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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나라의 성립, 그 한계와 멸망
게시물ID : history_247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ornaos
추천 : 10/4
조회수 : 1584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6/01/04 17:43:53
 사람들은 연의 때문인지 촉나라의 인물들의 위상이 실제에서도 당연히 높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유비가 비록 유씨 혈족이었다고 하나 이미 망한 전한의 혈족, 그중에서도 아들이 120여명이나 있었다고 하는 중산정왕의 후예였고(사실 딱히 고귀한 유씨 혈족이라고 보기에도 좀 애매하다)
그 자신은 사농공상중에서도 가장 최하위에 위치했던 상인 출신이었는데 평원 군민인 유평으로부터 암살위협을 받았고 지방의 사족인 진등, 전예, 진군으로부터 외면을 받았으며
태사자는 사실 유비를 섬길 생각조차 하지않았다. 또 유파는 유비를 피해 멀리 도망다니기까지 했다.
명가 사족 출신으로서 유비를 섬긴다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는 명예가 훼손되고 모욕을 느끼는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유비는 당시 유협집단으로 궐기하여 난세를 풍미한 군벌이었는데 유관장 모두 상인 출신이었고 그를 후원했던 장세평/소쌍, 스폰서인 미축/미방 형제도 상인 출신이었던 것을 보면
상인 기반의 무력집단은 아니었나 싶다. 그렇기에 당시 유비 집단은 이곳저곳에 고용되어 활약을 하다가 공손찬의 후원과 도겸의 고용(?)으로 비로소 이름을 알리게되는데
그럼에도 군벌로서 지배력의 확대를 꾀하지못한 것은 아무래도 그들의 낮은 출신 성분으로 인한 사족들의 지지를 받지못한 것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몇번이나 집단이 붕괴되고 그랬음에도 다시 집단이 응축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상인들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은 아니었을까.
 
 


유비 집단은 형주의 유표의 외번이 된 이후 제갈량을 위시한 형주의 신진 사족들의 합류로 집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거기에다 제갈량은 형주의 대호족인 채씨, 괴씨, 황씨, 방씨 등과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외에도 많은 사족들과 연계되어 있어서
제갈량의 유비 정권 출사는 유비 정권과 사족들이 결속되는 시발점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나 그 사족들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사족이었던 것 같다.
 
 


북방을 정벌한 조조가 형주로 눈을 돌려 공략을 시작하자 유비는 손권과 동맹하여 조조 세력을 형주의 상당 부분을 회복한다.
조조는 용병대장 수준의 유비조차도 경시하지않았었다. 그랬던 유비가 사족들의 지지와 영토를 얻자 크게 놀라게 된다.
이는 유비가 그 출신이 미천하지만 그 실력과 능력만큼은 인정했다고 봐도 무난하다. 난세에서 세력을 구성하기 위해선 그 능력 외에도 경제력과 사족/호족의 지지, 정식 직함 등 여러 부분도 필요하다.
 
 


유비가 공안을 비롯 형남4군을 얻었다하나 아직은 손권의 외번이자 객장에 불과했다. 따라서 유비의 익주로의 진출은 필연이었다.
천운이 따랐던 것인지 익주 정벌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려 했던 오나라의 대도독 주유가 병으로 쓰러졌다. 이에 유비는 손권을 만나 남군 지역을 대여받는다.
사실 오나라가 남군 지역을 경영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이는 오나라가 수륙 양면으로 조조에 대항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당시 오나라의 실질적인 영토는 이민족이 함께 거주하고 발전도 덜 되어있는 강동의 몇 개군에 불과했다. 따라서 유비집단과 손권집단의 이해득실이 맞물려 남군의 대여가 이뤄지게 되었다.
이것은 노숙과 제갈량의 전략관이 비슷하여 나오게된 성과이기도 했다. 조조가 형주 정벌을 하여 유비 집단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때 노숙은 유비를 찾아가 동맹을 제안하는데
이때 유비는 창오의 오거를 찾아간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이 유비의 본심인지는 정확히 모르나 유비 집단은 최악의 경우 교주로의 진출 및 할거까지 생각했을 것이다.
노숙이 없었다면 어쩌면 교주의 유비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각설하고, 유비가 남군을 얻은 것은 익주 진출의 발판이 되었다. 유비는 익주로 진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때마침 유장으로부터 지원요청이 들어왔다.
유비로서는 천운의 기회였기에 마다할리가 없었다. 이는 일전에 안배해놨던 장송/법정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유장은 한중의 장로로부터의 위협으로 인해 유비를 불러들인 것인데 이때 익주의 많은 인사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유장은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사실 당시로선 유장의 판단이 반드시 틀렸다 할 수 만은 없다. 장로는 지척에서 유장 정권을 위협하던 존재였고 유비는 용병대장으로 이제 겨우 세력을 펴기 시작했으나
보급 및 지원을 유장군에 의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후 유비는 반대하던 인사들의 예측대로 유장군과의 힘겨운 싸움 끝에 유장 정권을 축출하고 촉나라를 세우기에 이른다.
유비 정권은 출신 성분으로 인해 폭넓은 사족의 지지가 어려웠고 이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명성이 드높던 명사 허정을 임용하여 사족들의 지지를 이끌어낸다.
유비나 관우는 사실 명성만 높고 실력은 부실한 이들을 좋아하지않았다. 반면 장비는 명사들과 어울리고 싶어했으나 명사들이 기피하였고 최고 명사중 하나인 제갈량으로서도 어찌할수 없었다.

익주 땅을 얻어 건국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그동안 잠잠했던 갈등과 알력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후한말의 유력했던 군벌은 모두 유협집단으로 출발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명사와 사족들과의 결합으로 비로소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유비집단도 마찬가지로 무장집단과 형주 사족의 결합으로 비로소 통치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만 해도 무장집단과 형주사족간의 다소간의 알력이 있긴 했으나 금방 해소되었다.
허나 유비 집단이 익주를 점령하고 통치하게되면서 갈등이 심화되고 복잡해지는 양상이 되었다.
 
 
 

유비 정권에는 여러 집단이 있었다. 
1. 초창기 유협 집단 + @ 
2. 형주 사족 집단 
3. 유장 동주병 집단 
4. 익주 현지인 집단
 
 

유언/유장 정권이 익주를 제대로 다스리지못했던 이유에는 유씨 부자의 직속인 동주병과 익주 현지인들의 마찰과 갈등, 그리고 공평하지못한 처사로 인해 일어난 많은 반란 등이 그것이다.

유비가 유장 정권을 축출한 후에는 동주병 집단의 참가로 그 문제가 더욱 심화되었다.
1집단과 2집단은 초반엔 약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많이 해소가 되는데, 3집단과 4집단은 그 집단의 한계적 성격으로 인해 정권의 중심축을 담당하기는 어려웠다.
3집단의 경우 유비와의 정략결혼으로 인해 융화가 이루어졌지만 4집단의 경우 그 폐쇄성으로 인해 유비 정권과 완전히 융화되기 어려웠고 그로 인해 여러 문제점들이 야기되었다.
4집단은 외래 정권인 유장 정권과 유비 정권을 배척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그들의 권력의 중추로 진입하는 것에 대한 장벽이 된 것 같다.
4집단의 경우 유비 정권의 초기부터 말기까지 중앙정부인 위나라를 지향하였고 그랬음에도 유비와 제갈량은 이들을 숙청하지않았다.
아니 아무래도 정권의 지배력 부실로 인해 못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4집단을 회유하고 포섭하려고 하였으나 결국엔 실패로 돌아간다.
 

관우의 형주 통치 실패도 비슷하다. 물론 관우의 외교적 정치적 역량의 부족으로 기인한 바도 있지만 그보단 사족 집단과의 융합실패를 더 큰 원인으로 생각한다.
이는 조조조차 해결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출신성분의 한계를 결국 극복하지못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제갈량의 가혹하지만 공평무사한 법치는 촉나라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하였지만 익주 현지인들의 정계 요직진출이 차단됨에 따라 진정한 융합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러한 것들이 촉나라가 쉽게 망하게 하는 요인중의 하나가 되었다. 중앙정부인 위나라 정권에게 촉나라의 현지인들이 금방 복속하게된 점이 그를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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