한다. 하지만 이들 자신이 파시스트라기보다 파시즘에 의해 소환된 권력에 가깝다. 파시스트의 이면에는 평등한 사회를 갈망하는, 하지만 이를 국가권력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이들이 포함되기에 우리는 당혹감에 빠진다. 함께 일하고, 대화하고, 밥을 먹는 이들이, 혹은 나 자신이 이 불평등한 세상에 분노하고 누군가 이를 해결해 주기를 희망하는 순간 나 역시 파시즘에 휘말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2016년은 싸움의 해가 될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이 이렇게 극심한 사회 속에서 자연적으로 불평등이 완화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1% 경제 성장률이 기대되는 상황 속에서 이 불만은 더욱 강해질 것이며 그만큼 파시즘적 경향 역시 더 강력해질 것이다. 파시스트의 한 표도 표인 민주주의 제도 속에선 독재자의 탄생을 막아낼 장치란 극히 취약할 뿐이다. 무엇보다 공동체의 복원을 국가가, 대통령이, 야권의 대선 후보가 해줄 것이라 기대할수록 그 방향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더더욱 파시즘에 가까워질 것이다. 싸움의 장소는 공공의 영역 뿐만 아니라 사적영역 속에서 펼쳐질 것이다. 갈등과 다툼을 피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 싸움을 피해 계속 도망다니며 이 모든 것이 해결될 날까지 숨어있을 계획을 꿈꾸고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번에는 낙관적인 기대를 접어야 한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파시즘을 와해시킨 것은 시민의 힘도 있었지만, 그만큼 자본의 제공한 성장 덕분이기도 했다. 뒤집어 말하면 이번 위기는 7,80년대 시민의 저항보다 더 강력한 저항, 헌법정신을 초월하는 그런 저항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저항은 결코 선택의 영역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지난 20세기의 파시즘의 결말을 우린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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