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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내재성 개념에 대해서 (동서양 철학의 차이)
게시물ID : phil_1152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agarjuna
추천 : 4
조회수 : 1612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5/05/29 22: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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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예전에 한번 써봤던 글인데 지난번 동서양철학의 차이 이야기가 나와서 이곳에도 한번 올려봅니다.
들뢰즈의 내재성 개념을 다룬 <내재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고 써본 글인데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네요. 
글에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만  동양철학(중국철학)의 특징에 대해 서양출신 학자(프랑수아 줄리앙)의 관점에서 서술한 <사물의 성향>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도 같이 읽어보실것을 추천드립니다. 




들뢰즈에 의하면 내재성 혹은 내재성의 플랑plan이란 '사유'나 '개념'이 아니라 그것의 '환경'을 의미합니다. 그에게 개념은 '정의되지 않는 개념으로 정의되어야할 개념'이라고 할 수있는데 이처럼 사유되거나 정의되지 않는 개념의 조건이나 환경이 바로 내재성이라는 것이지요.따라서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재성은 사유의 이미지나 사유의 환경이라고 말 할 수있습니다.  들뢰즈 철학은 바로 이 내재성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념의 환경"이나 사유의 이미지라는 표현은 <니체와 철학>이라는 들뢰즈의 저작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그밖에 <푸루스트와 기호들>, <시네마 1,2>등의 저서에서도 "이미지"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오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사유의 혹은 개념의 환경이라는 표현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유의 환경이나 이미지라는 말은 그것 자체가 사유나 개념의 대상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그 대신 사유나 개념 자체가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마치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했던 이성이나 경험의 대상을 분석하기보다는 그것을 가능하게하는 선험적 조건을 탐구함을 통해 이성이나 경험의 토대를 드러낼수있었던 것과 같은 방법입니다. 개념이나 사유는 그것들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그 개념이나 사유가 하나의 무전제로서의 토대가 됨으로 하나의 독단이 될수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개개의 개념이나 사유 혹은 경험대상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대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혹은 환경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요. 

들뢰즈는 바로 이러한 개념들 스스로가 가진 아이러니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사유의 환경으로서의 사유의 이미지로서의 내재성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들뢰즈의 이런 철학적 출발은 고대 그리스철학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비롯됩니다. 플라톤철학에 대한 비판 그리고 고대 그리스철학의 개념적 토대를 확립한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출발하게 되지요.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원동자,질료, 목적,형상등으로 이루어진 4원인을 통해서 존재 혹은 물질이 현존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개념적 접근법은 4가지 개념자체가 불변적 항으로 미리 존재함을 '전제'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희랍의 철학은 실체/실재의 존재를 설명 위한 이러한 불변적 개념들을 자체내에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불변적이라 함은 이러한 개념자체가 무전제의 근거로서 의심받지 않고 자명한 개념으로 전제됨을 의미합니다. 운동이나 변화가 가능한 것도 어디까지나 이러한 4원인들이 상호작용한 결과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반면 중국철학은 이러한 개념적 불변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얘를들어 음양이론 같은 경우에는 음에서 양으로 변화/운동하기 위해 또다른 제 3의 혹은 제 4의 대상이나 개념이 필요치 않습니다. 다만 그것들은 스스로 음에서 양으로 혹은 양에서 음으로 유동할 따름이지요. 그것들은 스스로가 대상이기도 하면서 변화의 환경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희랍의 철학이 불변의 존재(있음)을 사유하려한다면 동양은 생성이나 변화를 사유하려고 한다는 평가가 가능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지요. 들뢰즈 철학은 때문에 이러한 동양철학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불변의 실체나 대상 혹은 개념으로부터 출발하기를 거부하고 대상의 환경이나 이미지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지요. 

한편 들뢰즈는 내재성을 '생명'으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그는 말년에 <내재성: une 생명>이라는 논문을발표한 한 바 있습니다. 그의 내재성 개념을 훌륭하게 설명한 짧은 논문입니다만 제목에서부터 많은 점을 시사합니다. 특히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 une라는 부정관사인데요. 영어로 지차면 a/an과 같은 의미를 지니지요. 들뢰즈에 의하면 내재성은 생명과 같은 특성을 가집니다. 여기서 생명은 유기체적 생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기적 생명"에 더 가깝지요. 유기적 생명은 스스로 존재한다기 보다는 무기체적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렇나 그렇다고 모든 생명의 특성이 무기체로 환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스스로를 반복하며 창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서 '비자발적 수동성'을 가집니다. 이런 비자발성을 통해서 스스로를 반복하면서 창조하는 능동성 혹은 주체성을 생성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생명은 내재성 다시말해 그것의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창조와 생성이라는 영원회귀가 가능하게 됩니다. 그것은 개체적 원인과 목적 그리고 뱡향을 스스로에게서 의지하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어디까지나 비자발적 생명이지요. 이러한 비자발성으로부터 창조적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생명'이 됩니다. 

여기에 바로 une라는 부정관사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비개체성 혹은 비인격성을  나타내기 위한 기능을 합니다. 들뢰즈는 생명 앞에 부정관사를 붙임으로써 앞서 말했던 것과같은 생명이 가진 아이러니하고 역설적인 측면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지요. 이처럼 사유의 이미지와 생명은 비자발성을 특징으로 가집니다. 그것은 특정한 원인이나 목적을 합목적성으로 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의 비자발성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생명은 이러한 비자발성으로부터 창조성을 이끌어 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성이요 변화가 되겠지요. 

내재성은 유동적 세계의 비자발적인 무한한 반복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창조의 계기를 마련하는 생명이 됩니다. 이것이 들뢰즈가 그의 내재성 철학으로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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