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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전초전 미군의 중립국 캄보디아 불법 폭격..강력해진 크메르루주
게시물ID : history_247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잠룡815
추천 : 2
조회수 : 167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6/01/05 14:07:41

1969년 3월부터 1973년 5월 사이, 4년2개월 동안 미군이 중립국 캄보디아를 비밀리에 불법 폭격해 30만~80만명에 이르는 무고한 시민을 학살했습니다.


그덕에  미약한 존재였던 크메르루주를 급속히 강화시켜 크메르루주에 입대하는 농민이 급증했고 결국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주는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킨후  캄보디아서 보복과 경제 악화, 학살의 악순환이 시작되었죠


중립국 캄보디아 공습 결정을 내렸던 키신저나 당시 미국대통령들은 잊혀진....


요즘보면 미국과 수니파 이슬람이 키우고있는 IS가 제2의 크메르루주처럼 될지도...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31027110011014

1973년 폭격 거부로 체포당한 도널드 도슨

여기, 그 전쟁을 말해주는 두 군인이 있다.

"캄보디아 폭격 명령을 받고 날아갔으나 어디에도 군사적 목표물이 없었다. 결국 그 타격 대상이 결혼식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더 이상 폭격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1973년 6월19일, 폭격 명령 거부죄로 체포당한 미 공군 B-52 전략폭격기 조종사 도널드 도슨 대위가 군사법정에서 했던 말이다. 

1969년 3월부터 1973년 5월 사이, 4년2개월 동안 미군이 중립국 캄보디아를 비밀리에 불법 폭격해 30만~80만명에 이르는 무고한 시민을 학살했던 베트남전쟁 시절 이야기다. 

그 베트남전쟁은 인류사에서 최초로 국가의 이름 아래 정부가 저지른 전쟁을 시민이 반대하는 혁명적 반전운동을 낳았고, 바로 도슨 같은 군인들의 양심적인 저항이 든든한 뒷심이 되었다.

"진짜 전쟁이었다.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죄 없는 사람도 죽을 수 있었다. 나는 전쟁중이라도 생명을 존중해야 옳다고 여겼다. 더 이상 (폭격)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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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dia.daum.net/editorial/column/newsview?newsid=20110116210708580

캄보디아의 사탕야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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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킬링 필드는 캄보디아 영토 안에서 벌어진 베트남전이다. 캄보디아 변경지역을 베트남 공산게릴라들의 배후기지로 간주한 미국은 캄보디아 폭격을 결심했다. 공산 게릴라 세력을 견제하려는 캄보디아 지배층은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1969년 3월 18일, 드디어 미군의 폭격이 개시돼 캄보디아 변경과 농촌 지역은 B-52 폭격으로 인한 참상이 벌어졌다.

미군 폭격과 독재정권은 미약한 존재였던 크메르루주를 급속히 강화시켰다. 크메르루주에 입대하는 농민이 급증했으며 이들은 도시를 고립시켰다.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주는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켰으며, 보복과 경제 악화, 학살의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공산 베트남과의 충돌이 표면화되었다.

종속과 빈곤의 그림자

여기에는 끊임없이 적을 설정하려는 군사적 모험주의, 예로부터 이어져온 베트남과의 갈등, 중국과 소련의 세력 경쟁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베트남은 크메르루주의 경솔한 국경 침범을 빌미로 1978년 크리스마스를 기해 캄보디아를 전면 침공했다. 베트남군은 이후 10년간 캄보디아에 주둔했으며, 철군 후에도 강력한 영향력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전쟁은 일단 벌어지면 쉽게 끝나지 않는 법이다. 캄보디아의 사탕야자 나무는 평화로운 듯 서있지만, 대량 학살의 기억과 종속과 빈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http://media.daum.net/zine/newsview?newsid=20070501080718263

‘킬링필드’ 책임자가 크메르루주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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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 군의 공포정치가 있기 앞서 캄보디아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1968년 초 미국의 베트남전 군사 개입이 한창일 때 미군 병력은 55만 명에 이르렀다. "베트남전을 끝내겠다"는 공약 아래 1969년 1월 미 대통령이 된 닉슨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키신저는 오히려 전선을 캄보디아로 넓혀나갔다. 두 사람은 캄보디아 동부 베트남 접경지대의 '호찌민 루트'를 따라 움직이는 적대세력(북베트남군과 베트남인민해방전선, 즉 베트콩)을 겨냥한 대규모 공습을 결정했다. 그에 따라 B-52기들이 캄보디아로 출격했다. 공습은 '메뉴'(Menu)라는 은어로 일컬어졌고, 공습작전 이름도 식사 시간과 관련됐다. 아침작전, 점심작전, 스낵작전, 저녁작전 그리고 후식작전 등이다.

미군의 북베트남 공습은 1973년 1월 파리 평화회담으로 그쳤다. 그러나 캄보디아 공습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공습은 미 의회나 언론, 국민들에겐 비밀이었다. 닉슨 대통령의 사임(1974년 8월)을 몰고 온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져서야 비로소 캄보디아 공습 사실이 알려졌고, 그제야 공습도 멈췄다.

1973년 공습 마지막 6개월 동안에 집중적으로 25만t의 공습이 행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일본에 떨어뜨린 폭탄(16만t)보다 9만t이 많았다.

캄보디아 공습은 키신저의 바람과 달리 공산세력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지 못했다.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당시 캄보디아를 취재했던 영국 저널리스트 윌리엄 쇼크로스는 "크메르루주 세력이 불어난 것은 미국의 군사 개입이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공습으로 가족과 생활 터전을 잃은 캄보디아 농민들은 미국의 지지를 받았던 론 놀 장군의 친미 군사정권에 적개심을 품게 됐다. 그들은 반군세력인 크메르루주를 위해 기꺼이 총을 들고 나섰다.

키신저는 왜 사과하지 않나

당시 캄보디아 주재 미 대사 에모리 스원크는 미군 공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1973년 캄보디아 주재 미 대사직을 그만두면서 미국의 캄보디아 공습을 가리켜 '인도차이나의 가장 헛된 전쟁'이라 불렀다. 그 무렵 캄보디아를 방문했던 미 하원의원 페티 매클로스키는 "미국은 베트남 전쟁 때문에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 미국이 저지른 악(evil)보다 더 큰 악을 캄보디아에서 저질렀다"(1975년 2월 미 상원 외무위원회에서의 증언)고 말했다.

캄보디아 농민들은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다가 폭격으로 죽고, 밤에는 집에서 자다 네이팜탄에 불타 죽었다. 5만∼15만 명의 농민들이 목숨을 잃고, 200만 명이 논밭을 버리고 난민이 됐다. 따라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크메르루주 치하의 1970년대 후반이 아니라 이미 1960년대에 시작됐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캄보디아 공습 결정을 내렸던 키신저는 지금껏 자신의 정책이 잘못됐다고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 1994년에 사망한 닉슨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미국 정치권에 나름의 영향력을 지닌 키신저가 무덤 속의 닉슨과 함께 캄보디아 국제전범재판소로 불려나와 준엄한 단죄를 받을 날은 영영 오지 않을까. '역사의 심판'이란 용어는 그들 사전엔 없는 것일까.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8622

킬링필드의 진실, 그 때 미군 폭격이 있었다
[유라시아 견문] 캄보디아 : 속국의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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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전체를 아울러 조망할 필요도 있다. 1975년 킬링필드의 비극은 1970년과 1979년 사이에 일어났다. 1970년 10월 9일에는 론 놀의 쿠데타가 있었다. 미국의 지원에 힘입은 군사 정변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휘말리기를 거부하며 중립 노선을 고수했던 시하누크 국왕은 축출되었다. 베이징과 평양을 오가는 망명객 신세가 되었다. 

미국은 론놀을 내세워 베트남 전쟁을 대리 수행했다. 
남베트남에 진주하고 있던 미군들도 캄보디아로 진격했다. 국경 지대의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을 타도한다는 명분이었다. 악명 높은 폭격도 시작되었다. 
1975년까지 약 270만 톤의 폭탄이 캄보디아에 투하되었다. 물론 적들만 골라 정밀 타격할 수는 없었다. 민간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폭격이었다. 

론 놀의 본심은 달리 있었다. 그는 반공주의자보다는 반베트남주의자였다. 미국의 지원 아래 (북)베트남에 대한 성전을 벌인다고 자위했다. 당시 선전 포스터에도 붉은 별의 모자를 쓴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캄보디아의 승려들을 살해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즉, 론 놀과 폴 포트는 좌/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을 캄보디아의 '주적'으로 상정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프랑스는 100년 손님이고, 미국은 5년 손님이었지만, 베트남은 '1000년의 외세'였기 때문이다. 
사이공을 비롯한 남베트남의 거개가 한때는 캄보디아의 영토였다. 

킬링필드가 대학살이고 대참사였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곳만큼은 두 번째 방문에서도 숙연하고 처연했다. 도시는 소각되었고, 화폐는 폐지되었으며, 지식인에 대한 탄압은 극에 달했다. 교사의 80%, 의사의 95%가 죽음을 면치 못했다. 

다만 이 극단적 히스테리에는 하노이에서 외국물을 먹고 온 '친베트남파'에 대한 강박적 두려움이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의 남진(南進)을 거드는 내부의 적이라고 여긴 것이다.

게다가 킬링필드의 피해 또한 과장이 심하다. 불과 3년 남짓에 인구의 4분의 1이 학살되었다는 억측이 만연하다. 인구의 4분의 1이 준 것은 사실이다. 다만 1970년대 전체에 걸쳐 일어난 일이다. 미국의 폭격으로 사망한 인원부터, 베트남이나 태국으로 피난 간 사람들까지 도합한 숫자이다. 

과연 5년의 무차별 폭격과 3년의 집단 학살 가운데, 어느 쪽의 인적 피해가 더 컸는지 단언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기록의 편중과 기억의 편향이 막심하다. 폴 포트의 '적색 킬링필드'만이 일방적으로 부각되었다. 미국의 전쟁 범죄, '백색 킬링필드'는 철저하게 가려졌다. 1970년대의 인도차이나라는 시공간적 맥락은 생략된 채, 아시아 공산주의 정권의 잔혹함과 야만성만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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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캄보디아 공격은 1978년 12월 25일 시작되었다. 10만 명의 최정예 베트남군이 성탄절에 맞추어 출격했다. 캄보디아를 접수하는 데는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수십 년간 실전으로 단련된 막강한 부대였다. 프랑스와 미국을 연이어 물리친 세계 유일의 군대였다. 

베트남은 1979년 1월 7일 프놈펜 '해방'을 선언했다. 크메르 루주의 악몽이 끝났다고 선포했다. 민주 캄푸치아는 전복되었고, 캄보디아 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즉각 베트남을 모델로 삼은 국가 개조가 단행되었다. 10만 명의 베트남군이 상시 주둔했다. 총책임자는 베트남의 혁명 원로 레득토(Le Duc Tho)였다. 학교야말로 새 나라의 초석이었다. 교실마다 스탈린과 호치민의 사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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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media.daum.net/editorial/column/newsview?newsid=20110116210708580

http://media.daum.net/zine/newsview?newsid=20070501080718263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310271100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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